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것처럼, 크러쉬

W

크러쉬에게 지난 2년은 불안과 반성과 갈증으로 혼잡한 소용돌이였다. 마침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때, 그는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음악을 탔다. 누구보다 신나게 몸을 흔들면서.

무톤 볼레로와 체크무늬 쇼츠는 아크네, 안에 입은 일러스트 티셔츠는 초포바 로위나, 체인 목걸이는 사카이, 안경은 미우미우 제품.

스팽글 장식 레이스 시스루 톱과 장갑은 발렌티노, 노스 커프는 포트레이트 리포트 제품.

<W Korea> 요즘 유튜브에 새로 올라오는 크러쉬 영상이 무척 풍족해요. 이런 댓글을 봤어요. ‘스크롤만 내리면 등장하는 효섭이’, ‘어디까지 출연하는 건가’. 최대한 여러 콘텐츠를 찍으면서 알고리즘을 장악하고자 애쓴 인상입니다(웃음). 

크러쉬 애초 계획대로라면 지난주쯤 활동을 마무리했어야 하는데, 저를 계속 찾아주는 곳이 생기네요. 하루하루 고마움이 큰 날을 보내고 있어요.

MBC <나 혼자 산다>를 보면서는 조금 놀랐고 신선했어요.

제가 너무 편안하고 망가진 모습을 보였나요?

아니요, 동네 어머니들과 강아지 산책 모임을 꾸준히 한 것 같아서요. 어떤 분은 반찬까지 만들어 크러쉬를 챙기시고. 방송 촬영 때문에 부각된 모습이 아니라 정말 일상생활 같던데요?

어제도 일 마친 후에 같이 산책했어요. 스케줄 없을 때면 매일 하는 일이에요, 5년째. 우리한테는 너무 자연스러운 일상이죠. 어머니들을 ‘정해진 시각에 꼭 만나야지’ 마음먹는 건 아니고, 아침이든 언제든 집 밖에 나가면 그분들이 거기 계세요. 그럼 자연스럽게 같이 강아지들과 산책하는 거고.

일상에서 그렇게 규칙적으로 하는 무언가가 또 있나요?

필라테스를 꾸준히 했는데 최근엔 스케줄이 바빠 못했어요. 이달에 활동 끝내고 다시 시작하려고요. 운동을 안 했더니 몸이 흐물흐물해진 느낌이에요. 산책하는 루틴은 제가 꼭 지키려고 해요. 요즘 주로 영감을 받는 상황도 산책하다 생겨요. 잠시 벤치에 앉아 사색하고, 사색에 빠지다 보면 단어나 문장이 떠올라서 메모하기도 하고.

벤치에 앉아 그저 쉬는 게 아니라 정말 사색을 하나요?

네. 무수한 생각이 밀려들어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메모는 가사로 만들어야겠다는 의도로 한다기보다는 그냥 ‘생각 바라보기’를 위한 거예요. 그런 게 쌓이면 제 결점도 좀 보이고. 산책하는 시간을 통해 환기하는 면이 커요. 강아지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되기 어려웠겠죠.

줄무늬 장식 재킷과 팬츠, 불꽃 장식 이너, 스니커즈, 이어커프는 모두 아디다스 X 구찌, 모자는 버버리, 집게 핀은 사카이, 목걸이는 초포바 로위나 제품.

프릴 장식 셔츠는 알렉산더 맥퀸, 주름 스커트와 부츠는 문선, 반지는 사카이 제품, 헤드피스와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8월 소집 해제 후 9월 22일 싱글 ‘Rush Hour’를 내고서 열일하고 있는 크러쉬입니다. 훵키한 리듬의 소리를 듣는 재미, 크러쉬의 야무진 안무를 보는 재미가 있어요. 음원 차트 성적도 좋고요. 체감하는 반응은 어때요?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긴 하는데, 발표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어요. 후렴구에 안무가 있으니 안무 챌린지도 급속도로 퍼지더라고요. 모든 반응이 제가 생각지도 못한 수준으로 번져갔어요.

피처링한 제이홉을 비롯해 싸이, 신동, 이영지 등등과 같이 춤추는 영상을 찍으셨죠. 임팩트 있게 잘 짠 안무 같아요. 크러쉬는 참 열심히, 또 신명 나게 추더군요(웃음).

비비트리핀의 김유진이라는 안무 디렉터가 짰어요. 그 친구가 지코 ‘아무 노래’ 작업도 했고. 그런데 각 잡고 제대로 만든 안무를 보여주려 한 건 아니에요. 제가 코레오그래피라는 걸 소화할 수준은 안 되거든요. 그냥 음악 안에서 최대한 신나게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그래요? 꽤 난도 높아 보이던데요?

제가 기본적으로 어떤 스타일로 움직이는지를 안무 디렉터가 쭉 지켜봤어요. 음악 틀어놓고서 ‘형, 놀아보세요’ 하면서(웃음). 한마디로 제가 잘할 줄 아는 요소를 다 집어넣은 다음 좀 더 다듬고 구체화한 결과예요. 제임스 브라운 느낌을 자아내고 싶긴 했어요. ‘Rush Hour’가 제임스 브라운에 영감 받아 만든 곡이거든요.

우탱클랜 멤버 올 더티 바스타드의 ‘Shimmy Shimmy Ya’ 뮤직비디오 본 적 있어요? 뮤직비디오 중반쯤에, 오렌지색 니트 입은 남자가 바이브레이터라도 된 것처럼 어깨와 팔을 현란하게 털어요. 크러쉬의 진동감과 춤사위도 그 못지않습니다(웃음).

이 노래가 대중적으로 잘 풀려서 다행이지, 별 관심을 끌지 못했다면 정말 외롭고 슬픈 춤사위가 됐겠죠(웃음). 반복해서 계속 추다 보니까 나름 잔근육이 생겼어요. 왠지 팔 길이도 전보다 길어진 것 같습니다.

재킷과 셔츠, 팬츠, 타이, 슈즈는 모두 루이 비통, 선글라스는 젠틀 몬스터 제품, 니트 모자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사회복무요원 생활을 마치고 컴백할 때 어떤 음악을 내놓아야 할까 고민 많이 했죠?

그럼요. 여러 음악을 준비해뒀고 앨범 단위로 발표할 생각도 해봤지만, 한 곡으로 알차게 프로모션하자고 결론 내렸어요. 우선 지금껏 해온 음악 스타일이나 비주얼과는 아주 다른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첫 번째였어요. 음악의 텍스처 자체부터 변화를 주고 싶었고. 이제 레트로 장르가 꽤 나오고 있지만, 오리지널 훵크가 대중적으로 통하기엔 좀 생소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갈등도 했죠. 컴백의 흥망성쇠 여부를 떠나서 지금은 후련해요. 그동안 해소하고 싶다는 갈증이 컸거든요. 공백이 길었기 때문에 예전만큼 제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 모든 기분을 ‘Rush Hour’ 한 곡에 담아 해소한 거죠.

공백이 길었나요? 2020년 10월, 복무 들어가기 직전에 미니앨범을 냈죠?

네. 음악 생활 시작한 이후 가장 긴 공백기였어요. 2년이라는 시간이 저에겐 너무 길었어요. 제가 유독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인고의 시간을 보냈어요.

감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짠’ 하고 나타나기 위해 음악 시장 트렌드를 파악하는 과정도 거쳤나요?

요즘엔 트렌드라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주변에 물어봐도 다들 모르겠대요.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 된다’는 뜻이죠. 뮤지션이 자기 자신을 멋지게 꾸미고, 그것을 콘텐츠화하고, 그 콘텐츠에 음악을 결합하는 식으로 하나의 캐릭터화를 하는 작업이 중요해졌다는 게 트렌드라면 트렌드겠네요. 음악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듣기보다 보는 세상이 됐어요.

스팽글 톱과 티셔츠, 데님 팬츠는 모두 셀린느, 목걸이는 블레스 제품.

뚝심과 유연함 사이에서 줄타기를 잘하는 일이 쉬운 미션은 아닐 것 같아요. ‘음악을 본다’라는 공감각을 충족시키려면 손이 많이 가기도 하고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진 않나요?

그래서 한 곡만 냈어요. 리스너의 관심이 여러 곡에 분산되기보다 집중되도록. 공백이 있었기에 일단 저에 대한 기대감을 다시 끌어올리고 다져놓고 싶었죠.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해요. 오랜만에 활동하면서 싱글이 아닌 앨범을 낼 수도 있는데, 수록곡이 빛을 못 볼까 봐 지레 걱정하고 겁을 먹은 면도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최근 제이홉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제이홉은 솔로 앨범을 내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온전히 그리고 정연하게 해내는 데 의의를 뒀죠.

네. 그거 진짜 멋진 일이거든요. 앨범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붐뱁으로 채웠어요. 제이홉의 <Jack In The Box>를 듣고서 리스펙트가 생겨서 ‘너랑 꼭 작업해보고 싶다’고 했어요. 저와 함께하는 곡을 발표하면, 제이홉 솔로 앨범 이후 연장선 느낌으로 시너지가 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도 OK 하면서 피처링해줬죠.

감과 안목에 있어서는 자신을 더 믿었나요, 회사인 피네이션의 도움을 받고자 했나요?

첫 회의 때 제가 딱 이렇게 말했어요. 이젠 내 감이 어떤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 날 가지고 어떻게 좀 해달라고. 그러곤 회의를 엄청 했어요. 주로 제가 먼저 사람들 귀찮게 하면서 불러모은 거예요. 이건 어떤지, 저건 어떤지 계속 물어보면서. 그러다 이것저것 잴 바에는 그냥 ‘다 하자’, ‘몸으로 뛰자’ 한 거죠. 물론 음악 안에서는 제가 주도적으로 끌어가지만, 그거 외적인 부분에서는 회사 역할이 커요.

큼직한 포켓 장식 재킷과 팬츠, 슈즈, 선글라스는 모두 발렌시아가, 키티 무늬 커스텀 부채는 이규한 제품.

이상하게 크러쉬를 보면 근면 성실함이 느껴져요. 30대가 됐지만 여전히 소년미도 있고요.

게다가 좀 짠해 보이기도 하죠?(웃음) 제가 데뷔한 지 10년 됐어요. 누군가는 저를 지겹게 느낄 수도 있겠죠. 그런데 비교적 ‘아, 쟤는 열심히 하는 애구나’라고 봐주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폭우 속에서 노래하는 모습 같은 예전 영상까지 소환되면서 더 그런가 봐요.

크러쉬가 진짜 소년 신효섭이었을 때가 궁금하네요. 음악과 처음 친해진 건 언제예요?

유치원 다닐 때 HOT를 좋아했어요. 가족과 노래방에 가서 3시간 동안 HOT 노래를 부르고 너무 힘들어서 토한 적이 있습니다(웃음). 그리고 아버지가 워낙 노래하는 걸 좋아하세요. 노래방에서 늘 스티비 원더의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를 부르셨는데, 가끔 가사를 ‘사랑하는 우리 아들 효섭이’ 식으로 재밌게 바꾸셨어요. 그러면서 스티비 원더가 자연스럽게 저한테 스며들었죠. 초등학교 들어가서 256메가짜리 MP3가 생겼을 때도 스티비 원더 노래를 담았어요. 딱 처음 재생했을 때 흐른 곡이 ‘Lately’예요.

초등학생과 스티비 원더라, 환상의 궁합이네요.

친구들은 동방신기, 소녀시대, 원더걸스 노래를 들었어요. 제가 노래방에서 스티비 원더를 부르기 시작하면 애들이 바로 취소 버튼 누르고 (웃음). 초등학교 6학년 수련회 장기자랑에서는 하림 형님의 ‘출국’을 불렀습니다. 반응이 어땠을지 아시죠?

어릴 적부터 흑인 음악의 영향을 짙게 받으며자라면 보컬과 랩을 웬만큼 넘나들면서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보컬 따로, 랩 따로’ 구분되는 게 아니라 그루브까지 포함한 그 모든 요소를 음악의 자장 안에서 흡수한 거죠. 크러쉬도 그런 편인가요?

제가 음악을 시작한 게 랩을 통해서였어요. 중학생 때 다이나믹 듀오 1집을 들으면서 ‘나는 꼭 음악을 해야겠다’ 라고 마음먹었으니까. 중1 때부터 고3 때까지 계속 아메바 뮤직에 데모 테이프를 넣었어요. 다듀 공연은 다 쫓아다녔죠. 다듀를 통해 외국 힙합을 접하고, 홍대에서 공연하고… 그리고 지금까지 흘러왔어요.

데뷔 후부터 돌이켜봤을 때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한 시점이 있나요?

2020년 입대하고 나서요. 물론 그간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딱 한 시점을 꼽자면.

그렇게 최근이라고요? 인고의 시간이었다는 지난 2년의 공백이 참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나 봅니다.

제가 쌓아온 활동을 자꾸 제3자 것 보듯 바라보게 됐어요. ‘저 뮤지션의 커리어가 저대로 끝나면 어떡하지….’ 복무 중인 나와 뮤지션인 나 사이의 괴리감이 컸어요. 예전에 왜 더 열심히 하지 못했을까 절로 반성하면서. 저는 매 순간 열심히 했거든요. 그런데 불안감이 생기니까 저도 모르게 절박한 마음으로 반성하고 후회하고 다짐하고 있더라고요.

잊힐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자신과의 싸움이 문제였군요.

네. 저는 그 싸움에서 매번 졌어요. 사실 아직도 좀 지는 기분이에요(웃음). 지코도 그렇고, 우리는 스스로를 옥죄면서 작업하는 스타일이에요. 옥죄면서도 음악으로 무언가를 해소해야 숨 쉬고 살 수가 있는데, 2년 동안 그걸 못하니까 미칠 것 같았어요.

큼직한 재킷과 팬츠, 부츠 힐, 이어링은 모두 발렌시아가 제품, 목걸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친한 친구인 지코와 비슷한 시기에 복무했죠. 두 사람, 이런 주제로 종종 대화 나눴겠어요.

통화할 때마다 서로 똑같은 이야길 해서 내 아바타인 줄…. ‘맞아 그때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지? 더 할 수 있었어’ ‘야, 우리 소집 해제하면 정말 잘해보자’ ‘내일 연차 쓸 거냐?’ 이런 대화 패턴에, 통화의 시작은 늘 한숨으로 했죠.

질투를 느낄 정도로 재능을 가졌다고 보는 인물이 있나요?

질투라기보다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느끼게 만드는 인물은 있어요. 손흥민 선수요. 제가 워낙 ‘축덕’이에요. 동갑내기이고 친구이기도 한데, 손흥민은 정말 존경스러워요. ‘위닝 멘탈리티’라는 말이 있거든요. 스포츠에서 선수들이 다잡는 멘탈, 승리를 향한 집념 같은 걸 뜻해요. 저는 스포츠와 창작이 다른 분야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요. 손흥민의 위닝 멘탈리티가 그걸 깨닫게 해줘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죠?

결정적인 계기는 얼마 전 토트넘과 레스터 시티 전이었어요. 손흥민 선수가 이번 시즌에 계속 골을 못 넣다가 거기서 무려 해트트릭을 해냈잖아요. 첫 골 터진 후 딱히 기뻐하지도 않고 세리머니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저, 울었어요. 그간 마음고생이 전달돼서. 세상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때 결과로 딱 보여주는 게 쉽지 않은데 그는 드디어 해낸 거예요.

위닝 멘탈리티는 결국 나를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는 말이잖아요. 래퍼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승리밖에 할 줄 몰라’ 같은. 크러쉬가 믿고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뭐예요?

자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저는 자만과 거만을 경계해요. 주위에도 말해요, 제게 조금이라도 그런 기미가 보이면 꼭 얘기해달라고. 그리고 늘 새롭고 싶어요. 도태되고 싶지 않아요. 새롭다는 건 어느 날 전혀 다른 세계의 음악을 들고 나와야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내가 해왔던 걸 답습하지 않는 게 중요해요. 어쮙든 멜로디와 가사는 저라는 똑같은 사람 안에서 나오기 때문에 매번 완벽하게 다르긴 어렵겠죠. 하지만 신선한 음악을 들려줘야 한다는 것, 딱 들었을 때 좋은 음악이 제일 좋다는 것을 명심하려 해요.

홍대 언더그라운드 신을 지나 크러쉬로 10년을 보냈어요. 앞으로 10년 후의 크러쉬는 어떤 모습이길 원해요?

저한테 ‘소년미’ 있다고 하셨죠. 그때도 소년의 느낌으로 음악을 하고 있다면 좋겠어요. 제 음악에 나이가 들지 않았으면. 그게 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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