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하나의 태도가 방을 채웠다. 우리가 오래도록 사랑한 그녀 샤를로트 갱스부르, 다프네, 그리고 생 로랑(Saint Laurent)이 함께한 어느 여름날.

W Korea 요즘 어떤 날들을 보내고 있어요? 인터뷰는 화보 촬영 후 이렇게 서면으로 나누게 되었지만, 칸에서 당신을 보고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했어요.
Charlotte Gainsbourg 정말 정신없는 일정을 마쳤어요. 영화 <지젤(Gisèle)>을 드디어 마무리하고, 친구와 함께 휴가를 다녀왔죠. 인생 처음으로. 아, 정확히 말하면 처음은 아니네요. 예전에 아버지 덕분에 친한 친구와 모로코로 떠난 적이 있으니까요. 일주일 동안 공주님 대접을 받았죠. 하지만 순전히 재미로만 친구와 여행을 떠난 경험은 처음이에요. 여자 둘이서, 포르투갈로 말이죠. 그다음에는 바로 이반(Yvan Attal), 그리고 우리 막내딸과 함께 또 떠났어요. 이번엔 코르시카로! 열흘 정도 쉬었는데, 정말 놀라웠어요. 포르투갈에서는 며칠 동안 요가를 아주 열심히 했죠. 저 자신을 뛰어넘고 싶었고, 좀 자랑하고 싶기도 한 마음에 4개월 동안 안 하던 요가를 그렇게 했더니 지금 계속 몸 상태가 말이 아니네요.
과거에 한국 매거진과 화보 촬영이나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나요?
화보 촬영은 이번이 처음일 거예요. 꽤 확실해요. 인터뷰는 아마 이번처럼 칸에서 영화를 선보일 때라든지, 다른 해외 영화제에서 한 적이 있을 수도…. 솔직히 제 기억력이 형편 없거든요. 확실하지는 않아요.
화보 촬영장에 함께 온 ‘다프네’가 우리 화보에도 출연했죠. 다프네가 만들어주는 평온한 분위기가 확실히 있었어요. 몇 년 전에는 ‘리타’라는 강아지를 떠나보낸 거로 아는데, 반려견에 얽힌 스토리를 뭐든 들려주실래요?
저는 늘 개를 사랑했어요. 고양이도요. 하지만 개하고는 운이 맞지가 않았어요. 아버지가 키운 불테리어, ‘나나’는 병으로 네 살 때 세상을 떠났어요. 그다음으로 ‘코미’가 있었죠. 제가 열아홉 살 때 엄마가 선물해주셨어요. 그즈음이 막 이반을 만났을 때인데, 이반은 “나 아니면 개, 둘 중 하나야.” 이렇게 말할 정도여서 코미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그가 또 한 마리를 데려왔어요. 제가 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도 알게 됐거든요. ‘자지이(Zazie)’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 아이도 신장에 문제가 생겨서 병으로 네 살 때 죽었어요. 이반은 너무 마음 아파하면서 다시는 키우지 말자고 했죠. 하지만 저는 언젠가 다시 키우게 되길 원했어요. 아이와 개가 함께 자라는 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결국, 뉴욕에서 6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 온 후 다시 개를 들였죠. 그 아이가 ‘리타’예요. 리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고요. 고작 열세 달짜리였는데…. 너무 충격을 받아서 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엄마가 이러시더군요. “그럴 때는 바로 다른 개를 키워야 해.” 그렇게 만난 아이가 ‘다프네’예요. 정말 훌륭한 아이죠. 하지만 사람들이 너그럽기만 한 건 아니기 때문에 어디든 데리고 다닐 수는 없어요. 다프네는 아직 어려서 놀기를 워낙 좋아하는데, 그걸 남이 감당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현장에 따라 웬만하면 데리고 다니려고 해요.


한 패션 하우스와 진정으로 어우러지는 인물이 앰배서더를 맡는 일은 의외로 흔치 않은데, 당신과 생 로랑은 정말 잘 어울립니다. 생 로랑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이야기가 오래도록 이어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요. 안토니 바카렐로가 생 로랑에서 일을 시작할 때도 함께
했고, 그전부터 안토니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참 감상적인 기분이 들어요. 그는 정말 자신만의 방향을 밀고
나가며, 비전이 있고, 엄청나게 용감한 사람이에요. 그러면서도 생 로랑의 정신과 스타일을 유지하고요. 솔직히 저는 평소에도 생 로랑만 입어요. 진이나 티셔츠가 겉보기엔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저는 다른 곳에서는 그런 옷을 본 적이 없어요. 핏이며, 재단이며…. 몇 년에 걸쳐 안토니가 만든 옷을 꽤 많이 모았는데, 드레스업을 해야 할 때면 그것들이 참 자랑스럽게 느껴진답니다. 그리고 저는 그저 새로운 것보다는 그 뒤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요, 안토니는 제 안의 섹시한 면을 끌어내고자 한 첫 인물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토니를 통한 섹시함이었기 때문에 괜찮게 느껴졌어요. 용기를 북돋아주는 느낌마저 들었죠.
4월, 아마존의 프라임 비디오에서 <에투알(Étoile)> 시리즈가 공개됐어요. 한국에서도 그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 제인 버킨이 편찮은 상태일 때 캐스팅되었고, 결국 2년 전 그녀를 떠나보낸 후 촬영을 시작하셨죠. 심적으로 무거운 상황에서 코미디 장르 작업을 하시는 게 어땠을까요 ?
완전히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작품이 저에겐 큰 도움이 됐어요. 정신없이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거든요. 매일 그 많은 대사를 외우고, 아침부터 밤까지 뭘 해야 할지 아는 거. 그게 제 생활에 구조를 만들어줬달까요. <에투알> 시
즌 2가 제작되지 않을 거라는 소식을 아주 최근에 들었어요. 정말 슬프네요. 대본에서 특유의 독특한 리듬을 발견하는 일부터 모든 게 즐거웠거든요.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하면서도 갇혀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바로 그런 지점에서 제 리듬을 찾을 수 있었고요. 심지어 몸의 움직임까지도 자유로웠어요. 제 움직임이 코미디의 일부가 됐으니까요. 정말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은 더 일찍 뱉어야 했을 것 같은데, 엄마를 보내고 아무 할 일 없이 자연 속에서 그저 쉬기만 했던 첫 여름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어요. 저에겐 일이 가장 좋은 돌파구가 되어줍니다. 무엇보다, 늘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거니까요.
<에투알>에서 파리 국립발레단의 임시 아티스틱 디렉터, ‘제네비에브’ 역할을 맡으셨죠. 그녀는 하이힐을 자주 신는데, 그만큼 자주 벗는 모습도 등장합니다. <에투알> 프로모션 때 당신은 하이힐 이야기를 하면서 <분홍신>이라는 영화를 언급하더군요. 혹시 1940년대 영화 <분홍신>을 말하나요?
빨간 하이힐이 대본에 명시되어 있었고, 그건 제 캐릭터의 특징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했어요. 맞아요,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가 만든 <분홍신> 속 이미지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에투알> 작업을 하면서야 <분홍신>을 알게 되었는데, 여태까지 그 영화의 존재를 몰랐다는 게 믿기지 않더군요. 영화의 아름다움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시대에 만들어졌다기엔 너무나 현대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이에요. 그 후 무용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많이 보기 시작했어요. <에투알>을 만나
기 전까진 무용의 세계에 대해 거의 몰랐거든요.
제네비에브가 전직 무용수로서 춤추는 장면이 드라마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춤추는 연기, 자신 있으세요?
제네비에브가 춤추는 장면이 들어가야 한다, 그게 바로 제가 제작진에게 간청했던 바예요. 저는 완전히 낯선 세계로 뛰어들어 새로 배워야 하는 프로젝트를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에이미(공동 감독 및 작가)가 이러더군요. ‘우리 작품에 댄서는 이미
충분하다. 우리가 진짜 보고 싶은 건 발레의 다른 면이다. 백스테이지, 공연 무대 뒤의 분주함, 행정적인 면, 그리고 무용수와 안무가는 아니지만 그 예술에 경외감을 느끼는 사람들 말이다.’
저도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어요. 춤에 대해서라면 늘, 좀… 아쉬움이 있어요. 왜냐하면 저는 10대는 물론이고 성인이 된 후에도 제 몸을 약간은 불편하게 느꼈거든요. 사실 저는 아주 유연한 편이에요. 춤에 잘 맞는 체형이기도 하고요. 재능은 어떨지 몰라도 신체적 자질만큼은 분명 갖추고 있어요. ‘내가 춤을 췄다면 더 열려 있고 외향적인 사람이 되었겠지. 움츠린 어깨에 갇히지 않고 더 자유로웠겠지.’ 이런 생각을 늘 합니다.

이번 칸 영화제 기간 동안 케어링이 주최한 ‘우먼 인 모션 토크’에도 참여하셨죠. 거기서 당신이 한 말 중 인상적인 대목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제인 버킨이 생전 당신에게 “넌 코미디에 어울리는 사람이야” 같은 말을 자주 했다는 점입니다.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제 안에 있는 상반된 면을 보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언뜻 조용하고 내성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장난스럽고 예기치 못한 면도 있거든요. 저는 부조리한 것, 코미디가 허용하는 살짝 엇나간 리듬을 좋아해요. <에투알>에서는 불어와 영어를 오
가는데, 특히 영어로 연기하는 장면들에서는 마치 다른 자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죠. 좀 더 가볍고, 대담한 나로요. 친구와 가족들은 <에투알> 속 제 모습이 상상했던 것보다 저와 더 잘 어울린다고 기뻐하더라고요. 제네비에브 같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묘한 해방감이 있어요. 우아하고 점잖은 건 내려놓고, 우스꽝스러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니까요. 코미디가 저와 잘 맞는 건 제가 늘 어색함과 대담함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기 때문일 거예요. 저는 저의 그런 면으로 사람들
을 놀래키는 걸 즐긴답니다.
무용수는 완벽에 가깝도록 준비를 마쳐야 무대에 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우나 가수는 좀 다르잖아요. 다소 즉흥적으로 임해야 더 좋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에투알> 작업을 하면서, 예술 안에서 서로 다른 장르가 지닌 특성과 차이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셨나요?
이번 기회로 춤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춤은 정말 많은 걸 요구하는 예술이에요. 육체적인 수련, 정확성, 완벽함까지 필요하죠. 즉흥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요. 적어도 <에투알>이 그리는 종류의 발레 세계에서는요. 감정과 표현도 필수적이죠. 기술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던 순간이 기억나요. ‘와, 그냥 배우인 게 훨씬 더 쉽구나.’
노래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어요. 제 경우는 아니고, 온몸을 써서 노래하며 춤을 춘다거나 상당한 힘이 담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건 정말 또 다른 세계일 거예요. 역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클래식 무용보다는 좀 더 자연스러울지도 모르죠. 그렇더라도 결국은 다 훈련이에요. 근육과 같으니까요. 노래에 대한 제 생각에는 제가 자란 환경, 특히 아버지(세르주 갱스부르)의 영향이 컸어요. 아버지는 큰 목소리나 화려하게 꾸미는 가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자주 그런 식의 말씀을 하신 게 바로 얼마 전에도 생각났어요.
아버지의 페이버릿 송 중 하나는 주디 갈란드의 ‘Somewhere Over The Rainbow’였죠.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대단하잖아요. 아버지는 배우들에게 노래를 부탁하길 좋아하셨어요. 배우들은 노래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목소리가 더 연약하고 여린 느낌이 난다는 걸 아셨거든요. 그 연약함 속에 뭔가 감정적인 게 담겨 있죠. 배우들은 노래를 연기하는 셈이에요. 저는 이젠 노래와 어느 정도 화해했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도 노래하는 게 완전히 편하지는 않아요. 제가 보통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런 유의 가수는 아니라는 걸 알아요. 스스로 프로 가수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콘서트도 하고 앨범을 내면서 즐기고 있어요. 이건 단지 다른 종류의 일, 다른 스타일인 거죠.
연기에 관해서 말하자면, 저는 열두 살에 연기를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는 사전 준비 작업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지금은 한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 준비해가는 과정을 사랑합니다. 감독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찾아내고, 캐릭터를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전체적으로 일을 더 흥미롭게 만들거든요. 하지만 촬영에 들어갈 때가 되면 그 모든 걸 내려놓아요. 장면 속으로 들어가면 잊어버리죠.
저는 최근에 이런 주장을 접했어요. ‘AI로 인해 의외로 예술가들이 일찍 사라질 것이다, 예술은 영원하지만 예술가는 이제 필수적이지 않을 수 있다.’ <에투알>은 예술이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잖아요. 지금의 예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편이에요. 제가 성인이 된 후 첫 솔로 앨범을 녹음할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 이미 제 주변 사람들은 다 블랙베리인지 블루베리인지를 쓰고 있던데… 그걸 뭐라고 불렀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저는 그런 기기를 거부했어요. 이메일조차 좀 부담스러웠거든요. 이동 중에 그런 작업을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그런데 기억에 남는 순간은, 제 음반 프로듀서가 ‘곧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음악을 듣게 될 거야’라고 말했을 때였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시간이 지나 언젠가부터는 아이들이 휴대폰이나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점점 극장에 가지 않는 걸 봤고요. 무서웠어요. 제가 사랑하는 그 모든 게 천천히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상실감이 들었어요. 이젠 우리가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과 관계가 달라졌죠. 사람들은 음반 전체가 아니라 한 곡만 듣고, 드라마는 한 번에 몰아서 봐요. 인내심이 줄었달까요. 드라마에 관해서는, 적어도 배우 입장에선 미니시리즈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캐릭터를 차근차근 구축하고, 시간을 두고 머무르면서 총 6시간에서 8시간에 걸쳐 발전시킬 수 있죠. 정말 풍요로운 경험이에요.
하지만 AI에 대해 생각하면, 곧 모든 게 진짜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어요. 얼굴은 인공적일 거고, 눈물도, 감정도, 사랑도 진짜가 아닐 거라고 상상하는 게 쉽지는 않아요. 저에게는 그 모든 게 엄청난 상실감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점점 균질화된 세상으로 향하고 있죠.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무언가를 잃어버릴 위험이 분명히 있어요. 라스 폰 트리에와 작업했을 때가 떠오르네요. 그는 항상 ‘우연’을 찾았어요. 계획할 수 없는 작은 순간들, 예상치 못한 일들, 결점들 말이에요. 연기를 ‘진짜’로 만드는 건 그런 것들이죠. 그걸 AI나 무언가로 어떻게 대체할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어요. 음악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요.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우리가 진짜 예술가를 이해하고, 또 진짜 예술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저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거든요. 진짜 사람들이 진짜 일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아요. 저도 언젠가는 AI 때문에 놀라기도 하고, 감명받기도 할 거예요. 다만 그게 저를 속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에투알>은 파리와 뉴욕의 상반된 개성을 코미디 요소로 활용하는 작품이기도 해요. 파리와 뗄 수 없다고 생각되던 당신이 팬데믹 전 뉴욕에서 6년 정도 살았죠. 슬픈 일을 겪은 후였다고 들었습니다. 뉴욕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들려줄 수 있나요?그 6년이 아마 제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이었을 거예요. 최악의 일을 막 겪었는데도 말이죠. 제 언니 케이트를 잃은 거요. 하지만 파리에서 뉴욕으로 떠난다는 선택이 고통을 좀 다른 것으로 바꿔줬어요. 고통이 매일 저를 짓누르지는 않게 된 거죠. 대신 제가 언제 울고 싶은지, 언제 현실을 마주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어요. 어느 정도 통제력을 되찾았다고 할까요. 그리고 처음으로, 언니에 대한 앨범을 쓸 권리가 저에게 있다고 느꼈어요. 스스로 그걸 허락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늘 고문받는 것 같았어요. 가사를 쓰려다 곧장 멈출 때가 많았죠. 무언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거든요. 늘 비교하고, 늘 스스로를 비판했어요. 그런데 뉴욕에서는 자유로웠어요. 글을 쓸 수 있었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죠. 그게 바로 언니가 하던 일이었거든요. 언니는 사진작가였어요. 뉴욕이라는 도시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발견하기도 했어요. 전에는 저에게 별 의미 없었던 도시가 갑자기 생명력으로 가득해지더군요. 제가 모든 것에 열려 있었죠. 사람들과 대화하고, 거리의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파리에서는 하지 않던 방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었어요. 뉴욕 길거리에서는 아무도 제가 누구인지 신경 쓰지 않았죠. 그 익명성이 모든 걸 새로운 시작처럼 느끼게 했어요. 뉴욕에 갔을 때 저는 이미 마흔이 넘은 나이였답니다.

당신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스스로에 대해 ‘샤이’하다는 표현을 자주 쓰더군요. 사실 당신이 어릴 때 출연한 토크 쇼에서, 찌르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을 본 것도 같아요. 이를테면 라스 폰 트리에 같은 감독과 작업하면서 스스로를 극한의 상황에 밀어붙이는 것은 수줍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수줍음은 꽤 흔한 것 같아요. 배우가 되는 것도 그렇고요. 저는 극도로 수줍어하는 배우들을 만난 적이 있거든요. 아마 도전받고 싶고, 누군가 밀어붙여주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될 수 없으니까 일종의 배역이 필요한 거겠죠. 저도 사실 혼자서 뭘 감행하기 전에 감독이 절 밀어붙여야 했어요. 이젠 좀 더 용기가 생겼으면 해요. 그렇다고 일상에서 제 수줍음이 사라질 거라는 뜻은 아니지만, 촬영장에서 감수하는 위험들은 정말 흥미진진하거든요.
연기하는 것, 화보를 찍는 것 모두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죠. 사진 찍히는 일은 즐기는 편인가요?
저한테는 그 두 가지가 아주 달라요. 언니가 직접 제 사진을 찍어주고, 즐기는 법을 가르쳐주기 전까지는 사진 찍는 걸 싫어했죠. 언니는 저를 극한 상황에 몰아넣곤 했어요.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가에서 반쯤 벗은 채 있게 한다거나. 재밌었어요. 패션을 알려준 것도 언니였어요. 자기가 사진 찍을 때 제가 입었으면 하는 디자이너들의 옷을 부탁하기도 했죠. 제가 꽤 어릴 때 스티븐 마이젤과 화보 촬영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저를 진짜 모델처럼 대했어요. 그게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제 눈썹을 밀고 싶어 했지만 그건 거절했죠. 그래도 훌륭한 메이크업 아티스트 팻 맥그라스 덕분에 눈썹은 사라졌어요. 마이젤은 제가 진짜로 포즈를 취하길 원했어요. 그전까지 저는 카메라를 쳐다보는 게 부끄러워서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몰랐는데.
그런데 마이젤이 제 앞에 큰 거울을 놓고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내가 포즈를 취할 테니, 너도 거울을 보고 포즈를 취해.” 정말 신났어요. 예전에 찍었던 사진들과는 다른, 진정한 변신이었어요. 그런데 영상을 찍는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에요. 마치 카메라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카메라가 포착하길 바라죠. 완전히 다른 판이 펼쳐지는 거예요. 영화 촬영에는 목적과 목표가 있어요. 배우가 그저 자기 자신으로 거기 있는 게 아니에요. 그건 자신이 믿는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기도 해요. 영화 프로모션 활동을 한다는 것도 결국 그 이야기의 일부고. 영화 현장에서 스태프들과 쌓는 유대감은 하루 이틀짜리 화보 촬영 때와는 달라요.
2021년에 발표한 다큐멘터리 영화, <제인 바이 샤를로트(Jane by Charlotte)>를 한국에서는 볼 수 없어서 아쉽네요. 가족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어쩌면 남을 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을 듯해요. 딸이자 감독으로서 엄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작업은 어떤 여정이었나요?
문제는, 제가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시작했다는 거예요. 그게 엄마한테는 불만스러웠겠죠. 제가 너무 모호했으니까요. 엄마는 제가 엄마의 직업적 삶과 작업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줄 알았나 봐요. 저는 엄마에 관해서 이미 만들어졌을 법 한 건 만들고 싶지 않았고, 훨씬 더 사적인 이야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처음엔 저의 접근을 불편해했고, 결국 작업을 2년쯤 멈췄죠. 그사이 제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걸 이해하게 되셨고요.
네, 저는 엄마의 가장 진솔한 모습을 담고 싶었고, 제가 꺼내려는 이야기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으면 했어요. 2년 만에 촬영을 재개했을 때 엄마는 저에게 완전한 자유를 줬어요.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수줍고, 어딘가 어색한 관계이기도 했죠. 그 낯섦 또한 제 다큐멘터리에 꼭 담고 싶었던 감정이에요. 그런데 다큐멘터리가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추게 된 건 바로 편집실 안에서였어요. 뚜렷한 계획 없이 조금씩 쌓아가며 완성했죠. 지금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다큐멘터리는 제 작업 중 가장 소중하다는 거예요.
<제인 바이 샤를로트>로 ‘감독’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느낀 면도 있을까요?
음, 제가 얼마나 엄마를 바라보고 지켜보고 싶어 했는지, 얼마나 그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했는지 깨달았어요. 그동안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종류의 시간이었죠. 엄마가 ‘이건 너 자신에 대한 영화이기도 해’라고 하신 게 기억나네요. 어떤 의미에
서는 정말 맞는 말이죠. 하지만 제가 연출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배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발견한 건 편집의 즐거움이었어요. 편집실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감정의 흐름을 지켜보는 그 시간. 분명 언젠가는 또 다른 연출 작업을 할 거라고 믿지만, 아직 그렇게 강렬하고 절실한 대상은 만나지 못했네요.
웨스 앤더슨 감독의 <페니키안 스킴>이 한국에서 5월 28일 개봉했어요. 이 작품 팀과 이번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기도 하셨죠. 뭘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채로 영화 촬영에 조인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아주 막판에 제안을 받았고, 망설이지 않고 그 기회에 몸을 던졌어요. 예전부터 웨스와 함께 일해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일하는지는 잘 몰랐어요. 세트장에 도착했을 때, 아니,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머물던 호텔에 들어섰을 때부터 느낄 수 있었어요. 마치 모두가 한 가족 같다는 걸. 웨스는 늘 같은 팀과 일하는 것 같더라고요. 다들 그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걸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어요. 현장에 합류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그가 원하는 캐릭터를 최대한 빨리 찾으려는 시도였어요. 그가 구상한 역할에 저를 기꺼이 맞추면서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 거죠. 저녁이 되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식사했는데, 그건 웨스가 늘 출연진 모두를 위해 마련하는 시간이더라고요. 아주 독창적이고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언젠가 그런 기회가 다시 또 찾아오기를 진심으로 기다립니다.
당신에 관한 흔한 오해나 편견이 있다면 뭘까요? ‘우먼 인 모션 토크’에서 흥미로웠던 두 번째 대목은 <에투알>의 캐릭터와 당신을 비교한 거였어요. “사람들은 제가 연약하고 섬세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저는 아주 강해요. 제네비에브는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사실 상처받기 쉽고 연약하죠”라고 말하셨어요.
제가 일부러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이에요. 제 몸이 아니라 제 실루엣이 좀 연약하죠. 목소리도 부드러운 편이고요. 겨우 열아홉 살 때인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은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그 상실이 저를 정말 산산이 부서뜨렸죠. 아마 당시 사람들에게 보인 제 이미지는 이런 걸 거예요. 고통을 드러내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은 사람. 그게 사실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젠 알게 됐어요. 제가 하는 일이나 제 모습, 노래에 대해 늘 만족하지 못하는 게 관심이나 칭찬을 바라서가 아니라는 걸요. 그만두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지만, 저는 정말 진심이거든요.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인 거예요, 꾸밈없이 솔직하게. 그런 불만족은 어쩌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해주는 방식일지도 몰라요. 언젠가는 더 나이 들었을지라도 저 스스로가 제 모습을 더 좋아할 수 있을 거라는, 또 다음 작품에서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가능성이요. 결국 아직도 나에겐 더 발전할 여지가 많다는 뜻이겠죠. 이건 결코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사람들을 속이는 게 꽤 재미있어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안티크라이스트>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제가 그렇게 폭력적일 수 있다는 데 놀랐죠. 하지만 저는 늘 그런 폭력성을 품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다 알고 있는 점이었어요. 가족들에겐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죠.

당신은 어쩔 수 없이 ‘프렌치시크’의 대명사로 통하는 인물입니다. 당신을 떠올리면 프랑스 여자, 프렌치 시크 그 자체라는 인상이 따라오죠. 그런 수식어를 평생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였나요?
이런 질문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네요.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는지 생각하게 만들거든요. 제가 저를 바라보는 방식과는 꽤 다르죠. 저는 그냥 최대한 편하고 단순하게, 좋아하는 스타일로 입어요. 신경도 많이 안 써요. 그리고 부모님이 입으셨던 그대로 입고요. 엄마는 늘 진에 티셔츠 차림이었고, 아버지 역시 진, 데님 셔츠, 흰 신발을 유니폼처럼 정해두셨죠. 저한테도 제 유니폼이 필요하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스타일을 매번 바꾸고 싶진 않았거든요.
연기할 때는 의상으로 캐릭터를 찾아가는 과정을 좋아하지만, 평소에는 제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타일을 자꾸 바꿔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요. 이건 심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전날 밤에 입고 잔 티셔츠를 그대로 계속 입고 있으면, 마치 두 번째 피부처럼 느껴지면서 어쩐지 안심이 되더라고요. 코트를 좋아하는 것도 그 뒤에 숨을 수 있어서죠. 스커트나 드레스로 페미닌하게 보이려 하면 진짜 불편해지더라요. 루틴에서 벗어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시도해봤는데, 영 아니었어요. 저에겐 패션보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더 중요해요. 사람들이 저를 아이콘이라고 생각한들, 제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안다면 정말 그렇게 느낄지 모르겠네요. 오히려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긴 세월 셀러브리티로 사는 데 있어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과 가장 즐기지 않는 부분은 뭔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게, 가장 싫어하는 것이기도 해요. 가끔은 거리에서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지 않았으면 한답니다. 그냥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요. 그런데 또 뉴욕에서 익명성을 충분히 경험하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는 좀 달라지더라고요. 사람들이 저를 알아보고 웃어주고, 부모님에 대해 다정한 말을 건네주는 게 좋았어요. 뉴욕에서 좋았던 건 가끔 사람들이 제 영화, 특히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나 제 음악으로 저를 알아봤다는 점이에요. 그럴 때마다 놀랍고 신기했어요.
프랑스에서는 좀 다르거든요. 보통은 저를 한 가족의 일원으로 보고, 우리 가족 자체를 좋아하죠. 그래서 스스로에 대해 늘 조심스럽고 겸손해야 해요. “당신의 부모님을 정말 사랑해요” 같은 말을 들을 때면 ‘감사하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정확히 뭐가 감사하다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답니다. 기자들이 부모님에 대해 묻지 않으면 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을요. 부모님에 대한 언급을 되도록 줄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스스로 말을 꺼내야 했어요. 제 모든 것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고, 지금 제 삶의 모든 게 결국 어린 시절과 이어지니까요. 부모님은 저에게 중요한 롤모델이었어요. 그건 부정할 수 없어요. 정말 모든 게 늘 모순투성이네요.
당신이 당신의 10대 시절로 돌아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해줄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요?
“소리 지르고 싶으면 소리 질러.”
- 포토그래퍼
- PETER ASH LEE
- 헤어
- Yuji Okuda
- 메이크업
- Yusaku Nakahara
- 어시스턴트
- 이지윤
- 프로덕션
- 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