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없는 예술가, 백현진.
백현진에게는 해야 할 많은 일이 있다.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만들고 노래도 부르고 이따금 드라마나 영화에도 등장한다. 그런 그에게 가장 즐겁고 중요한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멍하니 힘을 빼고 그가 오랜 시간 뱃심으로 붓질을 했다. 높고 넓은 흰 벽 가운데에 백현진의 즉흥과 직관이 펼쳐져 있다.
악몽
작가 백현진을 만나기 전 두 번의 악몽을 꿨다. 한 번은 그가 말이 되지 않는 말을 나열해서 좌절했고, 두 번째는 그가 너무 술에 취해 인터뷰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꿈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다행히도 2월 2일 연남동 작업실에서 그를 무사히 만났으니까. 토마토 주스와 생수 한 병을 두고 5,417개의 단어들이 느릿느릿 쏟아졌다. 언어의 미로에 빠져 버린 것만 같았다. 기시감을 느꼈다. 물감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보이는 작업실은 카오스 그 자체였다. 나뒹구는 뚜껑, 칼, 더럽혀진 리넨, 먹다 버린 젤리 봉투, 노란 청소기 등등. 여기서 동고동락한 작품 60여 점은 이미 빠져나간 듯 보였다. 전시 오프닝 10여 일을 앞둔 때였다. PKM갤러리에서 3월 31일까지 열리는 백현진 개인 전시의 타이틀은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 제목에 관한 첫 번째 미로 속으로 들어갔다.
“작업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별다른 맥락 없이 떠오른 이미지가 있어요. 바닥에 매트리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위에 흙이 좀 떨어져 있고, 아지랑이가 아른아른거리는. 그 장면을 반복해서 경험하다 흙과 매트리스를 전시 제목으로 끌고 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어느 순간 들었어요. 그런데 두 단어만 있으면 뭔가를 상징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할까봐, 이를테면 잠을 자다가 죽어서 흙이 된다든지. 그것을 조금 비틀어보려 다가 물결을 가져왔어요. 마찬가지로 전시 마무리할 즈음 하염없음, 어긋남, 이런 말이 계속 맴돌았어요. 하염없이, 멍 때리면서 물결을 바라보는 것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이미지에서 비롯된 두 단어 흙과 매트리스, 하염없음이라는 낱말 때문에 떠오른 물결이란 것과 붙여놓으면 괜찮겠다 싶었어요. 원래 그림 그릴 때도 제목 없이 그리는데, 예전에는 작정하고 제목 을 지어본 적도 있죠. 이번 전시 같은 경우에는 그림에 가볍게 텍스트를 태그시켜놓는 식으로 제목을 붙였어요. 사실 모든 그림의 제목은 다 없어도 되고, 서로 바뀌어도 상관없어요.”
숫자
백현진은 쉬지 않고 그렸고, 그린다. 한국, 영국, 독일, 이탈 리아 등 국내외 개인전을 10회 이상 열었다. 국립현대미술 관, 삼성미술관플라토, 아트선재센터, 두산아트센터 등 주요 미술관의 단체전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2017년에는 국립 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7’ 후원 작가로 선정되었다. 그가 앉거나 서거나 붓을 쥐고서 10시간 이상 그림 그리는 신체 동작을 상상해본다. 색깔 하나 때문에 반나절을 멍하기 앉아 있기도 한다. 백현진은 발전, 수정, 개선 이런 것을 안 믿는다고 했다. 몸짓과 동작, 뇌와 눈, 근육과 신경, 모든 것 을 가동한다. 육체적 정신적 지구력을 요하는 일이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93 × 93cm 일정한 규격의 리넨 캔버스에 그 림을 그렸다. 약 65점의 그림은 커다란 흰 벽면에 즉흥적으 로 무작위하게 설치되었다.
“작년 초부터 작업을 시작해서 1년 정도 그린 거니까 사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볼 수는 없어요. 레고에 비유하자면 블록이 많아야 이렇게 저렇게 재미나게 조합해볼 수 있잖아요. 그림을 그려서 설치하려면 일단은 그림 양이 많아야겠다 생각했죠. 그래서 주구장창 그렸어요. 계획이나 목표 없이 작업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숫자를 정할 때는 가끔 있어요. 이를테면 ‘나는 오늘 줄넘기를 하루에 10개 하겠다’ 그런 식인 거예요. 단순한 룰이죠. 작업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정말 과격하고 무식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숫자를 정해놓고 작업한다고? 하지만 저는 그 방법이 편해요. 이번에는 뭐가 됐든 1년 동안 100점 정도를 그려볼까라고 정했죠.”
패턴
그의 작업실엔 아직 반출되지 않은 두 점의 그림이 남아 있다. 그 작품에 대해 어렴풋이 남아 있는 인상은 패턴이다. 3월 중순까지 두 그림을 다른 나라로 보낼 거라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패턴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이번 전시에도 패턴 시리즈 작품 16점이 타일처럼 빈틈없이 설치되어 있다. 각각의 패턴은 독립적으로도, 혹은 두 개 이상으로 합쳐져 전체의 구성 요소로서 존재하고 기능한다. 혼란스럽다. 알록달록하다. 어여쁘기도 하다. 그 앞에서 약 5분 동안 바라본 후 직관적으로 느낀 점이다. 상하좌우가 없는 ‘패턴 같은 패턴’ 시리즈를 두고 작가는 “패턴이 될 수 없는 어떤 패턴 같은 무엇”이라고 말했다. 패턴 앞에서 두 번째 미로에 접어든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그림을 그려도 되나? 회화를? 그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단순하게 그리는 것이 마음 편해요. 무엇보다 ‘이렇게 그려도 되겠다’라는 뱃심이 좀 생겼어요.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오면서 뭔가 덜 그리고 싶어 했어요. 저는 그걸 뱃심이라고 표현하는데, 제게는 항상 뱃심이 부족했던 거죠. 뭔가를 하려는 것보다 안 하려는 훈련을 오래 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그림도 무엇을 그리지 말아야지, 노래도 어떻게는 부르지 말아야지 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죠. 청년 시절 굉장히 오래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다 보니까 그런 훈련이 된 것 같아요. 또 모르죠, 이러다 갑자기 엄청 많은 걸 그리고 싶을 때도 있을 거고.”
감정
백현진은 두 가지 실험을 했다. 단식과 폭음. 17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고, 하루 동안 왕창 술을 마셨다. 단식은 방전에 서 비롯됐다. 독일 쾰른에 있는 초이앤라거 갤러리에서 가로 세로 261 × 546cm 대형작을 그린 후의 일이다. 혼자만의 터널 속에서 그는 우울이란 패턴을 통과했다. 단식을 하며 기운은 없지만 정신은 또렷해지는 상태로 그림을 그려보았고, 패턴 시리즈는 그렇게 나오게 됐다. 그는 힘이 계속 빠져 나가는 상태에서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고 했다. 두 번째 폭음 임상실험은 신작 ‘여기에 있는 모든 그림의 제목은 없어도 좋다’를 낳았다. 화가의 감정이란 세 번째 미궁을 들여 다봤다.
“폭음한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그린 그림이 있어요. 술을 마시는 순간에는 힘도 막 더 세지고 몸 상태가 평소보다 차라리 낫잖아요. 자고 일어나면 다음 날 죽어나지만요. 보통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엔 끙끙 앓고 누워 있어야 하는데 이때 뭐가 그려지나 한번 본 거예요. 건물 2층에 살면서 거기서 음악 만들고, 3층에서는 그림을 그려요. 폭음한 다음 날 아래층에 있다가 쓱 올라와서 그림 그리고 아마 다시 내려가서 잤겠죠(웃음). 제가 붓질을 좋아하는 이유는 노래하는 것도 그렇고 그 순간에는 말 그대로 띵하고 아무 생각이 잘 안 나요. 뭐 그걸 두고 트랜스 상태, 별 생각이 안 나는 상태, 멍해지는 상태, 뭐라고 이름 붙이든 상관이 없는데 제 몸이 그렇게 훈련이 되어 있어요. 누군가 엄청나게 싫은 것도 기분이 좋은 것도 으쓱해지는 감정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딱 오프(Off)돼요. 그런 상태를 되게 좋아해요. 그림 그리고 노래하면 느낄 수 있어요.”
소리
백현진의 또 다른 일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종합예술인, 중년 엔터테이너, 박찬욱 감독이 말하길 한국에서 주저 없이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어떤 수식어가 적절할지 모르 겠지만 정말이지 그는 많은 일을 한다. 화가, 음악가, 행위예 술가, 배우, 감독, 그래픽 디자이너 등등. 지난 1월 종영한 MBC 드라마 <붉은 달 푸른 해>에 미치광이 개장수 역할로 등장해 열연했고, 호평받기도 했다. 그가 드라마 안에서 소리치고 울부짖고 말할 때 묘하게 음악처럼 느껴진다. 그는 말을 할 때도 노래할 때도 자기 몸에 맞는 소리를 낸다. 크게 내지르고 깊게 울리고 거칠게 긁는 방식들. 음악감독 장영규와의 ‘어어부 프로젝트’, 기타리스트 방준석과의 ‘방백’, 그리고 색소폰 연주가 김오키와 함께한 앨범과 공연. 백현진이 한국 대중음악 안에서 보여준 스펙트럼은 실험 음악과 성인 고급 가요 그 어디쯤이다. 2016년 PKM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들과 새와 개와 재능>에서도 그는 신시사이저로 녹음한 웅웅거리는 지속음을 전시장에 틀어놓았다. 이번 전시 <노동요: 흙과 매트리스와 물결>에서 그는 제 몸을 관통하는 언어와 소리를 통해 행위예술을 수행한다. <뮤지컬: 영원한 봄>이라 제목 붙인 퍼포먼스는 전시 기간 동안 매주 수요일, 토요일(3월 16일은 제외) 16시 30분, 17시 30분, 각각 두 번 씩 20분 동안 공연된다. 즉흥적인 상황과 소리는 백현진의 벽화와 함께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네 번째 기로에서 그림 그릴 때 어떤 소리와 음악을 듣는지 물었다.
“아무 소리 없이 작업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사람 목소리가 없는 연주곡을 듣습니다. 최근에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는 브라이언 이노가 앰비언트 개념을 맨 처음 만들 때 발표한 <Ambient1: Music for Airports>예요. 2000년 초 중반에 정말 많이 들었는데 한동안 안 듣다가 요즘 잘 듣고 있죠. 어느 때는 제가 중얼중얼 멜로디 메모해놓은 파일을 틀어놓을 때도 있어요.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그림 그리면서 블라드슬 라브 딜레이(Vladislav Delay) 음악을 들었어요. 핀란드 출신 전자 음악가인데 좋아요. 오랫동안 좋아했던 음악을 요즘 다시 듣는데 좋더라고요.”
유희
설치 작업을 끝마친 갤러리에서 백현진을 다시 만났다. 그는 헤어질 때마다 ‘즐겁게 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이상하게 그 말이 맴돌았다. 자신이 즐겁게 놀면서 그린 그림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 그가 바라는 풍경이다. 백현진은 좋다고 느끼는 그림은 오래도록 바라보는데, 이를테면 네오 라우흐(Neo Rauch)나 피카소의 작품. 붓질을 한참 바라본다. 회화로 감정을 다루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며. 그는 관객들이 전시장에 좀 더 머물렀으면 했다. 작가는 사람들을 붙잡아놓는 방법, 물리적으로 그들을 머무르게 하는 방법을 늘 고민한다. 앉아서 편하게 보라고 긴 의자도 가져다 놓았다.
“저는 즐거운 일을 하는 게 좋아요. 공연도 그림 그리는 것도 노는 방법 중 하나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카데믹하게 현대미술 하는 분들은 싫어하더라고요. 어떻게 그걸 논다고 이야기하냐고. 그럼 그분들은 숭고한 거 하시면 됩니다. 나는 즐겁게 놀면서 일하고 살고 싶어요. 미술 시장에서 특별한 성과가 있거나 평단에서 주목받는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주구장창 그리고 있다는 것은 제 잘난 맛에 그림 그리는 것도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에요. 운이 따라준 덕분에 계속 다른 일 안 하고 그림만 그릴 수 있는 상황이라 성실하게 그냥 일하는 것뿐이에요.”
지성(知性)
백현진 같은 사람이야말로 지성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반문했다. 도대체 지성인은 누구이며 어디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거냐고. 이에 대한 대답은 그의 추천 도서로 대신한다.
“안 그래도 최근에 페이스북에 추천 도서를 쓰려다 말았어요. 내 나이에 그런 거 쓰는 것도 꼰대짓 같아 보여서(웃음). 철학가 이정우 씨가 쓴 <세계철학사>라는 책이 있어요. 1편은 지중해 세계의 철학이고, 2편은 아시아 세계의 철학인데 저는 지금 2편을 보고 있어요. 제목이 너무 깨긴 하죠? 두께도 있는 편이라 손이 잘 안 갈 수 있는데 한글로 쓴 정말 좋은 텍스트 라고 생각해요. 만약에 <더블유> 독자들을 위해 한 권 더 추천 한다면 시인 쉼보르스카의 서평을 모아놓은 <읽거나 말거나>. 이거 좋던데요.”
- 피처 에디터
- 김아름
- 포토그래퍼
- 박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