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을 지나 (김강우)

이채민

배우라는 직업으로부터 도망갈 궁리로 한때를 보내고, 김강우의 눈앞은 어느 순간 맑아졌다. 자기 안의 태풍이 지나가고 단련되는 모든 사회인이 그렇듯이. 지금 그의 곁엔 견고한 가정의 울타리가, 그리고 새 영화와 드라마가 있다.

WK1803-김강우2
오늘 화보 촬영을 하던 패션 에디터가 당신에게서 여전히 소년의 얼굴이 보인다고 하더라. 드라마 배역 때문에 유지하고 있는 콧수염만 빼면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소년? 나, 40대다(웃음). 물론 예전에는 어려 보이는 얼굴이 다소 콤플렉스일 때도 있었다. 그래서 20대 후반에 일부러 수염을 길러보기도 했고. 그럴 때가 있었다니, 그립다. 친형 역시 나이에 비해 동안이다.

현실은 당신에게 학부모라는 타이틀이 막 추가되려는 시점이다.
아들이 둘 있는데,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이 사실이 좀 웃기다. ‘내가 학부모라고?’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색한 거지. 아직 어른이 아닌데 어른인 척해야 한달까? 나는 단순한 사람이다. 전화 통화하면서 다른 사소한 일을 처리하는 멀티태스킹이 전혀 안 된다. 작품에 정신이 팔린 동안에는 누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해도 잘 잊어버리고. 아내는 내가 작품을 하는 기간이면 나를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3월에 개봉할 스릴러물 <사라진 밤>은 완전 범죄를 꿈꾸며 재력가인 아내를 살해하지만, 시체가 사라지면서 일어나는 하룻밤 동안의 이야기다. 혹시 영화 내용을 들은 아내가 남긴 말이 있나?
아내는 내가 하는 작품에 대해 잘 모른다. 옆에서 시나리오를 들춰본다거나 하는 경우도 없고, 내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집에서 작품에 관한 언급은 안 하고 산다. 아내는 예고편이 공개되면 그걸 보고 나서야 “어! 이거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하는 식이다. 이상한가?

한집에 사는 사이라고 해서 바깥일을 시시콜콜 공유하란 법은 없으니 이상하진 않다. 다만 내가 죽였다고 생각한 아내에게서 문자가 와 질겁하는 신을 찍고 집에 들어가면, 현실의 아내와 작품 이야기 한마디는 나눌 줄 알았다.
이를테면 우리는 “내가 이러이러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작품을 촬영하고 있어. 이런 상황 이해가 가?” 유의 대화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 촬영 끝나고 잠잘 시간은 있는 거야? 밥 잘 챙겨 먹고.” “촬영 쉬는 날 같이 밥 먹을까?” 같은 말을 주고받지. 작품이라는 동그라미 내부의 이야기는 안 하고 그 밖의 이야길 나누는 정도다.

싱글 버튼의 롱 코트는 오디너리 피플, 통 넓은 팬츠는 우영미, 스니커즈는 코스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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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개봉용으로는 2015년 <간신>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영화다. 이성과 머리로 고른 작품인가, 시나리오가 재밌어서 마음으로 끌린 작품인가?
이번에 장편 데뷔하는 이창희 감독의 예전 단편 영화 때문에 선택했으니, 이성적으로 내린 판단이다. 서스펜스를 짧은 시간 안에 풀어가기가 쉽지 않은데 감독님이 <소굴>이라는 단편에서 아주 훌륭한 연출력을 보여준 바 있다. 그 점을 믿고 <사라진 밤>을 택했다. 내 아내 역할을 누가 맡게 될지도 중요한 변수였다. 그 배우의 포스가 있어야 내가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개연성이 살아나니까. 그 역할을 김희애 선배가 한다니 더더욱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호흡을 맞춘 김희애는 어땠나?
배우 김희애는 아우라가 강하지만, 인간 김희애는 아주 부드럽고 편안하다. 영화에서 형사로 나오는 김상경 선배와 더불어 우리 셋이 중앙대학교 동문이다. 학창 시절 김희애 선배는 많은 이들의 뮤즈였다. 어린 나이에도 원숙하고 고급스러운 연기를 보여준 터라 그냥 뮤즈가 아니라 큰누나 같기도 한, 복합적인 면을 지닌 존재. 그래서 막연히 저분과 멜로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드디어 작품에서 부부로 만났는데 멜로가 아니라서 아쉽다면 아쉽다(웃음).

3월부터는 MBC 주말 특별 기획 <데릴남편 오작두>도 방송된다. 바쁜 커리어우먼인 유이가 오로지 사회적 안전망을 위해서 우연히 얽힌 남자에게 결혼을 제안한다는 설정이 눈에 띈다. 산 속에서 약초 캐며 사는 무공해 청년으로 분한 당신의 모습도 재밌고.
나는 같은 시대를 사는 여성 시청자가 오작두 캐릭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무척 궁금하다. 욕심 없이 자연을 벗 삼아 살면서 바른 생각을 하는 이 남자가 아주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남자가 하는 말을 보면 사실 틀린 게 없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것뿐인데 그와 엮이는 보통의 도시인은 오해하거나 그가 엉뚱하다고 생각한다.

김강우의 캐릭터들에게선 언젠가부터 ‘스트레스 잘 받을 것 같은’ 이미지가 풍겼다.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에서 재벌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결국 폭발해버리는 보통의 인간, <굿바이 미스터블랙>이라는 드라마에서 부와 명예를 지키려고 안간힘 쓰는 불안한 모습 등 깨지기 쉬운 피로함이 보였달까? 그건 당신이 둔한 남성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작두는 또 새로운 캐릭터인데 역할을 제안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왜 나에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면이 있고, 그걸 하나씩 꺼내놓고 보여주는 재미로 배우 생활을 하기도 한다. 곧 선보일 두 작품에서 내가 너무나 상반된 인간으로 나오기 때문에 드라마 촬영을 막 시작한 지금 나도 기대가 된다.

주말 밤 시간대엔 시청자 연령층이 넓은데, 국민 사위로 등극할 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내가 드라마를 잘 못 본다. 성향 탓인지 연속성 있게 지켜봐야 하는 시리즈물을 붙들고 있기가 힘들 더라. 미드로 정주행을 시도해봐도 마찬가지다. 아내가 TV를 틀어놓으면 왔다 갔다 하다 마주치게 되는데, “저 드라마 아직도 해?” 하면 “이건 다른 드라마야”라는 답이 돌아오곤 한다. 그러니까 내 눈에는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소재도 느낌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데릴남편 오작두>를 택한 이유는 딱 하나, 일정한 시류에서 완전히 비켜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게 위험한 길일 수도 있지만, 이왕 할 거 좀 다른 걸 해보고 싶었다.

줄무늬 셔츠는 준지, 이너로 매치한 셔츠는 노앙, 와이드 팬츠는 아람, 스니커즈는 컨버스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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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새 작품을 선보인다고 하면 기사에 이런 댓글이 달린다. “김강우는 참 괜찮은 배우인데 왜 대박이 안 나지! 이번엔 꼭 대박 나세요!”
대박과 흥행이야 모든 배우가 바라는 바다. 그러나 쉽지는 않은 게 문제지.

배우로서 하나의 능력을 선물 받을 수 있다면 뭘 원하나?
만약 대박이 날 작품을 족집게처럼 골라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해도 그 시나리오와 대본이 꼭 나에게 들어오리라는 보장은 없다. 흥행작을 내놓는 배우에겐 계속해서 흥행 잠재력이 높은 시나리오가, 반대로 흥행작이 별로 없는 배우에겐 흥행 가능성이 크지 않은 시나리오가 자주 들어올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런 흐름 속에서, 다음으로 운의 문제도 있다. 나에게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다면 그 모든 시간과 기회를 다 버텨낼 수 있는 힘이었으면 좋겠다. 오랜 세월 일을 할 수 있는 의지, 끈기, 건강을 바란다.

데뷔 17년 차의 연륜이 묻어난다(웃음). 당신은 여러 인터뷰에서 배우도 직장인과 같은 직업의 하나라는 생각을 자주 비쳤다. 오래 직장 생활을 하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잡으려면 몸과 마음의 체력이 받쳐줘야 하는 게 사실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와 지금의 몸무게가 같다. 이 일이 여느 직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어쨌든 남에게 보여주고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가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줄줄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한다. 배우도 운동선수와 같은 리듬으로 살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내 동서이기도 한 기성용 선수가 존경스럽다. 운동선수는 경기를 뛰는 시즌이 아닐 때면 동계 훈련과 하계 훈련을 한다. 나도 연기를 하지 않는 시즌에는 훈련하듯이 날 관리하고 싶다. 어차피 작품에 들어가면 바쁘니까 한가할 때 컨디션을 다져놓는 거지.

운동을 하거나 악기를 다루는 것처럼 한 가지 재능을 지독하게 파고드는 사람에겐 문득 그 일이 진절머리 나게 싫어지는 위기의 순간이 닥치기 쉽다. 당신의 경우는 어땠나?
1년 동안 영화를 전혀 안 보고 연예 기사마저 피해 살던 때가 있었다. 불과 몇 년 전 만 해도 이민을 갈까, 자격증을 따서 다른 직업을 가져볼까 딴 곳을 기웃거렸다. 오래된 연애의 증상과 비슷한 것 같다. 서로 별꼴 다 보면 집어치우고 싶다가도 좀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립고, 짠하고… 시간이 쌓이면서 애증도 생기는 거. 어느 순간 내 일의 좋은 면이 눈에 더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생각의 추가 긍정적인 쪽으로 넘어가더라. ‘그래, 배우는 정년이 없어’ ‘어디 가서 대접도 받잖아?’ 싶고. 이젠 이 일이 굉장히 소중해졌다. 인생 길게 봐야 한다는 어른들 말이 맞다.

갈등과 방황의 터널을 통과하고 나니 개운해진 셈인가? 그런데 무슨 자격증을 생각했나?
조리사 자격증 같은 요식업 관련. 내가 엑셀을 다룰 줄 아는 사람도 아니니까(웃음). 그런데 이런저런 고민을 할 때면 심플하게 상황을 정리해주는 존재가 바로 아내였다. 내가 뭘 해볼까 해도 아내는 놀라거나 말리지 않았다. 대신 이런 식이다. “그래, 해봐. 배우 일보다 잘할 자신 있으면….”

더 많은 화보 컷과 자세한 인터뷰는 더블유 3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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