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관광의 메카, 방콕에서 첫 아트 비엔날레가 열렸다.호화스러운 초고층 빌딩과 전통적인 사원 사이에서 펼쳐진 뜨겁고 센세이션한 그 현장 속으로.
무대 위에서 군인, 드래그 퀸, 소년 축구선수, 동굴 여신, 중국 여신, 인도 여신, 흑표범, 살찐 사냥꾼 등으로 분한 퍼포머들이 사방에서 발을 구르며 대성통곡을 한다. 스피커에서는 랩이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국회가 군인의 놀이터인 나라 / 지도자들 이 세금을 간식처럼 집어 먹는 나라 / 군홧발에 법이 쓰이고 지워지는 나라 / 총을 목구멍에 쑤셔넣고 자유는 갖되 선택할 권리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나라 / 벌써 4년째야, 개새끼야, 선거는 아직도 없고 / 자유 국가? 엿 먹어! 선택권을 줬다고 말도 꺼내지마 / 총리조차 여태 군대가 골라.” 유튜브 뮤직 비디오 4천만 뷰를 돌파한 ‘그게 내 X 같은 나라(Prathet Ku Mee)’(2018) 정도로 의역되는 이 랩이 묘사하는 이 ‘나라’의 수도에서 사상 첫 비엔날레가 열렸다. 바로 태국 방콕에서 진행 중인 제1회 방콕 아트 비엔날레(2018.10.19~2019.2.3)다. 방콕 시내 20여 곳 에서 열린 이번 행사에는 34개국 출신 작가 75명이 참여했다.
이번 비엔날레를 위해 번안된 이 공연은 현대 무용과 태국 전통 무용을 접목해온 태국 출신 퍼포먼스 작가 피쳇 클룬춘(Pichet Klunchun)의 출품작 ‘Bogus Seance Version Bangkok 4.0’ (2018)이다. 지난 몇 년간 태국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를 되짚으며 그 상처를 치유하고 피해자의 넋을 기리는 일종의 굿판이 었다. 승려로 분한 작가는 무대 뒤쪽에 마련된 요란하게 꾸며진 제단에서 공연 내내 향을 피우다가, 말미에 신적인 존재로 탈바꿈해 이 난장을 정리한다. 신이 된 작가는 끝으로 객석에서 몇 차례 질문을 받고 현답(?)을 건넨다. “도대체 저희 총선은 언제 치르나요?” 작가 왈, “2월 24일. 근데 연도는 나도 몰라.” 옆자리에서 같이 공연을 보던 방콕 비엔날레의 설립자이자 예술감독 아피난 포샤난다(Apinan Poshyananda)가 한바탕 웃더니 농담을 속삭인다. “우리 비엔날레, 이러다가 내일 문 닫겠어요!”
포샤난다는 태국 문화부 사무차관이자 태국 출신 큐레이터로 국제적으로도 명망이 높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새로운, 그리고 첫 비엔날레의 출범은 쉽지 않았다. 민감한 정치적·사회적 현안을 다루는 경우가 많은 비엔날레라는 미술 전시 방식 이 뿌리내리기에 2014년 쿠데타 이후 군부 정권이 통치 중인 태국의 정세가 다소 불안한 탓이다. 하지만 방콕은 현대미술계를 견인할 하드웨어 인프라가 상당히 빈약하기에 비엔날레라 는 유연한 구조가 오히려 적합하기도 했다. “젠더, 성매매업 종사 이주민, 난민, 디아스포라, 환경 오염, 정부 통제 등 태국은 물론 전 세계가 겪는 사회 정치적 이슈를 아무 검열 없이 이번 비엔날레에 포괄할 수 있었어요. 위기 관리는 도전에 뒤따르는 부속 요소니까요.”
제1회 비엔날레의 주제는 ‘천상의 기쁨을 넘어서(Beyond Bliss)’ 다. 듣자마자 너무도 가식 없이 노골적인 ‘태국스러움’에 놀랐 다. 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있기 있는 관광지다. 극우파 득세, 난민갈등, 중동 내전, 기후 변화 등으로 전 세계가 골머리를 앓아도 사람들은 이 출구 없는 답답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휴식, 평정, 따뜻함을 누리고자 태국을 찾는다. 세계여행관광 위원회(WTTC)의 분석에 의하면 2017년 태국 전체 GDP의 21.2%를 관광 수익이 차지했다. 전 세계 평균이 10.4%, 한국이 4.7%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치다. 이는 비엔날레의 도시 베니스와 유사한 점이기도 하다. 굳이 미술이 아니어도 이미 탁월한 관광 천국이기 때문이다. 두 도시의 공통점을 적극 피력하고자 포샤난다는 방콕 아트 비엔날레의 출범 기자 간담회를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오프닝 기간에 진행했다. 베니스의 수로를 연상시키듯 방콕을 관통하는 짜오프라야강 주변 인프라를 비엔날레에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대표적인 장소가 동아시아회사의 본부 건물이다. 1897년 창설된 이 덴마크 운수 회사는 코펜하겐과 방콕을 거점으로 북유럽과 아시아의 물류를 매개했으며, 대한제국에도 통상의 문을 두드린 바 있다. 본부 건물은 베니스 건축 양식으로 1900년경에 지어졌다. 이 건물 앞 강둑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출신의 듀오 작가 엘름그린 & 드라 그셋(Elmgreen & Dragset)의 신작, 풀장을 세로로 세운 8m 높이의 조각 작품 ‘Zero’(2018)가 설치돼 있다. 작품 가운데가 뻥 뚫려 있어 작품 뒤로 펼쳐진 강 풍경이 수영장 물을 대신하고, 특히 이 강변의 랜드마크 같은 더 페닌슐라 호텔 이 작품 외곽 안에 쏙 들어온다. 태국인의 레저 문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외국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호텔마다 갖춘 호화 수영장, 시민의 공공재여야 할 강변을 전부 사유화하고 있는 호텔 및 쇼핑몰 체인, 시내 공공 복지 시설물의 태부족 등의 문제를 미묘하게 건드리는 작품이다.
동아시아회사 건물 내부의 가장 큰 방은 한국 작가 이불의 대형 설치 작품 ‘Diluvium’(2012/2014/2018)이 메우고 있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실버 테이프로 전부 감싼 나무 패널 및 철제 프레임으로 온 세상이 산산조각난 것처럼 조성해 사방 벽과 바닥을 뒤덮었다. 작품 위에 올라서는 순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안 정한 느낌, 30도를 오르내리는 태국 겨울 햇빛의 산란, 습한 기후와 오랜 방치로 인해 갈라지고 터진 원래 공간의 페인트 내벽 등이 뒤엉켜, 마치 과거와 미래 시공간의 죽은 피부 각질이 지금 여기의 자리에서 서로를 밀치며 부유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이 느낌 자체가 방콕일지도 모르겠다. 이는 비엔날레에 포함된 가장 특이한 유형의 두 공간의 대비에서 잘 드러난다. 바로 쇼핑몰과 불교 사원이다. 어른용 테마파크에 가까운 방콕의 쇼핑몰들은 태국 내외국민과 관광객 모두를 빨아들인다. 놀랍게도 2012년 인스타그램 발표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진이 포스팅된 곳 1,2위가 차례로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과 방콕 내 대형 쇼핑몰인 시암 파라곤이었다. 비엔날레에 포함된 5~6개 쇼핑몰에는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와 최정화의 작품이 돋보인다. 형형색색 플라스틱의 노골적인 키치함을 전면에 내세운 최정화의 작품은 화이트 큐브 전시에서와는 달리, 쇼핑몰 구석구석을 메운 장식물과 어울리며 이 소비 자본주의의 성지 속에 너무나도 매끄럽게 하나가 된다.
초고층 호텔 및 쇼핑몰 건물과 함께 방콕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하는 화려한 불교 사원은 표방하는 가치 면에서 소비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있다. 그러나 불교 국가 태국의 얼굴인 이 사원들에서 뻗어나간 온화함과 물리 치료의 가르침이 오늘날 ‘타이 스마일’과 ‘타이 마사지’라는 이름으로 트레이드마크처럼 팔려 나가는 점은 역설적이면서도 매우 적나라한 태국의 오늘이다. 포샤난다는 이를 아우르고 싶었다. “우리의 유산,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되어온 신념, 현대적인 믿음의 양상 등을 이 성스러운 공간 안에 버무려보고 싶었습니다. 와트 프라윤(Wat Prayoon, 철담사원)의 중앙 원형 회랑 바닥을 12만 5천개의 작은 세라믹 해골로 메운 니노 사라부트라(Nino Sarabutra)의 ‘What Will You Leave Behind’(2012), 와트 포(Wat Pho, 와불 사원)의 46m 와 불상 앞에 패션 디자이너 지칭 솜분(Jitsing Somboon) 이 제작한 흰색 가운 ‘Paths of Faith’(2018) 등을 설치하기 위해 정부 부처를 설득하는 과정은 아주 버거웠어요.”
사원에 설치된 작품 중에서는 중국과 태국의 오랜 관계를 조명하는 작품이 흥미롭다. 와트 포 내부를 거닐면 작은 돌산이나 낙원처럼 조성된 조각 군상이 사원 전체에 걸쳐 군도처럼 퍼져 있는데, 여기에 기묘한 자세를 한 선인(仙人) 조각상, 중국 인물상, 동물상 등이 배치돼있다. 태국 출신 작가 판나판 요드마니 (Pannaphan Yodmanee)는 마치 부서진 사원 건물의 콘크리트 파편 같은 조각 덩어리들을 이 조각 군상 사이사이에 설치했다. 작가의 조각 작품 외면에는 마치 아시아판 폼페이 벽화처럼 태국 전통 벽화 방식으로 그려진 어떤 장면이 분절적으로 담겨있다. 그녀의 신작 ‘Sediments of Migration’(2018)에 담긴 이 풍경들은 중국과 시암(Siam: 태국의 옛 이름) 사이의 무역, 성지 순례,복합적 종교 의례, 다인종 문화 등의 주제를 넌지시 드러낸다. 한편 와트 아룬(Wat Arun, 새벽 사원)에는 태국 출신 작가 콤크리트 텝티안(Komkrit Tepthian)이 새로운 신을 만들었 다. 그의 대형 조각 작품 ‘Giant Twins’(2018) 시리즈는 태국 불교 사원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돌로된 전통 중국 군인 수호상과 태국의 국가 상징인 반신반조 가루다 조각상을 말 그 대로 반으로 잘라 합쳤다.
지정학적으로 중국과의 외교, 교역, 군사 관계 수위 조절은 태국 사회 전반에 큰 흔적을 남겼다. 최근 두 국가의 긴밀한 공조는 세계 판도를 재편하려는 일환으로 동남아시아에 공을 들여 온 중국의 영향력을 시사한다. 태국은 중국 국적자로서 사전 비자 신청 없이 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이며, 2017년 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의 약 28%가 중국인이었다. 이러한 의존도 만큼 태국이 치르는 대가도 있다. 민주주의의 쇠퇴다. 중국 중앙 정부의 입김에서 벗어나 홍콩만의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노란 우산 운동’을 이끈 조슈아 웡(Joshua Wong)은 2016년 10월 방콕 소재 대학의 특강 연설자로 초청됐으나 방콕 국제공항에 발을 내디디자마자 태국 경찰 당국에 의해 홍콩으로 곧장 환송 됐다.와트아룬의 한 구역을 새빨간 투명 아크릴 패널로 감싸 역사적 시공간 속에서 퇴색된 신성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태국 출신 작가 사니타스 프라딧타스니(Sanitas Pradittasnee) 의 설치 작품 ‘Across the Universe and Beyond’(2018)는 오늘 날 국가간 알력 및 내통 관계의 지각 변동에 따라 함께 이동하는 정치적 신성함에 대한 코멘트로 읽히기도 한다.
몇몇 태국 미술계 인사들은 제1회 비엔날레를 예술감독인 포샤 난다의 ‘끄렝짜이(Kreng Jai)’로 해석한다. 우리말로 정확한 번 역어가없는이단어는태국문화에깊이뿌리내린정서로, ‘상대방이 나 때문에 속이 상하거나 불쾌하거나 불편해 할까봐 염려하는 마음’이다. 올해 만 62세인 포샤난다가 그간 해외에서 함께 작업한 적 있던 작가들을 이번 비엔날레에 많이 포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샤난다로서는 이를 통해 현대미술에 대한 수요는 폭발하지만 인프라 공급이 열악했던 고향 방콕에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방콕 아트 비엔날레 재단은 태국 최대의 식음료 기업 타이베브(ThaiBev)의 후원으로 설립됐습니다. 태국 관광청 같은 정부 기관과 여러 사기업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어요. 차후 2회 차의 자금까지 확보해놓은 상태입니다.” 외부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방콕은 비엔날레로 제2의 베니스가 될 수 있을까? 피쳇 클룬춘에게 물어볼 걸 그랬다.
- 피처 에디터
- 김아름
- 글
- 탁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