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프리즈 서울 가이드, 쿠리만주토

권은경

갤러리라는 물리적 공간을 두지 않은 채 자유로운 유목식 형태의 전시 프로젝트를 통해 더 넓은 세상과 연결되고자 하는 멕시코 태생 쿠리만주토

서울과 현대미술이 가장 뜨겁게 조우하는 시기가 다가왔다. 작년 한국에 론칭한 국제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이 2023년 9월 6일부터 9일까지 열리기에 앞서 분위기는 일찍부터 달아올랐다. 첫 번째 페어를 경험한 국내외의 모두가 그 활기찬 에너지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전 세계에서 120여 개 갤러리가 프리즈 서울에 참여한다. 이는 작년보다 조금 더 늘어난 숫자로, 갤러리들의 활동지는 지역별로 다양하다. 세계에서 손에 꼽는 영향력을 가진 메가 갤러리들의 경우 미국과 유럽, 아시아에 걸쳐 지점이 분포되어 있지만, 결국 한 갤러리의 태도와 성향은 태어난 곳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더블유>는 미국 동부에서 출발한 두 메가 갤러리인 데이비드 즈워너와 페이스갤러리, 서부에서 출발한 데이비드 코단스키 갤러리, 런던에서 출발한 화이트 큐브와 리슨갤러리를 비롯해 멕시코시티를 뿌리로 거점을 넓힌 쿠리만주토, 자카르타의 영 갤러리인 ROH, 그리고 한국의 중견 갤러리인 갤러리현대와 영 갤러리인 휘슬까지 두루 조명했다. 이 밀도 있는 프리뷰는 광활한 아트페어장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이끄는 <더블유>식 가이드다. 그보다 더 큰 의미는 이 탁월한 갤러리들을 통해 세계를 무대로 하는 컨템퍼러리 아트 신의 현재가 조금씩 보인다는 점이다. 갤러리들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으며, 서울은 그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Kurimanzutto 쿠리만주토

멕시코 태생 쿠리만주토는 갤러리라는 물리적 공간을 두지 않은 채 자유로운 유목식 형태의 전시 프로젝트를 통해 더 넓은 세상과 연결되고자 했다. 이젠 멕시코시티와 뉴욕을 기점으로 그들의 담대한 실험을 펼쳐간다.

가브리엘 오로즈코
‘ Untitled’(2019) 120 x 120cm.
작가의 대표작으로는 거대한 고래뼈가 바다를 유유히 헤엄치는 듯한 대형 설치작이 있고, 착시 효과를 일으키는 이런 페인팅도 있다.
GABRIEL OROZCO(1962), UNTITLED, 2019, TEMPERA AND GOLD LEAF ON CANVAS 120 X 120CM(47.24 X 47.24 IN.), GO141017

“쿠리만주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데 독특한 방식을 제안하는 작가를 좋아합니다.
갤러리를 이끄는 동력은 그런 작가들의 작품을 아무 제한 없이 선보이는 데 있어요.
우리에겐 그 어떤 작업도 가능합니다.”

-세일즈 디렉터 말리크 알 마로우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를 근거지로 하는 쿠리만주토. 이 갤러리의 역사는 1999년 팝업 공간 형태로 개관하면서 시작되었지만, 꽤 오랫동안 쿠리만주토는 사실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모던한 간판을 걸고 ‘전시 보러 오세요’라고 할 만한 고정된 공간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갤러리의 설립 정신은 영구적인 상설 전시 공간을 만드는 게 아니라, 멕시코를 비롯한 해외에서 벌일 특정 프로젝트에 대응하는 역할을 해내는 데 있었다. 물리적인 갤러리 대신 작가와 작품이 어디로든 순회하는 프로젝트 혹은 자유로운 유목식 전시 형태. 갤러리 이름은 두 설립자인 모니카 만주토와 호세 쿠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쿠리만주토의 개념을 구상한 이는 멕시코 태생의 개념미술가 가브리엘 오로즈코(Gabriel Orozco)였다. 조각, 사진, 설치, 드로잉과 회화까지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는 오로즈코는 당시부터 국제적 명성을 가진 예술가였고,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에도 참가했던 작가다. 백남준이 베니스비엔날레에 한국관을 세우고자 적극 나섰듯이, 이 멕시코 작가는 자국의 예술가들이 더 넓은 세상과 연결되길 희망하지 않았을까? 갤러리라는 고정된 베이스캠프가 없다는 건 어떻게 보면 지리적 한계에 갇히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들은 유연하고 자유롭게 예술 활동을 하기 위해 ‘집 없는 사람’을 자처한 것이지 ‘나라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서러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날들이 쿠리만주토를 기다리고 있었다.

쿠리만주토가 첫 프로젝트를 실행한 무대는 멕시코시티 내 유명한 시장이었다. 참여 작가들은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저마다 ‘작품’을 만들었고, 하루 동안 ‘전시’하고 판매했다. 손님이나 관객은 여느 시장에서처럼 작가들이 파는 꽃, 과일, 맥주나 식료품 등을 구입할 수 있었다. 태국 태생의 리크릿 티라바니자는 이때도 시장 공용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그는 1990년대 초반 첫 개인전 때 텅 빈 사무실을 일시적인 주방으로 탈바꿈시킨 후, 태국식 카레를 만들어 나눠 먹는 형태의 전시를 한 작가다. 식당이나 잔칫집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티라바니자의 전시장에서, 관객은 수동적인 감상자가 아닌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어 작품의 일부로 존재한다. 복작대는 시장을 전시장 삼아 퍼포먼스처럼 벌어진 쿠리만주토의 이 전시명은 <시장 경제(Market Economy)>. 13명의 작가들은 관습적인 갤러리 시스템 밖에서 작품을 생산하고 파는 행위를 직접 수행한 셈이다. 작품은 시장 물건처럼 제시되고, 모두의 눈앞에서 거래되었다.

양혜규
‘Sonic Droplets – Water’(2022) 341 x 296 4cm.
커튼 형태의 설치 작품 ‘소리 나는 물방울’ 시리즈. 방울에는 유럽의 이교도적 전통과 아시아의 샤머니즘 등 다양한 문화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HAEGUE YANG(1971), SONIC DROPLETS – WATER, 2022, STAINLESS STEEL BELLS, NANO-COATED STAINLESS STEEL BELLS,
STAINLESS STEEL CHAINS, SPLIT RINGS 341 X 296 X 4CM(134.25 X 116.54 X 1.57 IN.), HY3127

“그런 식으로 우리 작가들은 공간적인 제약을 벗어나 자유로운 작업을 할 수 있죠. 도시 자체를 매개체로 삼는 거예요. 쿠리만주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데 독특한 방식을 제안하는 작가를 좋아합니다. 갤러리를 이끄는 동력은 그런 작가들의 작품을 아무 제한 없이 선보이는 데 있어요. 우리에겐 그 어떤 작업도 가능합니다.” 세일즈 디렉터 말리크 알 마로우키(Malik Al Mahrouky)가 말했다. 1999년 <시장 경제>전 이후 9년 동안 쿠리만주토는 오래된 영화관, 카펫 쇼룸, 주차장, 공항 등 다양한 공간에서 여러 작가들과 장소 특정적인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지금의 자리에 드디어 어엿한 갤러리 공간을 낸 건 2008년 들어서다. 원래 목재 공장과 제빵 공장이 있었던 건물로, 기존의 골격을 거의 유지한 전시장엔 자연광이 풍부하게 들어온다.

직원들이 각자의 집을 사무실 겸 창고로 쓰면서 지속하던 갤러리는 이제 아트바젤과 프리즈에 큰 규모의 부스를 차리는 갤러리가 되었다. 다미안 오르테가, 가브리엘 쿠리등 미술관에서 전시할 수 있는 작가도 여럿 함께한다. 태생부터 실험적 속성을 지닌 갤러리라면 용감한 몇 번의 프로젝트 시도 후에 흩어져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이들은 자연스러운 단계를 밟으며 꾸준히 확장해왔다. 경험이 쌓인 후엔 그것들을 나눌 수 있는 커뮤니티가 필요하고, 또 지역사회에 그 경험과 아카이빙 자료를 제공할 공간이 필요한 법이다. 고정된 공간 없는 갤러리 설립 후 10년이 지나 갤러리를 마련한 쿠리만주토는, 그로부터 또다시 10년이 지난 2018년엔 멕시코가 아닌 지역에 프로젝트성 공간을 마련했다. 뉴욕에 차린 그 공간을 확장해 첼시에 꼴을 갖춘 갤러리를 개관한 건 2022년 11월이다. 말리크가 말했다. “뉴욕에 갤러리를 연 이유는 멕시코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의 정수를 기존과는 다른 범위의 관객과도 소통하기 위해서예요. 뉴욕 갤러리는 멕시코 갤러리가 그렇듯이 우리 작가들이 야심 차고 실험적인 전시를 펼칠 공간이 될 겁니다. 아마 미국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던 성격일 거예요.”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Untitled 17. From The Series “The End of Imagination”’(2023)72 x 48 x 44cm.
작가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으로 가상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에서 다시 여러 모델을 만들어 조각화한다.
ADRIÁN VILLAR ROJAS(1980), UNTITLED 17. FROM THE SERIES “THE END OF IMAGINATION”,
2023 3D PRINTER -PLA FILAMENT, SYNTHETIC PAINT AND LACQUER, 72 X 48 X 44 CM(28.35 X 18.9 X 17.32 IN.) AVR2107

페트리트 할릴라이
‘Here To Remind You’(2023). 111 x 25 x 40 cm.
새의 발을 나타낸 이 작품은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크리스탈 팰리스 돔에 설치된 적 있는 대형 작품을 축소한 버전이다.
PETRIT HALILAJ(1986), HERE TO REMIND YOU, (AMAZONA ALBIFRONS, MELOPSITTACUS UNDULATUS), 2023 BRASS,
NATURAL FEATHER, WOOD, 111 X 25 X 40 CM (43.7 X 9.84 X 15.75 IN.) PH1044

쿠리만주토 뉴욕 개관전 <모두 다 같이(All Together)>에는 갤러리와 일하는 작가 39명이 모두 참여했다. 거기엔 2017년 쿠리만주토에서 개인전을 한 양혜규도 포함된다. 멕시코 출신의 작가들과 일하기 시작해 점점 그들이 추천하는 작가들과도 연을 맺으며 외연을 넓힌 쿠리만주토에게선 다른 갤러리와 달리 특유의 공동체적 속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뉴욕 개관전 시기에 찍었을, 함께 일하는 작가들이 ‘모두 다 같이’ 모인 단체 사진을 웹사이트에 걸어둘 수 있는 갤러리가 얼마나 될까? 서구권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서구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작가들이 쿠리만주토에 꽤 있다는 점은 애초 경계 없이 순회하는 프로젝트로 출발한 갤러리의 속성과도 묘하게 맞물린다. 구겐하임에서 회고전을 연 바 있는 자인 보는 어릴 적 가족과 베트남을 떠나 피난하다가 덴마크 선박에 구조된 후 덴마크에서 자랐고, 베를린을 거쳐 멕시코시티에서 활동한다. 몸과 제스처를 다루는 작가로 로에베의 2023 F/W 캠페인 모델이 되기도 한 나이리 바그라미안은 이란, 올해 광주비엔날레에도 참여한 사운드 퍼포머인 타렉 아투이는 레바논, 그리고 베를린에 사는 양혜규는 한국 출신이다.

리크릿 티라바니자
‘Untitled’(2023) 164 x 143cm.
작가는 여러 신문을 콜라주하는 식으로 태국의 역사적, 정치적 순간을 포착한다.
RIRKRIT TIRAVANIJA(1961), UNTITLED 2023, GOLD LEAF ON NEWSPAPER ON LINEN 164 X 143 CM(64.57 X 56.3 IN.) RT8792

세계적인 아트페어가 서울에 론칭하면서, 즉 현대미술 신을 구성하는 의미 있는 갤러리나 떠오르는 갤러리가 서울에 한 번에 모이면서, 같은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서로 다른 갤러리들을 여럿 보게 된다는 점은 재밌는 현상이다. 연예인은 소속사를 한 군데만 두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인기 있는 미술 작가가 단 한 갤러리와 일하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널리 인기 있는 작가일수록, 어느 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갤러리가 작가를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저 관객 입장에서는 아트페어장을 거닐며 한 작가의 이름을 이곳저곳에서 마주치면 조금은 김이 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장 반가운 순간은 광활한 비엔날레장을 성실히 누비고 다녀야 감상할 수 있는 작가의 이름을 페어장에서 발견할 때다. 아르헨티나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Adrián Villar Rojas)도 그렇다. 그의 이번 출품작은 디스토피아풍 SF 영화에서 봤을 법한 기괴한 인상이다. 작품 자체는 진흙, 짚, 잔해로 둥지를 만들어 살아가는 아르헨티나종 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이지만, 이 한 점을 포함해 최근 그가 전시로 선보인 ‘상상의 종말’ 시리즈는 훨씬 스케일이 큰 작품들로 구성된다. 작가는 ‘타임 엔진’이라 명명한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만들고, 그 시스템 안에서 화재로 불타거나 전쟁으로 상처 입은, 또 무언가에 짓눌리거나 왜곡된 대상들이 사는 가상세계를 만든다고 한다. 그 세계를 모델로 해 3D 프린터로 완성한 조각 시리즈가 ‘상상의 종말’이다. 지구 아닌 어딘가에는 이런 생명체가 살고 있을까?
재밌는 우연으로, 쿠리만주토 부스에 나란히 소개되는 페트리트 할릴라이(Petrit Halilaj) 역시 새를 형상화한 작품을 내놓는다. 새의 발, 가늘고 긴 다리에 독특한 깃털을 가진 ‘상기시켜 드립니다(Here To Remind You)’. 다만 이 새는 작가 개인이 써 내려간 신화 속 캐릭터 같은 모습이다. 코소보 난민이었던 작가는 자유를 갈망하고 경계를 초월하고자 하는 의미로 새를 소재로 자주 작업한다.

제니퍼 알로라 & 길예르모 칼자디야
‘Shape Shifter’(2013) 243.8 x 182.9cm.
전 세계의 건설 현장에서 수집한 사포 조각들로 만든 작품. 듀오 작가는 기억을 남기듯, 사포로 캔버스에 흔적을 남겼다.
JENNIFER ALLORA & GUILLERMO CALZADILLA(JA 1975, GC 1971), SHAPE SHIFTER, 2013,
SANDPAPER SHEETS GLUED ON CANVAS, 243.8 X 182.9 CM (96 X 72 INCHES) ARTIST CERTIFICATE, A&C7748

그래서, 이런 작가들을 보유한 쿠리만주토는 아트페어라는 장터에서도 만족할 만한 판매 성적을 올릴까? 작년 프리즈 서울에서의 결과에 대해 묻자 ‘세일즈’ 파트의 디렉터인 말리크는 이렇게만 얘기했다. “우리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페어에 참가했다는 게 성공의 징표 아닐까요? 서울, 아니 한국은 매우 흥미진진하고 에너지가 넘칩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아름답게 혼종되어 있어요.” 물론 쿠리만주토에 대해선 늘 이들이 얼마나 잘 팔리는 작가와 일하고 있는가보다 지금은 누구와 무슨 일을 꾀하고 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앞선다. 비록 아트페어 부스에서 볼 수 있는 건 작가들의 작업물 일부일 뿐이지만, 서울에서 그것들을 볼 수 있다는 건 2년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던 ‘만남’이다. “10월에 멕시코에서 멕시코와 중국 예술의 크로스오버를 살펴보는 그룹전을 할 예정이에요. 그 후 뉴욕에선, 작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참가했던 화가 로베르토 힐 데 몬테스(Roberto Gil de Montes)의 신작 전시를 할 거고요. 멕시코시티와 뉴욕에서의 프로그램을 계속 개발 중입니다.”

에디터
권은경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