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간 사랑'인 폴리아모리를 둘러싼 복잡하고도 단순한 문법에 대하여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내일의 사랑

2020-05-11T16:27:29+00:002020.05.14|FEATURE, 라이프|

어쩌면 내일 반가운 노크와 함께 우리에게 인사할지 모르는 새로운 사랑, 폴리아모리가 있다. ‘왜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싹튼 ‘다자간 사랑’인 폴리아모리를 둘러싼 복잡하고도 단순한 문법에 대하여.

‘본래 인간은 두 명이 등을 맞대고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지금의 인간보다 훨씬 강했다. 교만해진 인간은 신들을 공격했고, 제우스는 인간을 둘로 갈라놓았다. 결국 인간은 과거의 힘을 되찾으려고 평생 자신의 반쪽을 그리워하며 찾아다니게 됐다.’ 사랑에 대해 논하는 플라톤의 <향연>에 등장하는 한 대목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서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난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검은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할 반쪽을 찾아 헤맸고, 가끔은 영화 속 주인공 부럽지 않은 끈적한 로맨스를 틔웠으며, 욕설이 난무하는 문자 메시지를 나누며 상대와 다투다, 피의 복수에 버금가는 가스라이팅 결말을 맞이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참 전형적으로 산다’는 말이 나에게는 꼭 들어맞는 주석이다. 한편 부모님, 한 살 터울의 손위 남형제, 그리고 나로 이뤄진 소위 ‘4인 구성의 정상 가족’이라는 사회적 표본에 속하기도 한다. 다양한 각도에서 지금껏 내 삶에 놓였던 바둑돌을 하나하나 되짚어 헤아려도, 나는 통상적 사회 규범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가장 보통의 여자, 인간이다.

‘말하자면 그건, 나라는 존재가 5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지는 것 같은, 그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이장욱의 단편소설 <절반 이상의 하루오>에 등장하는 문장이자, 인생을 지탱하는 사고관에 불현듯 묘한 자국이 남겨질 때마다 입버릇처럼 인용하곤 하는 표현이다. 지난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사회의 기본 단위라 알려진 ‘가족’에 대한 나의 상상력은 전통적 혼인을 바탕으 로 형성된 관계에 국한해 머물러 있었다. 그렇기에 재작년 11SBS가 창사 특집으로 방영한 다큐멘터리 <나를 향한 빅퀘스천>을 통해 어쩌면 진보적이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이자 가족인 폴리아모리(Polyamory)의 사례를 접한 그때 가, 내게는 지금까지 굳게 믿고 있던 세계가 ‘5센티미터쯤 다른 세계로 옮겨진’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국내에서 다자간(多者間) 사랑이라고 풀이되는 폴리아모리는 ‘많은’을 뜻하는 그리스어 폴리(Poly)와 ‘사랑’을 뜻하는 라틴어 아모르(Amor)의 합성어 다. 일부일처제를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의 다양한 관계망을 인정하는 사랑이며, 한 사람이 여러 명을 사랑할 수 있음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상대(들)를 자신만의 소유물로서 바라보지 않는 비독점성, 상호 간의 합의와 규칙을 통해 자유분방한 사랑을 추구하는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다. 요즘 시대 가장 비일비재한 사랑의 형태이자 일대 일만의 관계를 추구하는 독점적 사랑, 즉 모노아모리(Monoamory)와는 한참이나 다른 무늬를 지닌, 새로운 사랑의 영토인 셈이다. 모노아모리의 정석 코스만을 밟고 자라온 내게 폴리아모리라는 낯선 퍼즐은 다큐멘터리 <나를 향한 빅퀘스천>의 출연자이자 폴리아모리를 실천 중인 네키의 단 몇 마디로 순식간에 봉합됐다. “이쪽이 저희 가족이에요. 여긴 제 파트너 캐서린이고요. 그리고 제 파트너 사라입니다. 우리는 폴리아모리 가족이에요.”

‘너만을 사랑해.’ 다수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약속한다. 물론 이러한 약속의 기저에는 상대 역시 ‘나만을 사랑하길’ 바라는 심리가 자리한다. 사랑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담은 책 <우리 사랑은 영원할까: 낭만적 사랑의 진화>에도 동시대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이라 여겨지는 독점적 사랑인 모노아모리에 관한 이 같은 언급이 등장한다. ‘사랑을 독점하려는 현상은 거의 모든 문화와 종족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질투는 사랑하는 이들이 원하든 아니든 거의 늘 동반되는 감정, 인간의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질투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상대를 소유하고, 독점하고, 질투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동시대 사회에서 여러 명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폴리아모리를 향한 시선은 퇴행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 다큐멘터리 <나를 향한 빅퀘스천>이 방영 된 직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폴리아모리에 회초리를 들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말의 잔치가 열렸다. ‘일종의 점잖은 간통 아닌가’, ‘두 쌍 이상의 부부가 배우자를 바꿔가며 섹스를 하는 스와핑과 무엇이 다른가’ 등등. 폴리아모리는 이기적이고 비윤리적인 사랑을 정당화하는 이론이며, 나아가 폴리아모리가 증가하면 건강한 사회가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랑에 관한 하찮은 경험칙을 가진 나 역시 폴리아모리를 둘러싼 언짢은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했다. 책과 모니터를 힐끗대며 폴리아모리를 접했기에, 다층다면적인 프랙탈로 이뤄진 폴리아모리를 납작하게 요약하고 말아버릴 가능성도 농후했다. 그런 나에게 폴리아모리의 복잡하고도 단순한 문법을 알려준 이는 취재를 통해 만난 YP다. 그들은 현재 폴리아모리를 실천 중이다. 우선 만 20세 여성 Y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고등학생 시절 Y는 조금은 특별한 경험을 맛봤다. “교실에서 친구들과 모 연예인의 불륜 뉴스를 접한 때였어요. 친구들은 불륜 남녀의 불륜 사실 자체에 분개했지만, 저는 둘의 관계가 기존 배우자를 상대로 충분히 합의되지 않았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기만적인 만남이었다는 점에서‘만’ 잘못됨을 느꼈거든요. 불륜 남녀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는 제게 아무런 정서적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친구들은 그런 저를 이상하게 바라봤죠. ‘아니, 화가 나지 않는다고?’라는 식으로 반문하면서 말이에요.” 이때부터 Y는 스스로가 도덕적으로 해이한 사람인지 고민해야 했다. 사랑은 고착화된 감정이 아니며, 나아가 한 사람이 여러 명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자신이 ‘비정상’인지 가려내기 위해 Y는 인터넷에 접속했고, 그렇게 폴리아모리라는 개념을 만나게 되었다. Y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드디어 저를 설명해줄 ‘이름’을 찾은 기분이었어요.” 현재 YA와 폴리아모리 연애를 이어가고 있다. 자신이 창작한 그림과 글을 업로드한 뒤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A는 유달리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배려심 넘치는 사람이었다. YA와 대화하며 점차 A가 사는 세계의 박자를 알아갔고, 마치 갑자기 터지는 재채기처럼, 순식간에 A를 상대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한 가지 문제는, A가 평생을 모노아모리로 살아왔다는 점이었다. “관계를 시작하기 전 A에게 제가 폴리아모리임을 ‘커밍아웃’하고 그 개념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어요. 이야기를 들은 A는 처음엔 괴로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 하다고 말했어요. 본인이 사랑하는 제가 누군가를 사랑하며 행복을 느낄 때 A도 마찬가지로 기쁠 것 같다고, 가능하다면 자신에게 소개해달라고 말했죠.” YA는 현재 1년째 풋풋한 사랑 을 이어가고 있다.

22세 남성인 P의 사랑은 보다 다층적이다. P는 현재 세 명의 상대와 폴리아모리 관계를 맺고 있다. 2018년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B 를 통해 첫 폴리아모리 연애를 시작한 P는, 이후 본가가 있는 대구에서 우연히 C를 만나며 또 다른 사랑을 키워갔다. B는 폴리아모리로서 K라는 상대와 3년 째 연애 중이며, C는 모노아모리로 P가 아닌 다른 상대와 어떠한 정서적, 성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대학교 연합 동아리에서 만난 폴리아모리 D와도 정기적으로 만나며 관계를 이어가고 있지만, 현재 D가 군복무 중인 관계로 PD와의 관계를 연애로 규정하진 않는다. B, C, D는 모두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제각각 P와 일 대일로 만나며 관계를 맺고 있다. P에게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 있다. 그는 인간의 가장 보편적 감정이자, 원하든 아니든 사랑과 늘 동반되는 감정인 ‘질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 “대개 폴리아모리는 상대에게 다양한 관계망을 솔직히 터놓다 보니 질투를 느끼지 않거나 소유욕이 없다는 오해를 받곤 해요. 하지만 폴리아모리가 느끼는 감정도 모노아모리가 느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종종 질투 자체가 상대와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때도 있죠. 가령 C와의 섹스에서 제 몸에 남겨진 키스 마크를 보고 B가 질투심을 토로했던 일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신체는 온전히 나의 것인 만큼 B를 상대로 제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도 있는 경우였지만, C 가 남긴 키스마크가 B와의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줄 정도로 질투심이나 불쾌함을 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에 B에게는 앞으로 그런 행위를 지양하겠다고 이야기했죠.” 슬기로운 폴리아모리 연애를 위해 P는 상대방들과 합의한 ‘규칙’을 공유하기도 한다. 첫째, 서로 간의 신뢰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거짓말하지 않기. 둘째, 상대에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할 필요성에서 자유롭기. 셋째, 상대들과 각각 맺는 관계가 ‘독립 사건’임을 인지하기. 물론 이러한 규칙은 지속적인 대화와 시행착오를 통해 끊임없이 수정될 여지가 열려 있다.

‘폴리아모리적 욕망이 향하는 것은 ‘여러 명’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사실 어떤 ‘자유로움’에 가깝다.’ 국내에서 폴리아모리를 실천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길라잡이라 불리는 책 <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에 등장하는 한 대목이다. 앞서 YP의 사례를 통해서도 살폈듯 폴리아모리는 단순히 여러 사람과 자유로운 섹스를 향유하기 위해 꺼내드는 선택적, 도피적 카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사랑하는 상대를 나만의 소유물로 바라보지 않고, 그럼으로써 상대를 온전한 주체로 존중하는 ‘사랑의 해방’에 가깝다. 나아가 혹자는 폴리아모리를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가 주창한 ‘합류적 사랑’을 대신하기에 가장 적합한 현대 사회의 사랑 형태라 말한다. 기든스가 주창한 합류적 사랑은 폴리아모리를 흥미롭게 풀어낸 손예진, 김주혁 주연의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원작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에도 등장한다. ‘합류적 사랑이란, 기든스에 의하면, 자기 자신을 타자에게 열어 보이는 것이다. 즉 서로 다른 정체성을 인정하고 사랑의 유대를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이루어가는 것이 합류적 사랑이다.’

현대로 오며 전통적 혈연관계가 아닌 자의적 선택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이데올로기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대중 매체를 통해 성의 공론 화가 이뤄지며 ‘어쩌면 내일 우리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90~2000년대 서구권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부상한 폴리아모리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폴리아모리를 요즘 시대에 깜짝 등장한 ‘현대 사회의 발명품’쯤으로 이해해선 곤란하다. 시계를 과거로 되돌려 1929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즘 저서로 알려진 <제2의 성>의 저자이자 사회 운동가인 시몬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사상가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와 함께 동시대 폴리아모리라고 해석되는 ‘결혼 계약’을 맺는다. 계약 조건은 이러하다. 첫째, 서로 사랑하는 동시에 우연히 찾아온 사랑도 인정한다. 둘째, 그에 대해 거짓말 하지 않는다. 셋째, 경제적으로 독립한다. 당시 시대상에 비춰봤을 때 보부아르와  르트르의 결혼은 논쟁적이고 파격적이기 그지없었지만 그들은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서로의 주체성을 인정하며 무탈하게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어느 문화권이나 마찬가지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폴리아모리는 ‘좌충우돌’의 시간을 통과하는 중이다. 폴리아모리를 다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영화, 책 등을 통해 대중에게 그 개념이 조금씩 가시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서 폴리아모리가 넘어야만 할 돌부리는 숱하게 존재한다. 20143월 국회의원 진선미가 발의한 ‘생활동반자관계에 관한 법률안’에서는 ‘사회 환경, 문화, 인식의 변화에 따라 기존 혈연 및 혼인 관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형태의 생활동반자관계가 등장하고 있음’을 들어 폴리아모리를 비롯해 ‘법 밖의 가족’을 제도적으로 보호할 방안을 모색하지만 정상 사회를 파괴한다는 비난에 직면하며 아쉽게도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하지만 다수의 폴리아모리에게는 이러한 제도적 공백보다 ‘정상’이라는 폭력적 잣대를 빌려 폴리아모리를 납작하게 재단하고 검열하려는 사회적 시선이 보다 ‘큰 산 옆의 더 큰 산’처럼 치환되지 않을까? 가족학자 스테파니 쿤츠(Stephanie Coontz)는 말한다. ‘미래에 우리는 지금까지 맺고 있는 관계보다 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내일 우리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폴리아모리에게 반가운 ‘노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는 폴리아모리 한다>에 등장하는 한 구절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폴리아모리는 횡단하는 사랑이며, 그 자체로 자연된 사랑이다. 어차피 우리는 사랑하고 있고, 사랑하게 되어 있다. 올바른 사랑을 찾으려 형이상학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마주한 강렬함을 그 자체로 기쁘게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