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함은 거부한다. 지난 몇 시즌 동안 서서히 더 과감하고 실험적으로 변모해온 맨즈 컬렉션의 절정은 바로 지금! 2023 S/S 맨즈 컬렉션장에서 생긴 일.
실험실의 JW앤더슨
BMX 자전거 핸들, 부서진 스케이트보드, CD, QR코드, 통조림 캔 등이 붙은 옷 등.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공산품을 해체된 옷에 절묘하게 배치한 JW앤더슨. 아트와 공상을 사랑하는 그의 실험실을 엿보는 일은 늘 흥미롭다. 조나단의 쇼는 늘 “이 옷을 사 입고 싶지?”가 아닌 “내 쇼를 보고 또 다른 영감을 받길 바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소핫
21세기 럭셔리 남성 컬렉션에서 미니스커트와 조크 스트랩이 나올줄 상상이나 했을까? 지금보다 먼 미래라면 혹여 가능할까? 동시대를 살면서 그 모습을 목도하리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톰 브라운은 이번 시즌 미니스커트와 조크 스트랩만 만든 게 아니다. 그는 우아한 트위드 소재 안에 펑크, 마린, 테니스, 서퍼 등 다양한 테마를 쿠튀르적 터치로 풀어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재료들은 완벽한 테일러링 앞에서 마치 모든 게 하나인 것처럼 조화를 이뤘다. 돌이켜보면 그는 5년 전부터 맨즈 컬렉션에서 남성용 드레스를 선보였었다. 그러니 지금의 이 상황은 그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남성용 미니스커트가 팔리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 남자의 미니스커트를 벌써부터 탐내고 있을 여자들이 더 많을 테니 말이다.
불놀이야
릭 오웬스 쇼에서는 런웨이가 시작됨과 동시에 불이 붙은 구를 크레인으로 천천히 들어 올린 다음 팔레드 도쿄의 분수로 떨어뜨리는 행위가 반복됐다. “불덩어리는 태양을 불태우고 하늘을 가로지르며, 땅에 부딪힌다. 예부터 그런 일이 늘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이를 반복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전쟁이나 역병, 또는 시대별 최악의 시나리오를 통해 인류 멸종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퍼포먼스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너무 파괴적이라고? “나는 항상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즉 갈등이나 위기 또는 불편함이 무엇이든 이전에 일어난 일임을 우리 모두에게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든 항상 선이 악을 이겨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불에 떨어진 듯 뜨겁고 약간은 공포스러운 퍼포먼스였지만 그의 의도는 늘 그렇듯 무척 긍정적이며, 희망적이다.
특수부대의 배낭
킴 존스는 몇 시즌째 우아한 남성복에 아웃도어 무드를 가미하는 중이다. ‘협업의 제왕’ 답게 그는 이번에도 놀랄 만한 제품을 선보였는데, 다름 아닌 미국 특수부대에 조달되는 배낭을 만드는 브랜드 미스터리 랜치와 협업한 배낭이다. 주문 생산만 가능한 이 배낭 브랜드는 헬기 위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도 내용물이 손상되지 않는 견고함을 자랑한다. 킴 존스의 터치를 입은 미스터리 랜치 백팩은 밀리터리의 견고함은 그대로이겠지만, 군복의 때를 벗고 한층 부드러워진 느낌이다.
‘손가락욕’ 패션
장 폴 고티에와의 쿠튀르 협업, 디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Y프로젝트의 디자이너 글렌 마틴스(Glenn Martens). 세상에서 가장 바쁜 남자인 그가 만든 다양하고 거한 옷들 중에서도 SNS서 자주 회자된 옷과 액세서리는 바로 손가락욕 티셔츠와 이어링일 듯. “술에 취한 영국 남자”를 만난 뒤 그의 몸에 있던 문신을 떠올리며 티셔츠와 액세서리를 만들었다는 그의 유쾌한 에피소드는 가장 추악한 것들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친구들 모여라
카트린 드뇌브와 카를라 브루니, 나오미 캠벨, 리야 케베데, 카렌 엘슨, 프레셔스 리, 카라 델러빈, 마리아카를라 보스코노, 오드리 토투, 자비에 돌란, 톰 데일리, 크리스틴 맥미너미.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그들이 한날한시에 모인 이유는? 몽마르트르에 위치한 사크레쾨르 성당(Sacre Coeur Basilica)에서 선보인 아미의 블록버스터급 런웨이를 축하하기 위해서다. 관객으로, 런웨이 모델로 각각의 자리를 빛내준 친구들! 셀럽 친구들의 출석률은 이번 맨즈 쇼에서 단연 아미가 1등.
꼼데가르송 가면 무도회
3년 만에 파리로 돌아온 레이 가와쿠보는 과연 무얼 보여줄까? 많은 사람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그녀는 이번 시즌 중세 궁정 광대(Court Jester)를 모티프로 쇼를 전개했다. 겉보기엔 가면을 씌운 피에로라 생각하겠지만, 내면에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왕국의 유희를 책임지던 독창적인 사고 방식의 광대들은 왕의 조력자이기도 했고, 정직한 통찰력으로 조언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독창적인 사고방식으로 남들보다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 그들이 바로 레이 가와쿠보가 생각하는 ‘펑크 정신’의 소유자다.
“Long Live Virgil”
켄드릭 라마는 2023 S/S 루이 비통 쇼의 프런트로에 앉아 쇼가 진행되는 내내 라이브로 노래를 부르며 고인이 된 친구 버질 아블로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구세주’, ‘카운트 미 아웃’, ‘리치 스피릿’ 등을 낮게 읊조렸고, 10여 분이 넘게 런웨이를 꽉 채운 친구의 목소리는 그 어떤 BGM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K -POP 어벤저스
2023 S/S 셀린느 옴므 쇼에 참석하기 위해 전세기에 몸을 실은 방탄소년단(BTS)의 뷔와 블랙핑크의 리사 그리고 배우 박보검. 상상해본 적 없는 셋의 조합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기에 더욱 신선했다. 쇼 당일, 수많은 팬들에게 포위되어 인사하던 그 모습은 교황이나 국왕이 전하는 인사처럼 경이롭게 보이기도 했다. 20주년을 맞은 팔레드 도쿄의 기념비적 행사로 기록되었을 듯.
이국적인 땅에서
생로랑은 2023 S/S 맨즈 컬렉션을 모로코 아가페이 사막에서 선보였다.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조형물은 런던의 미술감독 에스 데블린(ES Devlin)이 디자인한 것으로 사막의 빛나는 오아시스를 형상화했다. 런웨이가 진행되는 동안 연못처럼 눕혀져 있던 링은, 쇼 말미에 이르러 일어나 빛을 발하고, 안개를 방출하며, 회전했다. 안토니 바카렐로는 말한다. “아가페이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세트는 광대하고 건조한 미지의 땅에 빛나는 오아시스입니다.” 쇼가 끝난 후, 이 구조물은 올리브나무 농장의 관개 목적을 포함하여 아가페이 사막 주변의 농업 프로젝트에 활용될 예정.
모와롤라를 기억해
파리 데뷔 쇼를 성공적으로 마친 모와롤라(Mowalola)의 디자이너 모와롤라 오군레시(Mowalola Ogunlesi). 그녀는 팬데믹 시기에 온라인으로 옷을 선보이다 수많은 팬덤을 끌어낸 팬데믹의 수혜자다. 현실에서는 어땠을까? 먼저 쇼의 주제부터가 MZ세대스럽다. 그녀는 납치범부터 주식 중개인, 신권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범죄자들로부터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자신의 컬렉션에 ‘절도범의 옷(Burglar wear)’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노란 가죽 크로스 하네스 룩으로 시작된 쇼는 호평을 받았다. 섹스어필을 상품화하기보다는 젠더 뷰에 대한 좌절감을 표현하는 그녀. “옷을 무기화하고, 신발을 무기화하고, 어깨를 무기화하고, 팔꿈치를 무기화하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는 인터뷰 역시 재기발랄하다. 더불어 스타일리스트 로타 볼코바의 터치로 완성도가 더해진 것도 좋은 성과에 한몫했다.
- 패션 에디터
- 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