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오렌지’라는 예명으로도 활동하는 드본테 하인즈(Devonté Hynes)의 세계는 지금 맹렬하게 팽창하는 중이다
프로듀서라는 한 단어에 드본테 하인즈(Devonté Hynes)의 가능성을 담기에는 음악 분야를 넘나드는 그의 보폭이 놀라울 정도로 넓다. ‘블러드 오렌지’라는 예명으로도 활동하는 이 예술가의 세계는 지금 맹렬하게 팽창하는 중이다. 2023년 한 해를 활발하게 보낸 그가 너른 음악적 품과 굳은 심지를 드러냈다.
당신은 ‘블러드 오렌지’라는 예명으로 여러 앨범을 발표하면서 솔란지 놀스와 카일리 미노그 등과 작업하는 프로듀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사운드트랙을 만들고, 필립 글래스와 협업한 적도 있다. 하지만 2023년에 선보인 두 프로젝트야말로 당신의 예술 분야가 다른 차원으로 확장 중이라는 걸 말해주는 듯하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그 명성 높은 바비칸 센터에서 펼친 공연, 그리고 BBC 라디오의 클래식 음악 시리즈 ‘드본테 하인즈와 작곡을’ 말이다.
클래식은 내 안에 깊이 새겨져 있지만, 그것을 전면에 내세울 정도는 아니다. 다만 클래식을 할 기회가 생겼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그거 아나? BBC 방송 기회라는 건 그쪽에서 먼저 제안해오지 않는 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역시 그들이 먼저 원해야 같이 연주할 수 있다. 그 두 가지 기회 중 하나라도 내게 주어진 게 놀랍다. 물론 나는 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비칸 센터에서 공연한 둘째 날, 오케스트라 측에서 사운드 체크를 위해 젊은 작곡가들을 초빙했다. 방문한 작곡가들이 묻더라, 바비칸과 일한 지 얼마나 됐냐고. 내 대답은 이랬지. “이틀이요.” 내가 바비칸 센터에서 무언가를 하게 될 줄이야! 영국 에식스에서 자란 꼬맹이 시절엔 그런 기회가 올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드본테 하인즈와 작곡을’은 오케스트라 아티스트, 예를 들면 앨리스 콜트레인이나 아서 러셀 같은 이들 사이의 연결 고리를 만드는 식이었다. 그 아티스트들의 로파이 음악은 블러드 오렌지가 선보이는 지적인 펑크의 전신 같기도 하다.
그건 엄청난 칭찬이다. 고맙다. 블러드 오렌지는 내게 아주 큰 존재다. 흔들린 적 없는 내 인생의 음악적 기둥이랄까. 내가 아무리 멀리 가도 블러드 오렌지만큼은 어떤 형태로든 내 곁으로 돌아오는 듯하다.
당신과 연관 있는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라면 패션 디자이너인 조나단 앤더슨이 있겠다. 그는 로에베 2023 F/W 프리 컬렉션 캠페인에서 당신을 고양이 옆에 모델로 세웠다. 촬영은 유르겐 텔러가 했고.
지난 몇 년간 여러 계기를 통해 조나단과 유르겐을 따로 또 같이 알고 지내게 되었다. 둘 다 좋은 사람들이다. 유르겐은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사진을 찍는다. 그건 정말 영감을 주는 모습이다. 요즘 나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다른 부분에 대해선 굳이 까다롭게 굴지 않는 편이다. 예전이라면 모델 제안을 거절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상대방이 곁에 있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지 여부가 제일 중요한 문제 같다.
당신은 2018년 머라이어 캐리의 정규앨범 에도 참여했다. 그녀와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샤카 칸의 희귀 음원을 인용하거나 틱톡의 스페드 업(Sped Up) 문화에 대해 분석할 때 드러나는 지혜에 놀랐다.
머라이어 캐리와 한 공간에서 같이 작업하고 있을 때는 정말로 진지하게 집중해야 한다. 얼마나 지적인지, 그걸 따라잡으려면 진심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다. 한눈을 팔 틈이 없는 거다. 그녀는 백과사전 수준의 음악 지식을 가졌다. 많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방대하다. 그리고 나한테 이런 말을 종종 했다. “난 스튜디오 뮤지션이에요. 스튜디오에서 태어났고, 스튜디오에서 자란.” 말하고 보니 같이 곡 작업하자고 연락이나 해봐야겠다.
개인적으로는 제시 웨어의 2014년 앨범 수록곡 중 당신이 프로듀싱한 ‘Want Your Feeling’이 머라이어 캐리와의 작업만큼 주목받지 못한 게 아쉽다.
나도 그 노래를 매우 사랑한다. 아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만든 곡 중엔 솔란지의 ‘Losing You’도 있다. 원래는 제시의 1집에 실으라고 제시에게 먼저 보낸 곡이다. 솔란지보다 제시를 먼저 만나 알고 지낸 지가 꽤 되었다. 제시와 자주 보는 사이는 아니지만 요즘도 가끔 대화한다. 재밌다, 우리 둘 사이도 오랜 우정이라 부를 만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으니.
2000년대뿐 아니라 2010년대 이후로도 시간이 꽤 흘렀다. 과거 인디 신에서 당신은 스카이 페레이라의 ‘Everything Is Embarrassing’ 같은 음악으로 어떤 기틀을 잡는 데 한 역할을 했다. 이제 20대가 된 힙스터들에게도 향수로 느껴질 것이다.
요즘 사는 게 참 정신없긴 하다. 그래도 이런 상태가 마음에 든다. 내 경우 10년에 한 번씩은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좀 더 어렸을 때 나는 80년대에 푹 빠져 있었다. 요즘 음악 신에서도 그때의 영향과 레퍼런스를 볼 수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오리지널과는 다르다. 오리지널의 ‘흔적’이 담긴 것들에서 오리지널과 같은 감흥을 느낄 수는 없다.
아마 새로 시작하는 굶주린 아티스트 중 블러드 오렌지의 맛을 갈구하는 이들도 꽤 있지 않을까?
나는 대부분 친분이 있는 사람, 혹은 친분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은 사람과 작업해왔다. 그러지 않으면 작업이 잘 안 되어서. 내가 음악 일을 해 나가는 방식 중 몇 가지는 타인들의 눈에 좀 고지식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냥 내가 엄청 예민해서 그렇다. 친구들과 음악을 만드는 게 좋은 이유는, 어릴 적부터 그렇게 음악을 만들면서 자랐기 때문이고. 노닥거리며 작업한다는 건 뭔가 특별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밴드 생활을 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당신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다 커리어에 바비칸의 축복까지 내렸으니, 요즘이 드본테 하인즈의 완벽한 순간처럼 보인다.
그런가. 미디어에 나오는 이야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순간이, 그게 비극적이건 끔찍하건 놀랍건 간에 어쨌든 그 순간이 마치 절정을 향해 치닫는 와중인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 이야기가 크레셴도로 진행될 것처럼 보이지.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생은 그냥 흘러가고, 그러다 보면 이런 순간도 생기기 마련일 뿐. 어쩌면 먼 훗날 오늘을 되돌아보면서 ‘아 그때 대단했지’ 싶을 수 있어도, 현재의 삶을 사는 당사자 눈에는 사실 별다른 게 보이진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오랫동안 음악을 만들면서도 뭔가를 기대하면서 만든 적은 없다. 그냥 내 할 일을 하다가 무슨 사건이 터지면 터지는 대로 둔다. 바비칸 센터에서 공연하던 시점까지는 클래식 곡을 한 번도 녹음한 적이 없는 나였다. 그건 내가 공연할 음악을 들어본 청중이 이 세상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틀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와주어서 놀랐다. 특정한 곡을 연주해서 느끼는 감동보다 그 사실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훨씬 크다. 들어본 적 없는 음악을 들어보려고 공연장을 찾는 것. 그거 쉽지 않은 일이다. 한편으로는 그저 공연장을 찾기만 하면 되는, 그만큼 간단한 문제이기도 하고.
- 포토그래퍼
- JEFF HENRIKSON
- 글
- ALEX HAWGOOD
- 스타일리스트
- MAC HUELSTER
- 헤어&메이크업
- REN NOBUKO FOR FENTY SKIN & FENTY BEAUTY(@ BRIDGE ARTISTS)
- 포토 어시스턴트
- JORDAN ZUPPA, MIKE SIKORA
- 패션 어시스턴트
- TORI LÓP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