“지퍼보다 섹시한 것은 없다. 이는 빠르고 열정적인 섹스를 위한 것이다.” 일찍이 미국의 소설가 앨리슨 루리는 지퍼가 지닌 에로티시즘의 의미를 이렇게 역설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도발적 매력이 도드라진 이번 시즌의 지퍼는 우리에게 ‘여밈의 수단’이 아닌 ‘노출의 방법’으로 다가선다.

지퍼와 에로티시즘의 상관 관계를 이야기하자니 엉뚱하게도 화보 촬영 현장이 떠오른다. 단추가 지네 다리처럼 촘촘하게 이어진 쿠튀르 드레스를 모델에게 입힌 적이 있는데 물경 30여 개의 단추를 꿰고, 푸는 그 시간은 마치 영겁과도 같았고, 상상 이상의 집념과 인내심을 요구했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만약 남자고, 그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침대에서 만난다면 아마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긴 어렵지 않을까 싶다. 물론 단추 대신 지퍼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찌익’. 지퍼를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기껏해야 1~2초 남짓. 지퍼는 즉각적이고 격렬한 에로티시즘을 유도한다. “지퍼는 옷을 입는 문화뿐 아니라 옷을 벗는 문화에도 혁신적인 영향을 끼쳤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이 간편한 여밈의 도구는 야릇한 상상을 부추기는 오브제다. 클린턴과 르윈스키가 일으킨 세기의 섹스 스캔들을 ‘지퍼 게이트’라는 말로 축약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은 지퍼를 단순히 ‘실용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이를테면 샤넬의 칼 라거펠트는 이번 시즌 지퍼를 은유적인 노출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트위드 코트의 아랫자락 쪽 지퍼를 슬며시 열어둠으로써 코트 안의 스커트를 드러내는 스타일링이 컬렉션 전반을 장식한 것. 또 알투자라, 마이클 코어스, 끌로에는 스커트 슬릿에 지퍼를 장식, 더없이 여성스럽고 유혹적인 디자인을 완성했다. 한편 지방시는 바이커 재킷 모티프의 와이드 벨트를 컬렉션의 주요 아이템으로 활용했는데, 반쯤 열린 지퍼 장식의 벨트는 남성적이고 거친 바이크 룩에 도발적인 관능미를 불어넣는다. 미우미우는 또 어떤가. 벨트로 허리를 바짝 조인 말간 얼굴의 아가씨들은 금방이라도 벗어 젖힐 것만 같은 지퍼 장식의 코트를 입고 청순한 관능미를 발산한다. “옷을 벗는다는 생각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다.” 디자이너 조셉 알투자라의 말처럼 이번 시즌 지퍼는 강렬한 에로티시즘의 상징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완전한 노출보다 노출을 상상케 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인 유혹의 방법임을 잘 알고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