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이 지속되는 정치적 상황과 팬데믹이 맞물린 시간을 지나 온전한 형태로 재회한 아트바젤 홍콩
‘아시아를 대표하는 미술 시장’이라는 예의 위상에서 잠시 비켜나 있었던 듯한 홍콩. 민주화 운동이 지속되는 정치적 상황과 팬데믹이 맞물린 시간을 지나, 4년 만에 온전한 형태로 돌아온 아트바젤 홍콩과 재회했다.
아트페어가 오프라인 페어장에서 다시 활기를 띤 건 2022년 이미 시작된 일이다. 작년 5월 프리즈 뉴욕과 6월 아트바젤 바젤이 그랬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아트바젤이 ‘오랜 예술적 자부심’의 다른 말인 파리에 첫 상륙한 10월 파리 플러스 파 아트 바젤 때는,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페어장을 찾아 힘을 실어줄 정도였다. 런던에서 출발한 프리즈는 아시아 무대로 한국을 택하고 9월 첫 프리즈 서울을 치렀고, 올해 1월에는 싱가포르에서 국제 아트페어인 아트 싱가포르가 론칭했다. 그야말로, 아트페어 러시다.
이 분위기 속에서 예의 명성을 되찾고 싶었을 도시는 단연 홍콩이다. 아시아와 거리가 먼 대륙에 퍼져 있는 전 세계 미술 ‘시장’의 주요 관계자들을, 해마다 때가 되면 자연스레 아시아까지 날아오게 만든 이름은 아트바젤 홍콩이었기 때문이다. 2019년 여름부터 2021년 초봄까지 홍콩에서는 범죄인을 중국으로 송환하는 법안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는 예민한 상황이 지속되었다. 정치적 문제와 팬데믹 속에서 아트바젤 홍콩은 2020년에는 온라인 페어 방식으로, 작년과 재작년에는 해외 갤러리들의 현지 대리인들이 위성 부스를 꾸리는 식으로 다소 불완전하게 페어를 진행했다. 축제의 시간은 지난해 연말, 홍콩 정부에서 입국자들의 자가격리를 전면 해제하면서부터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홍콩은 그 무렵까지 입국자들에게 ‘일주일 이상 자가격리’ 지침을 고수했던 곳이다. 그 시간을 감수하며 홍콩행을 마음먹을 이들이 얼마나 됐을까? “프리즈 서울이 핫했지만, 잠시 홍콩이 주춤한 사이 일어난 일.” 홍콩에서 일하는 어느 PR 담당이 아트바젤 홍콩을 앞두고 한 말이다. 홍콩을 기반으로 하는 영향력 있는 사업가이자 미술 재단을 포함한 그룹 K11 오너인 메가 컬렉터, 에이드리언 청은 연초 ‘Hong Kong Is Back’이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올리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재회, 귀향, 복귀. 3월 22일부터 25일까지 홍콩 완차이 지구에 위치한 컨벤션센터(Hong Kong Convention and Exhibition Centre)에서 열린 ‘아트바젤 홍콩 2023’이 올해 페어에 방점을 둔 뜻이다. 이 단어들은 올해의 공식적인 주제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자가격리 해제와 함께 아트바젤 홍콩이 2023년 페어의 윤곽을 발표할 때부터 쓰였다. 퍼블릭 오픈에 앞서 VIP와 프레스에게 먼저 페어장 문을 연 21일, 콘퍼런스 자리에서 아트바젤 홍콩의 디렉터 앙젤 시앙-리가 한 말은 이 페어를 준비한 사람들이 ‘홍콩’과 아트바젤을 어떤 의미로 여기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아트바젤 홍콩은 늘 동서양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 다리는 양쪽을 잇기만 하는 게 아니라 뻗어나가죠. 단지 서양을 이곳으로 초대하는 게 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양이 동양을 잘 이해하고, 동양에서 뭔가를 배우며 얻어 가는 일을 돕고 있어요. 그런 중추적 역할을 하기에 홍콩은 무척 유리한 곳입니다. 아시아의 중심에 자리한다는, 문화적 교차로로서의 위치 덕분이죠.” 멀리서 온 고객 혹은 여행자가 ‘이 곳 아시아’를 더 이해하길 바라는 그 태도는 페어장에서 눈에 띄게 드러났다. 전 세계에서 참여한 177개 갤러리 중 아시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전시 공간을 갖춘 곳들이 2/3 비중을 차지했다. 그중 홍콩에도 전시 공간을 둔 갤러리는 33개다. 가고시안, 하우저 앤 워스, 데이비드 즈워너, 화이트큐브처럼 아시아 중에서 대표 격으로 홍콩에 지점을 둔 영향력 있는 갤러리들, 그리고 미국이나 유럽에서 시작해 한국에도 지점을 둔 페이스, 페로탕, 리만머핀, 타데우스 로팍 등을 아우르더라도, 올해 페어장에서는 수적으로 ‘아시아’의 존재감이 상당히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 대만, 그리고 동남아 지역에 거점을 둔 갤러리 이름이 몇 걸음마다 눈에 띄었다.
“우리 갤러리는 이번 페어에서 1700만 달러 상당의 작품을 판매했어요. 팬데믹 이전의 판매 이력보다 더 좋은 성과입니다. 아트바젤 홍콩이 진정한 범아시아적 페어로 자리 잡았다는 점을 판매 실적으로도 알 수 있었어요.” 하우저 앤 워스 홍콩의 시니어 디렉터 리신 차이가 말했다. “페어 첫 날, 조지 콘도의 회화가 475만 달러에 판매되었죠. 한국의 한 사립 미술관은 로나 심슨과 피필로티 리스트의 작품을 구입했고요.” 작년 프리즈 서울에서 이 갤러리 작품 중 최고가에 판매된 것은 조지 콘도의 신작이었다. 당시 판매가는 280만 달러. 몇몇 갤러리들은 VIP와 프레스가 방문한 페어 첫날부터 부스 내 모든 작품이 판매된 나머지, 다음 날 컬렉터들에게 선보일 작품이 없어 난처했다고 한다. 페어 측이 전한 말에 따르면, 이번에 처음으로 참가한 런던의 한 갤러리 역시 페어 첫날 모든 출품작 판매에 성공했다. 2년 전 ‘Everydays: The First 5000 Days’라는 디지털 콜라주 작업이 크리스티 경매에서 6930만 달러에 낙찰되며 핫한 NFT 시대를 연 주인공, 비플은 뉴욕에 거점을 둔 갤러리 LGDR을 통해 신작 ‘S.2122’를 중국에 있는 데지 뮤지엄 품으로 보낸다. NFT에 대한 평가가 몇 년 후에는 어떨지 몰라도, 어쨌든 지금 한 미술관은 비플의 작품을 ‘영구 소장품’으로 정한 것이다.
“올해 ‘인카운터스’ 섹터는 만남이란 뭘까, 이 섹션이 처음 출발한 7년 전 나는 만남이 뭐라고 생각했던가, 하는 개인적 성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관객 모두가 모여 지금의 특이성과 불안정성을 연결감으로 키워갈 수 있는 법을 고려해가면 좋겠다 싶었어요.” 아트페어 내 대규모 설치작을 선보이는 섹터, ‘인카운터스(Encounters)’를 큐레이팅한 알렉시 글라스-칸토의 말이다. 페어장 곳곳에 설치작을 위한 단독 구역 여러 군데를 꾸린다는 건 지난 3년 동안은 떠올릴 수 없는 발상이었다. 페어가 ‘규모’와 ‘배포’를 회복하며 강조한 섹터의 주제는 ‘이 현재의 순간’. “우리 페어에서는 ‘아트바젤’보다 ‘홍콩’에 먼저 방점이 찍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섹터에 참여한 작가 열네명 중 홍콩 작가 둘의 작품을 페어장에서 먼저 만날 수 있도록 배치했죠.” ‘트롤리 파티’(2023)를 만든 홍콩의 자파 람은 버려진 물질을 재활용해 패브릭을 만들고, 바느질 하는 프로젝트를 20년 이상 해왔다. 그런 방식으로 완성된 거대한 캐노피에는 미세한 구멍들이 별자리 모양을 이루며 뚫려 있어, 그 사이로 조명 빛이 들어오기도 한다. 캐노피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은 홍콩에서 온갖 종류의 물건을 옮기는 데 쓰이는 트롤리들. 작가는 이곳에서만큼은 노동에서 벗어나 쉬라는 듯 트롤리를 옆으로 눕혀놓았다.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하지만은 않은 이 작품은 실내 페어장에 불현듯 하늘 혹은 그늘을 만들어, 그동안 물리적 공간에서 여럿이 모이지 못했던 관람객을 한 하늘 아래 품고, 우리가 함께한다는 감각과 쉼의 순간을 갖도록 했다.
아트페어마다 페어장 바깥에서는 목적을 갖고 도시를 찾은 이들이 이 기회에 활발히 교류하며 각 갤러리를 바삐 오간다. 언젠가 홍콩의 아파트에 사는 이에게 들은 우스갯소리가 있다. 너무 사고 싶은 그릇이 있는데 부엌에 놔둘 자리가 도저히 없어서, 설거지하다가 뭐 하나가 깨지면 바로 그 그릇을 살 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만큼 좁은 면적의 주택이 하늘을 향해 빼곡히 늘어선 고층 건물들은 이 도시의 상징적인 풍경이다.홍콩에서는 서울처럼 한적한 동네의 건물 1층에 유명 갤러리가 자리 잡은 경우는 흔치 않다. 오가는 사람 많기로 유명한 센트럴 지구(세계에서 가장 긴 에스컬레이터가 자리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부근)의 26층짜리 빌딩에 하우저 앤 워스, 페이스, 비영리 미술 기관인 하트 파운데이션, 데이비드 즈워너 등등이 모여 있는 식이다. 그래서 홍콩에서는 한 건물에 모인 갤러리들끼리 오프닝 행사를 같은 날에 맞춰 잡는 경우도 적지않다고 한다. 이 신선하고 효율적인 구조에 따른 비극이 있다면, 아트바젤처럼 큰 연중행사가 열리는 때에는 건물 바깥 복잡한 길거리를 따라 한참을 줄 서 있어도 엘리베이터 탈 차례가 오지 않는다는 점. 오프닝에 맞춰 아티스트 토크가 진행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16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는 인생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역시 좁은 통로인 계단에서는 ‘나 이러는 거 태어나서 처음이야’라는 표정을 띤 다수와 한 물결을 이루며 이동할 수 있다. 이왕 계단을 이용한 것, 다시 걸어 내려오며 층마다 있는 갤러리에 들러 전시를 보게 되는 게릴라성 이벤트도 생긴다.
페어장 부스들에서, 또 페어장이 문을 닫은 후 저마다 곳곳에서 밤까지 이어진 파티 자리에서, 페어를 치르는 소감으로 가장 많이 들은 표현은 ‘활기’와 ‘에너지’다. ‘활기찬 흥분이 넘치는 분위기를 드디어 되찾았다’라고 말하는 갤러리스트들 사이로 오히려 ‘잃어버린 3년’이라는 시간이 유령처럼 공존하는 것 같았다. 지난 3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이제 마스크는 벗었지만, 재난 영화 풍의 꿈처럼 남아 있는 그 시간. 2023년에 자꾸만 팬데믹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과거에 머무는 일 같기도 하지만, 당분간 그 말을 아예 지우긴 힘들지 모른다. 아트페어뿐 아니라 2023년에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영화, 페스티벌처럼 규모 있는 행사나 콘텐츠는 결국 팬데믹 시기에 기획,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4월 초 아트바젤과 글로벌 스폰서 UBS가 발표한 리포트에 따르면, 글로벌 미술 시장은 지속적인 성장세다. 매출은 팬데믹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중 아트페어 세일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27%, 2022년 35%로 증가했다. 팬데믹시기 동안 전 세계 럭셔리 분야에서 돈벌이가 될 만한 투자는 꾸준히 유지되었다는 점은 종종 알 수 있었던 일이다. 수십억에 달하는 톱 아티스트의 작품가 선정과 세일즈란 ‘그들만의 리그’에서 오가는 일이지만, 실체 없는 바람몰이인가 싶었던 ‘MZ세대의 미술품 구매 현상’ 역시 지난 몇 년에 걸쳐 주식이나 코인에 대한 관심이 미술로 이동한 듯 어딘가에서 늘 벌어지고 있었다. 전시와 작품 자체에 관심 있는 애호가들에게 떠도는 숫자보다 차라리 확실한 증표는, 예를 들면 홍콩의 랜드마크로 떠오른 M+ 뮤지엄을 메우는 사람들의 풍경과 표정, 그리고 아트바젤 주간을 맞아 홍콩 야경과 어우러지듯 화려하게 피어난 피필로티 리스트의 미디어 파사드 작품 같은 것들이겠다. 미술계에서 홍콩의 존재감을 다지는 데 큰 몫을 할 M+ 뮤지엄은 팬데믹이 한창이었던 2011년 11월 개관했다. 작년 연말부터는 쿠사마 야요이의 회고전 중 손에 꼽게 큰 규모의 회고전을 마련한 것은 물론, 굵직한 기획전들을 계속 진행 중이다. 쿠사마 야요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아트바젤 홍콩 페어장에 등장한 야요이의 ‘땡땡이’도 금세 소장처를 찾았다. 일본의 오타 파인아츠 갤러리는 노란 호박을 350만 달러에, 영국의 빅토리아 미로는 초록 호박을 600만 달러에 판매했다고 한다. 비록 작년 아트바젤 바젤에 나타난 루이스 부르주아의 초대형 거미처럼 임팩트 있는 ‘한 방’은 없었어도, 3월 홍콩을 찾은 수많은 이들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시 모이니 좋지 아니한가’.
- 피처 에디터
- 권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