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가 믿는 것 [권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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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하는 것은 힘이 된다. 그건 배신하지 않는다. 영화 <경관의 피>와 드라마 <며느라기 2>를 동시에 선보이는 지금, 쉼 없이 달려온 배우 권율은 그것을 믿는다. 

롱 코트와 팬츠는 발렌티노 by 무이 제품. 검정 터틀넥 톱과 첼시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W Korea> 1월 5일 개봉한 영화 <경관의 피>로 누아르에 처음 도전했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어 한 장르로 안다.

권율 맞다, 드디어. 드디어. 누아르는 현장에서부터 긴장감이 흐른다. <경관의 피>는 서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집단, 인물 간의 팽팽한 긴장감과 적막이 흐르는 이야기라 촬영하면서 몸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긴장감을 느꼈다. 촬영장 갈 때마다 ‘여기서 절대 밀리면 안 된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당한다’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절대 밀리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게 한 상대역은 누군가?

박강윤 역할을 맡은 조진웅 선배. 선배는 아량이 바다처럼 넓다. 후배들이 누구보다 세게, 강하게, 부딪쳐오는 걸 좋아한다. 진웅이 형이 좋아하는 야구로 비유하자면 상대가 직구를 던지든 변화구를 던지든 다 받아내고, 어떤 공이든 던지라고 하시는 분이다. 우리 둘이 붙는 신 전날에는 형 방에 모여 함께 논의하고 시뮬레이션도 해봤다. 이렇게 말하셨다. “영화가 개봉하면 시상식에 가야 할 정도로 네 존재감이 보여야 할 것이다.” 그만큼 내가 맡은 나영빈 캐릭터에 애정을 주셨다.

나영빈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힘이 그렇게나 중요했나?

조진웅 선배의 박강윤과 최우식의 최민재라는 서로 다른 신념을 지닌 두 인물이 충돌하게 되는 꼭짓점에 있는 인물이다. 나영빈의 힘이 떨어지면 그 둘의 대립도 의미 없는 싸움이 되어버린다. 입장을 갈리게 하는 요주의 인물이 약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당신이 연기한 나영빈은 부잣집 한량이면서 마약 밀수업자다. 악역은 종종 맡았지만 이렇게 날티 나고 체격이 큰 권율은 이번 영화로 처음 본다.

12kg을 증량했다. 계속 먹었다. 운동하고 먹고, 운동하고 먹고. 감독님이 날렵하고 각진 몸이 아니라 퉁퉁한 몸이면서 살집보다는 덩치를 원하셨다. ‘음, 역시 감독님들은 주문을 쉽게 하는구나. 저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좀 했다(웃음). 비주얼 값이 세팅되니 연기도 그에 맞춰 따라가더라. 바닥에 붙은 것 같은 무게감, 거칠고 거침없는 느낌이 나왔다.

당신이 맡는 악역들에는 이중적인 설정이 붙곤 한다. <경관의 피>에서는 재벌집 한량인데 재미로 마약 밀매를 하고, 드라마 <보이스>나 <귓속말> 등에서는 멀끔한 엘리트처럼 보이지만실상은 사이코패스라거나. 왜 그런 것 같나?

이번 영화를 하며 이규만 감독님이 캐스팅 이유를 알려주신 적이 있다. 날 처음 봤을 때 이미지는 스탠더드하고 깔끔하고 예의 바른 느낌이었다더라. 그런데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내 얼굴에서 어떤 불균형한 이질감을 발견했다고 하신다. 그런 모습에서 현실적이면서 새로운 인물을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으셨다고.

감독님 안목이 좋다.

그때 안경을 쓰고 계시긴 했는데(웃음). 감독님들은 나에게서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찾는 것 같다. 대중도 전형성에서 벗어난 그런 느낌을 흥미롭게 봐주시고.

터틀넥 톱은 수트서플라이 제품. 팬츠와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카카오TV의 웹드라마 <며느라기 2>도 최근 오픈했다. <며느라기>는 결혼과 시집살이에 관한 현실적인 이야기로 인기를 끈 웹툰이다. 시즌 1에서 당신이 연기한 인물인 무구영이 어떤 남편으로 성장할지 궁금하다.

이번에는 임신에서 출산까지 다룬다. 시즌 1에서 무구영은 본가와의 갈등 속에서 방향성을 못 잡는 어설픈 남편이었고, 그 이야기들을 통해 성장하며 사린이를 위해 좋은 남편이 되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고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은 잠시 주변을 잊고는 하지 않나. 그런 사이클이 반복된다. 삶이라는 것, 결혼 생활이라는 것은 그런 주기와 변화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아내와 동상이몽의 생활을 해간다. 사람이 한 번에 변할 수는 없겠지만, 계단식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려 한다.

<며느라기>의 무구영은 현실에 있을 법한 남편상이지만, 그래도 그만한 남편도 흔치 않다고들 한다.

맞다. 처음엔 무지하지만 계속해서 깨닫고, 자기 검열을 하고, 결국 달라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현실에서는 사람이 변하는 게 쉽지 않잖아. 잘못된 건 알지만 타성에 젖어 당연하게 여겨온 것을 그대로 두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혹은 이게 잘못됐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고.

<며느라기 2>를 통해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나 배운 점이 있나?

나중에 배우자가 임신하게 되면, 10개월 동안 정말 숨도 안 쉬고 잘해야겠다는 것.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시기이니 그만큼 내가 더 꼼꼼히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교육하는 드라마가 아니었나 싶다(웃음).

그걸 바탕으로 미래의 권율은 어떤 남편이 되어 있을까?

맞춤형 AI 남편. 그런데 훗날 배우자가 <며느라기>를 보고서 ‘그때 그걸 해보고도 느낀 게 없냐’라고 하면 어떡하지?(웃음) AI도 계속 업그레이드를 시켜줘야겠다.

플래드 패턴의 울 코트와 톱은 구찌 제품. 팬츠와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권율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두 개의 궤적이 있다. <식샤를 합시다 2>의 사무관 같은 말쑥하고 단정한 역할을 자주 했고 그것이 잘 어울렸는데, 어느덧 악역도 잘 소화하는 배우가 됐다.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몸에 붙나?

둘 다 너무 힘들다(웃음). 빌런이나 사이코패스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연기적 갈망을 해소한다는 측면에서 좋았다. 그런데 어두운 역할이나 감정의 극단을 연기하고 난 후에는 나도 모르게 대미지가 쌓이는 것 같더라. 난 배역과 나 자신이 섞이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그런 기운이 몸에 밴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다른 작품으로 씻어내든, 나 개인의 삶을 환기하든, 벗어날 수 있는 지점이 필요해지지. 그렇다고 단정하거나 평범한 인물을 연기하는 게 쉬운 건 아니다. 현실적인 인물을 연기하는 것도 아주 섬세한 일이거든. 연기라는 게 참 사람을 힘들게 한다.

당신은 성실하고 나이스한 사람일 것 같은데, 실제로도 단정한 편인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거친 면도 있고, 농구 한판 즐기고 맥주 한 캔 하는 거 좋아하는 남자다. 하지만 사람들은 날 말씀하신 대로 보더라. 평범하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해야 하는 일을 성실하게 잘하면서 살아온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연기자로서는 그런 모습에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일부러 간극이 큰 캐릭터를 고를 때도 있었고. 굳이 뭔가를 깨야겠다는 의식에 사로잡히지 말자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내가 끌리고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들은 ‘이미지에 갇히지 않는 것’이었던 것 같다.

2007년 드라마 <달려라 고등어>, 2008년 영화 <비스티 보이즈>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영화와 드라마,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양쪽의 필모그래피를 촘촘히 채운 부지런한 배우이기도 하다.

매번 내가 할 수 있는 발버둥은 다 친 것 같다. 지금의 모습으로 당시의 상황에 처했더라면 좀 더 의미 있는 발버둥을 쳤겠지만(웃음). 부족했지만 그때그때 최선을 다했다.

슬럼프도 있었나?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늘 슬럼프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는 연기에 늘 만족하지 못하고, 자책하고 반성하거든. 아마 더 이상 발버둥을 치지 않으려고 하는 때가 오면 그때야말로 진짜 슬럼프가 닥친 것 아닐까? 더 열심히 발버둥 치겠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타입인가?

예전에 박찬욱 감독님 인터뷰를 봤는데, 감독님은 작업을 할 때마다 당신이 어릴 적 인생의 영화라고 생각한 작품들의 수준과 끊임없이 비교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 작업의 질이 그에 미치는지 못 미치는지’ 체크하신다고. 나도 내 연기를 볼 때, 내가 사랑해온 작품 속 연기의 퀄리티에 미치는지 묻고 또 묻는다. 늘 거기에 만족해본 적이 없었지. 나 권세인이 배우 권율에게 하고 싶은 이야긴 이거다. 왜 영화를 하고 싶었는지, 왜 배우가 되고 싶었는지 잊지 말라고. 찰나의 순간이지만 아직도 선명한 상황들이 있다. 어떤 배우의 어떤 작품 속 연기를 보고서 ‘나도 저런 배우가 될 거야, 저런 영화를 찍을 거야’라고 결심했던 순간. 그런 순간을 잊지 않고 지구력을 가지고 일하고 싶다.

모노톤 셔츠와 집업 재킷은 토즈 제품.

어떤 영화의 순간들이 당신을 배우가 되게 했나?

10대 때 할리우드 영화에 열광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데이비드 핀처, 마틴 스코세이지 영화를 보며 꿈을 키웠다. 아주 어릴 때 <태양의 제국>의 크리스천 베일 연기를 눈물을 흘리며 봤던 기억이 나네. 완전히 다른 세상 얘기 같았고, 완전히 매혹됐다. 스코세이지의 작품은 동네에서 인기 많고 싸움도 잘하고 잘나가는 형들이 모여 있는 것 같은 영화들이었고(웃음). 막연히 동경했다.

영화에 대한 애정을 말하는 지금, 눈이 무척 빛난다.

2003년, 극장에서 너무 흥분해서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고 등을 뗀 채로 본 영화가 있다. <올드보이>였다. ‘영화라는 게 이렇게 재미있는 거구나’ 느꼈다. 그런데 그해에 또 좌석 등받이에서 등을 뗀 채로 본 영화가 있었는데, <살인의 추억>이다. 어떻게 한 해에 그 두 작품이 다 나왔을까? 어떤 심정이었냐면, 저번 주에 로또 2등 됐는데 이번 주에 1등 된 느낌이었다. ‘요즘엔 로또 당첨이 잘되는 건가?’ 싶어 의심하고(웃음). 당시 나는 배우를 꿈꾸는 연극영화 학도였고, 한국 영화의 성취에 고무됐었다.

뭔가를 좋아하는 에너지가 굉장하다. 스포츠 팬으로도 유명한데.

스포츠는 삶의 낙이다. 이젠 배우가 업이다 보니,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완전히 관객의 입장에 젖어서 볼 수 있지는 않다. 배우로서 저 배우의 연기, 시나리오, 미술, 촬영을 신경 쓰고, ‘촬영감독이 누구지?’ ‘평론가들은 어떻게 평가했지?’ 이런 것들이 떠오르니까. 그런데 스포츠는 권율이 아닌 권세인으로서 푹 빠져서 볼 수 있다.

스포츠 선수와 배우의 공통점이 있다면 뭘까?

둘 다 자기의 롤을 정확하게 해내야 한다. 스트라이커가 리딩 롤이라면 미드필더들이 서포트해주고, 골키퍼는 자신의 역할을 확실하게 해야지. 스포츠처럼 영화도 감독은 감독의 역할, 조연은 조연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팀워크가 생기고, 유기적으로 돌아갔을 때 관객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끊임없이 훈련해야 한다는 점, 정해진 러닝타임 안에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점도 닮았다. 정말 비슷한 면이 많다.

권율을 플레이어로 말하자면 어떤 선수인가?

언제 어디에 들어가도 역량을 발휘하는 멀티플레이어. 하지만 아직 팀을 이끌어갈 만큼의 무게감은 부족하다. 언젠가 그런 기회가 오면, 오랫동안 업계에 남아 현장의 구심점이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오면 팀을 온전하게 잘 이끄는 선수가 되고 싶다.

유튜브 채널 ‘권율의 두율라이크’를 보고 왔다. 농구 해설위원에 도전하거나 축구 지식을 두고 대결하는, 상당히 본격적인 스포츠 채널이던데.

전문적인 채널을 표방하고 있다(웃음). 해설위원님들과 수시로 소통하면서 경기 분석과 평가를 자주 한다. 이를테면 이 팀과 저 팀이 붙었을 때 왜 재미있는지를 말하려면 팀의 역사적 배경부터 선수들에 대한 이슈 등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스포츠의 그런 부분까지는 미처 모르는 분이 많을 텐데, 스포츠 큐레이터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트렌치코트와 팬츠는 돌체&가바나, 첼시 부츠는 까르미나 by 유니페어 제품.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앞으로 연기로는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나?

누아르를 해봤으니 이제 로맨틱 코미디도 해보고 싶다. <식샤를 합시다 2>의 이상우 사무관 같은 캐릭터의 확장으로, 더 늙기 전에!(웃음)

권율은 무엇을 믿나?

건강보조식품을 먹으면 좋아지긴 하는 건가, 괜한 상술에 속은 건 아닌가 싶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효과를 의식하지 않고 꾸준히 먹으면 어느 순간 몸이 좋아진 걸 느끼게 되더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 계속 나에게 정성을 들이는 행위가 유효하다는 거다. 예전에 독립영화 <잉투기>를 촬영 중이던 이종격투기 체육관에서 대충 흩날려 쓴 이런 구호를 봤다. ‘계속하는 것은 힘이 된다.’ 처음엔 ‘저게 뭐야’ 싶었지. 그런데 박찬욱 감독님이 엄태화 감독님한테 ‘저 구호가 너무 좋다, 제목을 저거로 하라’고 하시는 거다. 왜 박찬욱 감독님께 그 말이 와닿았을까? 얼마 전 불현듯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 계속 무언가를 하는 건 결국 힘이 된다. 생활도, 연기도. 그건 배신하지 않는다. 난 그걸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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