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념보다 자본이 앞섰던 시대이자 자유와 에너지로 상징되는 X세대가 출현한 시대. 하지만 패션으로는 많은 유산을 남기지 않은 시대. 이제, 새로운 세대들이 잃어버린 90년대를 찾아내어 재해석하고 있다. 90년대는 어떻게 90년대생을 사로잡게 되었나.
역사를 무 베듯이 10년 주기로 딱 잘라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90년대에 20대를 보낸 내게 1990년대란 ‘탈(脫) 의 시대, 즉 모든 것이 궤도에서 벗어나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희한한 지점을 향했던 시대로 기억된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하는 것이 옳다라는 당위적 가이드라인이 의미를 잃었고, 새롭고 흥미로운 것이면 좋고 나쁨(옳고 그름이 아닌)을 떠나 모두가 몰두했다. 흑백논리식 이념에 지배받지 않고 자유와 개성으로 무장한 90년대의 젊은 무리에 대해 처음으로 사회문화적 고찰을 시도한 이는 캐나다 작가 더글라스 쿠플랜드였다. 그는 <제너레이션 X>라는 소설을 통해 ‘X란 정의 할 수 없음을 의미하며, 이전 세대의 문화와 가치관을 거부하는 이질적인 집단’이라고 서술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의 X 세대만 봐도 전 세대와의 이질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1994년에 처음 실시된 수능을 경험한 수능 세대이자, PC통신과 삐삐의 유행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감각의 소비를 시작했으며, ‘슬램덩크’와 ‘주윤발’에서 ‘너바나’와 ‘꼼데가르송’까지 다국적 문화를 어렵지 않게 즐기게 된 수혜자였다. 게다가 이건 한국만의 특수 상황이긴 한데,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지긋지긋한 반공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기까지 했다.
인터넷과 디지털이 본격화한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면서 X세대 자체는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한 후 사라졌지만, 그들이 곳곳에 뿌려놓은 90년대의 흔적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 사회와 문화 곳곳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다. 90년대에 시작된 포스트 페미니즘 운동이 에마 왓슨처럼 영향력 있는 90년대생 여배우에게서 언급되는 등 연일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90년대 중반 전 세계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이완 맥그리거의 데뷔작인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트레인스포팅(1996)>은 20주년을 맞아 후속편을 준비 중이다. 한국에서 밀키스와 환타가 다시 뜨고 있듯이, 미국에서 는 90년대 아이들의 국민 음료였던 서지(Serge)의 오렌지맛 소다가 재출시되어 인스타그램과 스냅챗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90년대에 이름 좀 있던 것들을 디지털이 고이 내버려두지 않는 현상인 것 이다. 지난 2월부터 LA 현대미술관(MOCA)에서 열리고 있는 <돌아보지 말라 : 1990년대(Don’t Look Back : The 1990’s)>전을 준비한 큐레이터 헬렌 몰스워스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90년대가 재편되었고, 인터넷과 PC의 등장으로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90년대는 여전히 신선하고 충격적이다”고 말한다. 인종, 성별, 정체성을 아우르는 90년대라는 개념을 예술적 형태로 재조명하는 이 전시회에는 로니 혼, 폴 매카트니, 르네 그린 등의 작품이 선보여진다. 몰스워스는 밥 딜런의 노래에서 따온 전시회 타이틀을 언급하면서 “예술이 본격적으로 글로벌화된 것도 90년대다. 아티스트들은 미래를 바라보되, 과거에서 아이디어를 얻곤 한다. 패션도 마찬가지 경우다”라고 설명했다.
하이패션으로 보자면, 90년대 열풍의 주역은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였다. 니트 비니, 혹은 베레모를 쓴 채 지그재그 무늬의 메탈릭한 프롬 스커트를 입고 큼지막한 잠자리 안경으로 무장한 구찌의 ‘이름도 모르고 성별도 모호한’ 모델들은 90년대 ‘유스 무브먼트’의 시발지였 던 브루클린의 젊은 아티스트들의 모습, 그것이다. 90년대 후반 MTV에서 방영되어 ‘비딱한 청춘’의 시각적 대명사로 불리던 만화영화 <다리아>의 주인공과 꽤 싱크로율이 높은 생김새이기도 하다. 물론 구찌의 의상과 액세서리는 젊은이들이 엄두를 내지 못할 천문학적인 가격표를 달고 있지만, 정해진 방식이 없는 ‘탈법칙’의 스타일링만큼은 빈티지와 명품의 믹스에 눈 뜬 90년대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얼마 전 밀라노에서 열린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미켈레는 한발 더 나아가 뉴욕의 그라피티 아티스트 트러블 앤드루와 협업까지 했다. 앤드루는 그저 본인이 하고 싶어서 구찌의 GG 로고와 스냅챗 캐릭터를 닮은 유령 캐릭터, ‘구찌 고스트’를 그리던 그라피티 아티스트였고, 이를 발견한 미켈레가 러브콜을 보낸 것. 그라피티 역시 90년대 대중문화가 낳은 메가히트 상품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단순히 충동적인 협업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생로랑의 에디 슬리먼은 90년대 중반 청춘을 열광시킨 그런지와 포스트 록의 이미지를 컬렉션에 적극 차용하고 있다. 꽃무늬 베이비돌 드레스에 가죽 점퍼를 겹쳐 입거나, 가슴이 훤히 보이는 슬립 미니 드레스에 티아라를 쓴 생로랑의 여자들은 홀의 리더, 코트니 러브의 복제판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그뿐이 아니다. 다양한 버전의 슬립 드레스를 등장시킨 캘빈 클라인의 프랜시스코 코스타와 셀린의 피비 파일로의 컬렉션을 보면 무릎길이의 실크 드레스 차림(가끔은 위에 큼지막한 가죽 라이더 점퍼를 걸친)으로 파티를 누비던 90년대의 스타일 아이콘, 위노나 라이더나 케이트 모스의 리얼웨이 룩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패션 평론가들은 끌로에의 클레어 웨이트 켈러가 선보인 하늘거리는 레인보 스트라이프 팬츠에서 90년대의 유럽식 해변가 풍경을 찾아내기도 했다.
바잘리아를 비롯해 신진 디자이너들은 X세대의 자유로움과 에너지를 표현 하는 데 한창 열중하며 패션계의 축을 흔들고 있다. 스케이터 걸 스타일의 골반에 걸친 오버사이즈 데님(심지어 괴상하게 쭉쭉 찢어진)과 패치워크를 적극 응용하고 있는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 버섯과 아메바 프린트로 90년대의 클럽 신을 재해석한 팀 코펭, 90년대식 스트리트 웨어를 업그레이드해 쿠튀르 차원으로 승화시킨 코셰의 크리스텔 코셰와 RVDK의 로날트 판 데어 켐프까지, 90년대의 어떤 특성을 기본으로 브랜드의 DNA를 구성한 젊은 레이블은 너무나도 많다. 깃털 장식 전문이자 샤넬의 쿠튀르 공 방 중 하나로도 유명한 르 마리에의 아티스틱 디렉터도 겸하고 있는 크리스 텔 코셰는 “90년대에는 강렬한 아이덴티티를 지닌 디자이너들이 많았다. 마르지엘라, 앤트워프 식스, 마틴 싯봉, 헬무트 랭… 당시 디자이너들은 수익성보다 예술성을 먼저 고려했다”고 회상한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 젊은 뮤지션들도 90년대를 향하고 있다. 맥파이 스타일의 그라임스와 90년대 TV 시리즈 <인 리빙 컬러>의 플라이 걸스를 연상시키는 FKA 트위그스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9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래퍼 네네 체리의 딸, 마벨도 가세했다. 최근 첫 싱글 ‘노우 미 배러(Know Me Better)’를 발표한 마벨은 90년대생으로, 배꼽이 보이는 크롭트 톱에 보머 재킷을 걸치고 캘빈 클라인 로고가 보이는 속옷을 드러내는 로 슬링 데님 차림으로 등장했다. 리한나보다도 더 어리고 쿨해 보이는 이들이 등장하 면서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90년대가 쿨하다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파하는 것이다. MTV의 개국과 함께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전환된 후, 패션과 음악이 본격적으로 수혜를 주고받으며 친밀해지기 시작한 시기가 90년대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런 현상을 더 재미있게 관전할 수 있을 것이다.
- 에디터
- 최유경
- 포토그래퍼
- BEN GRIEME
- 모델
- LOTTIE HAYES AT SUPREME MANAGEMENT, SOFIA TESMENITSKAYA AT WILHELMINA MODELS
- 사진출처
- INDIGITAL
- 스타일링
- ALEX HARRINGTON
- 헤어
- TAMAS TUZES FOR BUMBLE AND BUMBLE AT L’ATELIER NYC,
- 메이크업
- JUNKO KIOKA FOR CHANEL AT JOE MANAGEMENT,
- 포토그래퍼 어시스턴트
- BRIAN KANAGAKI
-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
- MEGAN S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