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조선희가 '꽃'을 담는 방법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아빠, 나, 그리고 꽃

2022-12-31T22:44:36+00:002023.01.07|FEATURE, 피플|

오랜 시간 무수한 사람을, 패션을 포착해온 사진가 조선희의 뷰파인더에 ‘꽃’이 들어왔다. 스치기만 해도 바스러질 것처럼 시들고 말라버린 꽃. 그러나 망자에게 염을 하듯 색칠이라는 의식을 거쳐 다시 태어난 그 꽃. 조선희의 첫 번째 순수 사진전인 <姬: 나의 우주다>는 죽음과 사진에 얽힌 그녀의 꽃 같은 고백이다.

“이번 화보, 조선희랑 찍어봐.” 막내 피처 에디터 시절, 새로 출근하기 시작한 회사의 편집장이 건넨 한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처음 보는 그 누구와 만나도 괜히 가슴이 두근거릴 때였다. 그 무렵 조선희는 내게 낯설었지만 패션지 에디터에게 낯설어서는 안 될 사진가였다. 드디어 처음 방문한 논현동 스튜디오. 거기서 느낀 첫인상은 여러 ‘사물들’이었다. 길고 육중한 원목 테이블 위에 놓인 이것 저것들, 인도나 모로코에서 건너왔을 법한 패브릭, 어디선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황색의 마른 가지들….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그 약간의 혼돈 속에서 조선희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2000년대 후반에 처음 만난 조선희를, 그렇게 사물들과 함께 기억한다. 그때 내가 어렴풋이 본 황색 가지 무리는 말린 꽃이었다. 조선희는 자기 품에 오는 꽃들을 버리지 못한 채 긴 세월 마르고 닳도록 그저 놔두었다. 늙고 시든 꽃들에 그녀는 체에 거른 고운 안료를 뿌려 ‘메이크업’해줬고, 스튜디오에서 연예인이나 모델이 서던 자리로 꽃을 불렀다. 2022년 12월 20일부터 1월 5일까지 한남동 뉴스프링프로젝트에서 열리는 전시, <姬(희): 나의 우주다>는 조선희가 찍은 꽃 사진 32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그동안 수없이 사진전을 했던 조선희가 파인아트 작업만으로는 처음 전시를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하다. 렌즈를 통해 인물의 페르소나를 탐구하던 사진가는 오래도록 버리질 못하던 꽃을 찬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릴 적 아빠를 떠나보낸 후 무언가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리잡은 계집 아이. 어른 아이는 꽃들을 통해 여러 기억을 끄집어내고 살피면서 스스로에 대해 훨씬 잘 알게 된 눈치다. 사진가로 살며 무수한 사람을, 패션을 포착해온 조선희와 꽃 사진에 얽힌 대화를 나누었다. 인터뷰 중 조선희가 ‘아빠’를 말할 때마다, 그건 과거를 추억한다기보다 현재진행형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이었다. 이 피사체들에는 마른 꽃잎에 보이는 섬세한 주름선 만큼이나 사진에 대한 사진가의 사색과 개인의 기억이, 또 생명이 시들어가고 새롭게 태어나는 역사 등등이 겹겹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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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Korea> 조선희가 꽃을 찍었습니다. 사진가 조선희의 첫 순수 예술 사진전은 온통 꽃밭이에요. 싱싱하게 활짝 핀 꽃이 아니지만요. 꽃을 좋아하세요?

조선희 저는 누가 꽃을 선물로 주면 ‘어휴, 이런 거 괜히 사 오지 마’ 하는 사람이었어요. 꽃이 시들면 언젠가 버려야 하잖아요. 저는 차마 못 버리겠더라고요. 그래서 가만 놔두고 말렸어요. 선물 받은 꽃들을 버리지 않고 말린 게 이 긴 작업의 시작점이에요. 가장 오래된 꽃은 20년 정도 가지고 있었던 거네요.

 

20년요? 생화를, 그 세월 동안 보관하고 있었다고요?

집에 있던 꽃을 촬영하기 위해 스튜디오로 옮길 때, 옮기는 게 아니라 모셔왔어요(웃음). 혹시나 바스러질까 싶어 아주 조심히…. 운전하다 브레이크를 밟는 것마저 조심할 정도로요. 보통은 꽃을 말릴 때 거꾸로 걸어서 말려요. 꽃대 꺾이지 말라고. 저는 굳이 그렇게 하진 않고 자연스럽게 뒀어요. 대신 꽃을 말리려면 물이 닿아선 안 돼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긴 시간 동안 꽃을 말린 거예요?

버리지 못하겠어서 그냥 두고 말린 이후에는, 나중에 저 마른 꽃들의 초상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누구나 무의식 속에 내재된 뭔가가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꺼내지잖아요. 기원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결핍 같은 거요. 제 경우 그건 ‘아빠’였어요. 어릴 때 아빠를 잃었기 때문에 다시 뭔가를 잃거나 버리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그걸 욕망이라고까지 말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소망 정도는 됐을 거예요.

 

아빠가 언제 돌아가셨나요?

제가 열네 살 때요. 장례식장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 흙 속에서 얼마나 춥고 답답할까.’ 그게 죽음에 관한 제 첫 번째 생각이었어요.

 

사춘기 시절부터 겪은 아버지의 부재. 그게 조선희에게 큰 결핍감이었군요.

아빠를 많이 좋아했어요. 잃었기 때문에 더 좋아하고 갈구하게 됐을지도 모르고요. 그 존재를 향한 그리움과 소망이 물건에 대한 페티시로 자리 잡은 거죠. 제 스튜디오와 집에는 잡다한 물건이 많아요. 정리한다고 해도 늘 뭐가 많은 상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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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아티스트에게 내재된 큰 개념이나 주제는 작업에 묻어나와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요. 의뢰받은 상업 사진 작업을 주로 해오셨기 때문에 티가 안 난 걸까요?

재밌는 사실이 있어요. 김중만 선생님 어시스턴트 시절, 저도 화보를 찍어보고 싶다고 졸라서 스트리트 매거진 화보 촬영을 맡았거든요. 여자 모델 한 명, 남자 모델 한 명과 바위가 많은 속초 바닷가에서 거의 누드 상태로 찍었어요. 어떻게 보면 자연 속 아담과 이브 같은 느낌도 났고. 제 첫 번째 매거진 화보인 그 화보 제목이 ‘태초에’였어요. 막상 그때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것 역시 죽음 충동, 타나토스 같은 게 묻은 이야기였죠. 1990년대 중반의 일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조선희가 찍은 수많은 셀럽 사진과 패션 화보를 다시 찾아봐도 거기서 죽음이라는 모티프를 찾긴 어려웠을 것 같아요.

상업 사진을 찍으면서도 시작 단계부터 순수 사진에 대한 열망은 있었어요. 배우 장동건에게 커다란 날개를 달게 하고서 찍은 적이 있어요. 가수 장나라를 찍을 때는 파란색 눈물을 연출한 적이 있고요. 장동건의 날개는 아빠를, 장나라의 눈물은 나를 뜻했어요. 소녀인 내가 아빠를 애도하는 행위였죠. 장동건을 담은 컷은 그가 막 뒤돌아서서 그 앞의 길을 걸어가려는 듯한 순간이거든요. 이제 아빠를 떠나보내는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그들에게 굳이 설명하진 않고 제 속으로 한 생각이었지만요.

 

죽음과는 크게 상관없는 사진을 찍는 과정에서 죽음이 묻어난 순간들이네요. 그 시절부터 ‘싹’이 보였군요?

제가 2022년부터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어요. 홍대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배우는데, 여러 텍스트를 접하다 보니 어렴풋했던 걸 더 확실하게 느끼고 알게 되더라고요. ‘내가 그래서 그때 그랬구나’ 하는 식으로 좀 더 이해가 가는 거죠. 20대 때는 지하 월세방에서 자다 깼더니 바로 옆에 엄청나게 큰 귀뚜라미가 보여서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무서워서 그릇으로 급히 덮었는데, 며칠 후에 보니 죽어 있었죠. 죽은 귀뚜라미를 가지고 또 이렇게 저렇게 찍어봤어요. 제 기저에는 쭉 죽음이 깔려 있었던 거예요.

 

꽃 시리즈 총 32점을 보면 제각기 컬러풀해요. 색감이 강렬합니다. ‘노화란 체내의 수분이 빠지는 것’이라고 노화를 정의한 의사가 있어요. 노인의 몸은 수분이 많이 빠져나간 탓에 피부가 쭈글쭈글한 거라고요. 긴 세월 메마른 꽃도 멋스럽게 시든 정도를 넘어 비루한 상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색으로 꽃에 생명력을 부여해준 느낌이에요.

안료를 뿌렸어요. 색을 입힐 생각을 한 건 5년 전인가 그래요. 저에게 각인된 두 번째 죽음이 할머니예요. 점점 기억을 잃고 죽음으로 향하던, 대학생인 손녀를 중학생이라고 생각하던 우리 할머니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염하는 모습을 제가 찍었거든요. 그 사진을 5년 전 우연히 다시 보게 됐는데, 예전엔 눈에 띄지 못했던 게 딱 보였어요. 할머니 얼굴이 메이크업 된 상태라는 거요. 내 꽃에도 메이크업을 해주자 싶었어요. 그런데 물감을 칠하니까 꽃들이 워낙 연약한 상태라 물감의 물기나 붓질에 자꾸 바스러지는 거예요. 여러 고민을 하던 중에 친한 세트 스타일리스트가 안료(피그먼트)를 써보라고 권하더라고요. 마음에 들었어요. 안료를 뿌린다는 행위에서 화장 후 뼛가루를 뿌리는 게 연상되기도 하고.

 

안료와 뼛가루라니, 흥미로운 얘기네요. 꽃잎에 눈이 내려앉은 것처럼 가루가 소복하게 쌓여 있거나 두툼한 재질감이 느껴지는 모습입니다. 오래 묵은 꽃들의 맨얼굴은 사진가만이 알겠어요.

꽃에 메이크업을 하기 전에 수분이 다 빠지면서 바스러질 듯한 상태가 된 그 질감을 살려서 종종 찍어뒀어요. 그런데 뭐랄까, 그건 재현에 그치는 사진 같더라고요. 사진이라는 매체를 두고 지표라고 부르기도 하잖아요. 어떤 사물이 거기 존재했다는 걸, 그 흔적을 가리키는 거니까. 그건 카메라가 처음 발명됐을 때부터 사진이 타고난 숙명이에요. 그 숙명대로 재현하거나 기록만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해진 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던 화두죠. 꽃에 색칠을 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제가 오랫동안 패션 화보를 찍었다는 점이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패션 화보 작업은 모델이든 의상이든 콘셉트에 맞게 변화시키고 만들어내는 일이잖아요. 그렇게 체득한 게 있어서 색칠이라는 메이킹에 이른 거죠. 색칠한다는 건 결국 회화 작업이에요. 화가가 붓을 쓰듯이, 사진가도 카메라를 이용해서 자기만의 무엇을 덧붙이고 만들어내야 해요.

 

작가로서 방법론에 있어서는 그런 논리를 찾으셨군요. 망자를 기억하듯이 꽃을 보관하고, 거기에 염하듯이 메이크업하고. 한편으로는 다 말라버린 꽃을 자신의 방식대로 되살려내 카메라 앞에 앉혔다는 느낌도 듭니다. 조선희의 꽃 시리즈는 짐작보다 훨씬 다양한 층위를 포함하고 있네요.

주변에 제 꽃 사진을 보여주면 ‘발레리나가 춤추는 모습 같다’ 식으로 사람에 빗대 느낌을 말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들은 꽃을 보면서 사람 형상을 떠올린 거예요. 가만 생각해보니, 제가 30년 가까이 사람을 찍었잖아요. 저도 모르게 사람을 보듯이 꽃을 보고 담는 습관이 배었나 봐요. 버리지 못한 그 많은 꽃 중에서 촬영할 것들을 골라낼 때도 무의식적으로 사람의 모습을 닮은 것에 끌린 게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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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무수한 화가와 사진가가 꽃을 담아냈어요. 꽃을 택하는 행위부터 최종 작업물로 표현해내기까지 작가의 의도와 태도, 무의식 등등이 뒤엉킨 결과 그렇게 다른 각자의 꽃이 완성되나 봅니다.

최근 제가 쓰고 있는 논문 주제가 ‘꽃 사진의 작은 역사’예요. 조지아 오키프와 로버트 메이플소프를 비롯해서 많은 자료를 공부하고 있는데, 정말 재밌어요. 조지아 오키프는 꽃을 극도로 클로즈업한 화면에 담아낸 스타일의 시작이었죠. 오키프가 꽃을 형상으로 바라봤다면, 메이플소프는 자기 성 정체성을 투영해서 꽃을 전이의 오브제로 사용한 경우예요. 그의 꽃 사진을 보면 남성의 성기가 연상되는 게 많잖아요. 메이플소프는 꼭 활짝 만개한 상태의 꽃을 찍었는데, 그러곤 바로 버렸대요.

 

대상이 가장 싱싱하고 예쁠 때 취하고, 작업이 끝나면 바로 ‘손절’하는 거예요?(웃음) 뭔가 은유적이네요. 

그렇죠. 나는 꽃을 차마 못 버리겠어서 20년이나 가지고 있다가 찍었는데. 어떤 사진가는 꽃이 가장 화려한 상태를 담고서 바로 버리고. 같은 대상을 두고도 이렇게 서로 다른 배경과 표현 방식이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어 흥미롭더라고요.

 

전시 제목 <姬: 나의 우주다>에 한자 ‘계집 희’가 있어요. 작가 노트에 이런 시를 쓰셨죠. ‘난 계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 그러나 나의 우주는 계집스럽다 / 나의 꽃들은 / 계집처럼 춤추고 / 계집처럼 울고 / 계집처럼 웃는다(이하 생략).’ 예전에 쓰신 에세이에서도 계집이라는 단어를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아빠가 돌아가신 시점의 사춘기 소녀, 그 계집아이가 여전히 조선희 안에 머물러 있나 싶습니다.

제 이름의 ‘희’가 ‘계집 희’예요. 태어났을 때 원래 이름은 ‘빛날 희’를 썼는데, 아빠가 어디서 사주를 보시고는 제가 너무 남자 사주를 타고났다는 말을 들었대요. 여자로 태어났으니 좀 여자처럼 살라고, 한자를 바꾸셨어요. 여러 전시 제목을 가지고 고민을 했죠. 저와 30년 인연이 있는 언니가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해줬는데, 이러더라고요. ‘내가 그동안 너를 몰랐나 봐. 이 사진들을 보니까 네 우주가 보여.’ ‘우주’는 그 언니의 말에서 따왔어요. 제목에 ‘희’자를 써보면 어떠냐는 아이디어는 우리 스튜디오 직원이 냈어요. 그 말을 듣고 확 꽂혔어요. 그러곤 바로 시 비슷한 그 작가 노트를 단숨에 쓴 거예요. 아빠가 제 이름의 한자를 바꾼 에피소드도 있고 하니까 ‘계집 희’를 내세우는 게 마음에 들었죠. 언젠가부터 그 단어에 여자를 하대하는 뉘앙스가 생긴 것 같은데, 귀엽고 예쁜 여자에게 ‘이 기집애야’ 같은 표현을 쓰기도 하잖아요.

 

저는 장례를 치르면서 제가 매거진 종사자라는 걸 체감한 ‘웃픈 순간’이 있어요. 몇 년 전 아빠의 영정 사진 데이터를 장례식장 담당자에게 메일로 보내면서, 이렇게 썼거든요. “얼굴에 노란 기 좀 빼주시고요….” 건강할 때 찍은 아빠 모습인데도 얼굴이 유독 노랗게 나온 게 맘에 걸렸어요. 황달을 연상시킬까봐.

제 생각엔 인간이 망각을 하기 때문에 기억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 같아요. 사람들은 언젠가는 망각하잖아요. 어쩌면 사진을 둘러싼 제 많은 작업은 아빠라는 존재를 잊지 않기 위한 행위 같기도 해요. 나는 아빠에 대한 애도를 30년 이상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빠 영정 사진이 아직도 제 방에 걸려 있어요. 평생을 이고 지고 산 거죠.

 

아빠에게서 벗어나기가 힘든가요?

못 벗어난다기보다… 글쎄요, 꼭 벗어나야 해요? 그냥 같이 갈 수도 있는 건데. 아빠를 일찍 잃은 건 슬픈 일인데, 한편으로는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조선희가 있었다고 봐요.

 

꽤 과거의 일이지만, 언젠가 ‘피처 사진은 한동안 찍지 않겠다’라고 한 적이 있죠. 이유가 뭐였어요?

제가 20대 후반에 얻은 닉네임이 ‘인물사진 잘 찍는 사진가’였어요. 그때는 이상하게 그 말이 싫었어요. ‘나는 패션 화보도, 영화 포스터나 앨범 재킷도 다 잘 찍고 싶은데 왜?’ 싶어서.

 

같은 사람을 앞에 두고 찍을 때도 피처는 인물성이 드러나는 사진을, 패션 화보는 패션에 포커스된 사진을 찍는다는 차이가 있죠. 매거진의 피처와 패션 사진을 작업할 때 그 성격에 따라 사진가의 자세도 꽤 달라지나요?

네. 특히 예전에는 매거진에서 인터뷰 기사를 진행할 때, 지금처럼 스튜디오에서 찍는 게 아니라 그 인물의 공간이라고 할 만한 데로 가서 찍었어요. 그건 사진이 지닌 숙명적인 성격, ‘그것이 거기 있었음’을 담아내는 일이에요. 어떻게 보면 다큐멘터리적인 사진이죠. 내 시선과 앵글 등으로 뭔가를 포착해내야 하니 예리한 사냥꾼이 되어야 하는 느낌. 하지만 이제 매거진에서는 모델뿐 아니라 셀럽을 찍을 때도 패션 사진처럼 담죠. 그런 포트레이트를 찍을 때는 내 생각이나 무엇을 덧붙여 만들어내야 해요. 그건 사냥보다는 현대미술에 가까운 행위처럼 느껴져요.

 

저는 고전적인 의미의 피처 사진이 요즘엔 오히려 신선하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조선희는 스타를 찍는 스타 사진가로 처음 알려졌지만, 김수현 작가, 서정주 시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같은 걸출한 인물과 비연예인도 많이 촬영했죠.

피처 사진을 찍을 때 진행 에디터가 사진부터 찍겠냐고 물어보면 저는 ‘아니요? 인터뷰 다 끝나면 찍을 건데요?’ 했어요.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관찰하지도 않은 상태로 어떻게 인물사진을 찍겠어요. 멀리서 인터뷰이가 말하는 것도 좀 듣고, 그 인물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에 찍고 싶었어요.

 

이정재, 정우성, 장동건 등등 당대의 많은 스타들이 사진가 조선희를 자주 찾은 이유는 뭘까요?

나이가 비슷해서요. 그럼 편하잖아요. 인물이 편안하면 카메라 앞에서 드러내는 모습도 달라져요. 이제는 나를 불편하게 느낄 연예인이 더 많겠죠. 제가 이른 나이에 일이 바빠졌는데, 그때는 신인 사진가가 매거진이나 광고업계에 진입하기가 너무나 힘든 시절이었어요. 사진가의 풀이 한정적이어서 저한테 유리한 면도 있었죠.

 

이 업계에서 결혼과 출산을 거쳐 오랜 시간 일하고 있는 여성 사진가는, 제가 아는 한 두 명뿐이에요.

제가 한창 활발하게 일할 때 결혼하겠다고 하니 주위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런데 왜 결혼한지 알아요? 꽃 이야기랑 비슷해요. 사랑에 대한 집착. 꽃에 집착하듯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서 결혼을 했어요. 2006년 출산 전후로 잠시 한국을 떠나 있었어요. ‘그 사이 뭐 잊히겠어?’ 싶었는데 몇 개월 만에 조선희는 잊힌 것 같더라고요. 아무도 저를 찾지 않았어요. 다시 예전의 리듬으로 돌아오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어요. 엄청나게 바쁘다가 갑자기 버려진 듯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정말 많이 울었어요. 마침 필름에서 디지털로 사진 패러다임이 확 전환하던 시기여서 새로운 사진가들이 속속 등장했죠. 마음이 힘들었던 그때를 겪었기 때문에 다음 단계의 내가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덜 오만해질 수 있었죠.

 

30년 가까이 사진가로 살면서 시대도, 조선희의 일과 삶도 변화를 겪었어요. 그래도 변치 않고 중심에 가지고 있는 태도는 뭘까요?

‘안 되도 되게 한다.’ 저는 ‘안 된다’는 말, 잘 안 해요. ‘안 돼요’, ‘싫어요’, 이런 말을 안 좋아합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현역 사진가로 사실 거죠?

그러고 싶죠. 재밌잖아요, 사진. 예전에 파리 그랑팔레에서 하는 헬무트 뉴튼 전시를 본 적이 있는데, 잘 알려진 대작은 그가 50대부터 찍은 사진이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저는 이번 꽃 시리즈 외에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리즈 작업도 웬만큼 마쳤어요. 그다음에 선보일 건 큐브 시리즈예요. 사물을 얼리고 그걸 찍었어요. 어릴 때부터 모은 인형들을 얼리기도 했고요. 어느 날은 스튜디오 앞에 참새 한 마리가 죽어서 말라 있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상자에 담아서 냉동실에 놔뒀어요. 참새가 썩지 않게요.

 

그로테스크하면서 애처롭게 들리네요. 하지만 오늘 새롭게 알게 된 조선희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실한 애도를 진행 중인 조선희 말이에요.

꽃을 말렸던 것처럼 사물을 자꾸 얼리려는 내 행위의 의미가 뭘까, 계속 생각했어요. 역시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나 영원히 갖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슬픔은, 충분한 애도를 거쳐야 종료된대요. 확실히 종료되지 못하면 그게 남아 멜랑콜리가 되는 거고….

 

허리를 젖혀 유연한 몸을 뽐내는 듯한 꽃. 혹은 처연하게 비틀거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의 꽃. 조선희는 오랜 세월에 거쳐 시들고 말라버린 꽃을 자기 방식대로 소생시켰다. 사람의 형상이 떠오르는 꽃이 많은 건 조선희가 사진가로 산 평생 동안 사람을 보고 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