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rigi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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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들이 영감의 소재가 되는 지금, 달리 말하면 누군가와 무언가를 따라 하고 베끼기 위한 재료가 널려 있는 이 시대에, 오로지 하나뿐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관습과 룰을 깨려는 의지는 기본이다. 강력한 스타일 감각도 나쁘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의미 있는 관점을 지녔는가 하는 것이다. 오리지널낼리티를 지닌 인물이라면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하는 단계든 무르익어 클래식이 됐든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각자의 분야에서, 혹은 분야를 넘나들며 두드러진 고유함을 보이는 이들을 만났다. 그 이름 자체로 브랜드가 됐거나 될 예정인 이들의 감성과 이성을 주목한다.

의상 모두 본인 소장품.

Willow Smith 윌로 스미스 음악가, 배우

윌로 스미스는 어디서나 발견됐다. 파격적인 드레드 헤어 차림으로 참가한 샤넬의 2016 F/W 패션쇼에서는 칼 라거펠트와 어깨를 맞대며 전 세계의 취재진을 맞이했고, 작년 어느 가을날엔 런던 튜브의 센트럴 라인에서 기타 한 대를 둘러멘 채 게릴라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2007년 영화 <나는 전설이다>로 데뷔한 이후 2015년 제이지가 설립한 힙합 레이블 ‘락 네이션’에서 싱글 음반 ‘Whip My Hair’를 발매하며 가수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윌로 스미스는 잘 알려져 있듯 배우 윌 스미스의 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든든한 아빠를 둔 ‘누군가의 딸’이기보다 단지 윌로 스미스인, 다시 말해 그녀만의 오리지낼리티를 통해 세상에 영감을 던지는 이 시대의 뮤즈다.

누군가 ‘오리지널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나? 당신이 바로 그런 존재 같은데. 오리지낼리티의 다른 말은, 새로운 관점으로 생각하고 꿋꿋이 의견을 지키는 능력,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사례를 보여주면서 고양시키는 능력이다. 항상 다른 사람들과 내가 많이 다르다고 느껴왔다. 주변 사람들과 사이가 소원하다고 느낀 적도 많은데, 어렸을 때부터 우주와 역사 등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 이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친구 부모님이 내가 아이들을 겁준다고 말했을 정도다(웃음). 물론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는 말을 좀 부드럽게 해야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리지낼리티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오리지낼리티가 자신의 삶에서 의미하는 바를 두려워한다는 걸 알게 되었달까.

아주 어린 시절에도 완성된 모습을 갖춘, 세련된 사람이었나 보다.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어릴 때 아빠와 이런 게임을 자주 했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믿는 걸 찾은 뒤에 계속해서 물었다. “왜죠? 왜 그런 사실을 믿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왜 그런 거예요?” 아빠는 설명해주려고 애쓰셨지만, 나는 항상 내 방식대로 겹겹이 정보를 캐내고 싶었다. 그 게임이 지금까지도 내가 생각하는 방식을 형성해준 것 같기도 하다.

어릴 적 엄마의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어본 적이 있는가? 지금의 엄마는 아주 여성적인 사람이다. 반면 나는 높은 힐이나 메이크업에 딱히 관심이 없지만. 하지만 ‘톰보이’나 다름 없던 엄마의 젊은 시절은 남자 옷, 여자 옷을 구분하지 않고 옷을 입는 지금의 내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줬다. 그녀는 영화 〈와일드 블랙〉의 등장인물인 피치스처럼 입었다. 배기 진과 티셔츠를 즐겨 입었는데, 그게 바로 요즘 엄청 뜨고 있는 1990년대 보이시 룩이다. 엄마가 그런 옷을 입었던 시절은 아마 내게 영원히 영감을 안겨줄 거다.

평소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가? 영화 <씬 시티>를 정말 좋아해서 패션 행사장에 갈 때는 <씬 시티>에 나오는 여성 인물처럼 입으려고 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두운 색으로 차려 입고, 닥터마틴 부츠를 신은 후에는 막스마라의 오버사이즈 트렌치코트를 걸친다.

어린 시절 남자 형제들처럼 입고 싶었던 적은 없는가? 완전히! 친오빠 제이든이 하는 거라면 뭐든 하고 싶어 했다. 제이든처럼 입고, 제이든처럼 되고, 제이든과 같이 놀았다. 그런 데 남자 형제들은 자기들만의 시간을 원하더라. 제이든도 자기 나름대로 남자애들의 미친 짓거리에서 날 지켜주려고 애쓴 것 같다.

오리지낼리티를 가졌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가수 아니 디프랑코(Ani DiFranco). 이제는 세상을 떠나 우리 곁에 없지만, 소설가 옥타비아 버틀러(Octavia Butler)도 자신 만의 오리지낼리티를 가진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엄마와 아빠.

아빠인 윌 스미스의 인스타그램이 매우 인상적인데. 그렇지. 아빠는 제이든과 내가 인스타그램에서 젊은 친구들과 어떻게 연결되는 지 보고서는 멋진 비디오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말 그대로 인스타그램에 1인 방송국을 하나 가지고 있는 셈이다. 난 아빠의 크리에이티브함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한편으로 소셜미디어는 왠지 조심스럽다. 인스타그램에는 우리의 정신을 배반하는 것들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내가 귀엽게 나온 사진만 포스팅하기는 싫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영감의 원천이 되고 싶다. 예를 들면 지금 읽고 있는 책, 나누고 싶은 아이디어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스스로 오리지낼리티를 가진 사람이라 생각 하나? 겁 없이 대담하려고 애쓴다. ‘오리지널’ 들은 두려움이 없잖나? 그리고 세계를 변화시키길 원한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점프슈트와 백은 펜디 제품, 액세서리는 본인 소장품.

Chloë Sevigny 클로에 세비니 배우

사진가 래리 클라크가 1990년대 초 영화 데뷔작을 만들며 10대의 클로에 세비니를 발견한 이후, 세비니는 언제나 뉴욕 다운타운의 ‘잇 걸’이자 ‘쿨 걸’이면서 인디계의 뮤즈였다. 아카데미도, 독립 영화 시상식도 그녀를 찾았다.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로 여기는 그녀는 작가주의 작품을 늘 바라보면서도 패션계의 러브콜에 응하거나 디자이너에 도전하는 등 클로에 세비니라는 고유의 색채를 유지하고 키워왔다.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가 연출을 맡은 HBO 드라마 <We Are Who We Are>가 올해 방영할 예정이다. 그와는 어떻게 만났나? 언젠가 칸에서 떠들썩한 숙취 해소용 점심으로 치킨 텐더를 함께 먹었다. 그때 집에 불이 나는 듯한 속도로 빨리 친해졌다. 서로 겹치는 친구가 많고, 생각이나 태도도 비슷하다. 성장물은 내가 좋아하는 장르다. 루카와 함께한 드라마 프로젝트는 10대의 이야기인데, 이젠 내가 부모 역할을 맡는다.

당신의 과거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아나도록 하는 뉴욕의 동네가 있나?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 갈 때마다 신에게 맹세하건대 현기증에 시달린다. 10대 때 정말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고, 거기 있다가 래리 클라크가 준비하던 영화 <키즈>에 캐스팅됐다. <Sassy> 매거진이 나를 발견한 장소도 그곳이지. 인격이 형성되던 시기에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으니, 그곳에만 가면 여전히 감상에 젖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뉴욕이 더 나쁜 방향으로 변했다고 생각하나? 모두가 뉴욕에 대해 불평 하는 점들이 뉴욕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을 통해 세계가 예전보다 훨씬 더 작아지면서, ‘다른 곳에 없는 걸 찾으러 뉴욕에 가겠어’라고 결심하게 만드는 특별함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점이 애석하다.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든 독창적인 영화 <키즈>는 개봉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영향력은 여전하다. <키즈>가 지금 개봉해도 과거처럼 반응이 양극단으로 나뉠까? 요즘 그런 영화를 개봉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정말 통속적인 작품이라서. 몇 년 전에 개봉 20주 년을 맞아 <키즈>를 다시 봤는데, 충격적이었다. <키즈>는 내 모든 것을 바꿔준 영화다. 그 작품이 있어서 이후 작가주의 감독들과 일할 수 있었고, 그게 바로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 다.

당신을 가장 두려움에 떨게 한 배역은? 영국 드라마 <히트 앤 미스(Hit & Miss)>에서 맡은 트랜스젠더 청부살인업자. 그런 역은 다시 맡지 않을 것 같다. LGBTQ 커뮤니티에 큰 책임감을 느꼈다. 악센트를 익히거나 보철물을 착용하고 총 사용법도 익히는 등 도전할 게 많은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패션에 영감을 준 인물은? 대체로 주변에서 흥미로워 보이는 아이들. 요즘도 마찬가지다. 큰오빠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오빠는 펑크와 하드코어, 힙합 신에 푹 빠져 있었다. 오빠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것들을 덕분에 접했다.

누가 오리지널한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친구이자 내 스타일링을 자주 해주는 헤일리 울렌스(Haley Wollens). 완벽함과 최고 그 자체다. 배우 틸다 스윈턴은 항상 멋져 보인다. 자기만의 일을 한다는 점에서 아주 존경한다.

인스타그램이 패션을 바꾸고 오리지널함의 개념을 변화시켰다고 느끼나? 작년 여름에 해변에서 핑크색 머리를 한 여자애를 본 기억이 난다. 이제는 핑크색 머리 같은 게 꼭 얼터너티브하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 아이는 마일리 사이러스에 푹 빠져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SNS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은 관심사를 정하는 데 오히려 혼란을 일으킨다. 지금은 모든 게 유행처럼 보일 뿐이다. 진정성 있는 건 어디에도 없는 시대 같다. 아니면 그런 현상 자체가 곧 진정성인 셈일까? 잘 모르겠다.

블레이저와 팬츠는 마르니 제품, 톱은 본인 소장품.

Alex Katz 알렉스 카츠 화가

구상과 추상, 전통과 아방가르드를 넘나들며 독창적인 회화 스타일을 구축한 화가 알렉스 카츠의 나이는 올해로 만 92세. 매일 아침 730분에 기상해 운동을 마친 후 뉴욕 소호에 위치한 작업실로 향하는 노장은 평소 아이폰으로 촬영한 인물 사진을 바탕으로 캔버스 작업을 이어간다. 대형 화면에 과감하게 자리 잡은 인물 초상은 그만의 독창적 ‘브랜드’가 되었고, 시대를 초월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1960년대부터 뉴욕 소호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직도 소호에 남아 있는 유일한 아티스트인 것처럼 느끼는가? 그동안의 변화를 어떻게 지켜보았나? 글쎄, 땅을 살 만한 돈으로 건물을 샀지. 소호는 공장 지대의 슬럼 같았다. 길가에는 종이와 모피 쓰레기가 굴러다녔고. 많은 건물이 창고로 쓰였으며, 브로드웨이 쪽에 있는 의류 산업 관련 시설이었다. 건물을 구했을 때는 사람들이 항상 아티스트 주변으로 몰려든다는 걸 알았다. 아마 소호에 이렇게 오래 머문 사람은 내가 유일한 것 같다. 알다시피 내가 나이가 참 많거든.

구상미술에 대한 미술계의 태도가 긴 시간에 걸쳐 변하는 것을 확실히 지켜보았겠다. 1950년대에는 심지어 내 아내인 에이다마저 명민한 화가라면 추상을 그려야 한다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거기엔 도무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나는 춤추고 농구 하는 걸 좋아했는데, 나이 든 아티스트들은 실존주의를 좋아했다. 내가 보기엔 크기가 큰 구상 회화는 흥미로운 게 없었고, 그래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영역이었다.

추상표현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당신이 거대한 스케일의 작업을 시작한 중요한 이유였다.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전시 오프닝에 온 추상표현주의 아티스트 친구들은 갤러리에 들어서지도 않았다. “이따 바에서 만나지” 라는 말만 하러 들렀다. 나를 진지하게 받아 들이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 “당신들보다는 내가 더 끈기가 있어.”

아직도 그런 경쟁을 느끼는가? 그렇다. 그건 절대 멈추는 법이 없다. 친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잘하셨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불안해서 그런 거였다. 아버지는 내게 불안함과 추진력을 물려주셨다.

자신에 대해 불안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맞다, 회화에 대해서는 그렇다.

창의력의 돌파구가 된 순간이나 작업이 있는가? 사람들은 내가 평면에 구상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라고 말한다. 빌렘 데 쿠닝이 특히 그런 작업을 좋아했고, 필립 거스턴도 내게 연락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도 마찬가지였고. 충격적이었다. 시인들도 내가 그린 작업을 좋아했다. 그들 모두 정말 대단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내가 잘하고 있고 다들 날 따를 거라고 느꼈다. 하지만 안 좋은 리뷰도 정말 많이 받았다. 당시 타임지의 미술 평론가였던 밥 휴즈가 나를 정말 열 받게 만든 적도 있거든. 나를 ‘지식인들을 위한 노먼 록웰(잡지 표지 작업으로 유명한 화가 겸 일러스트레이터)’이라고 불렀지. 하지만 최악의 리뷰는 뉴욕 타임스에 글을 쓰던 평론가 힐튼 크레이머가 남겼다. 내가 어떻게 방향을 상실했는지, 내 그림이 어떻게 정신적으로 타락했는지 말이다. 어머니께 전화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오, 이제야 누군가 너한테 관심을 보이는구나!”

대중 역시 부정적 반응으로 일관했는가? 아방가르드 작업을 보여주는 갤러리에서 내가 처음으로 그린 회화 작업을 전시했을 때 나이 든 아티스트 한 명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구상 회화는 시대에 뒤떨어졌어.” 나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끝내주네요.” 갤러리에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 적이 두 번 있었고. 1960년 프로빈스타운에서, 또 1975년 파리에서였는데 나는 오히려 갤러리스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내 그림이 꽤 상냥하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합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말하더군.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당신을 여기 데려온 거다.” 대중과 관계를 맺으려 애쓰던 시절이었다.

스타일을 찾아내기 위해 1950년대에 그린 1000개에 달하는 그림을 폐기했다. 후회는 없는가? 전혀. 그림을 벽난로 장작으로 쓰곤 했지. 28번가에 살았는데, 내가 불법으로 집에 욕조를 달았다. 벽난로 근처에 욕조를 두었고, 목욕하면서 그림을 벽난로에 넣고 태우면 따뜻하게 몸을 데우면서 몸을 말릴 수 있었다. 당시에 엄청나게 많은 실험을 진행 중이었다. 어떤 그림은 괜찮았고, 다른 그림은 아니었지. 나는 테크닉이 꽤 좋은 편이다. 그림을 1000개나 불태운 덕분이지.

당신이 패션과 맺는 관계를 알려달라. 패션은 항상 멋져 보였다. 나는 늘 주트 슈트(Zoot Suit)를 입곤 했다. 패션과 관련된 것이 미술 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 흥미롭지만, 이런 점은 의복이 어떻게 미국을 사회적으로 규정하는지와도 관계가 있다.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따라 서로를 판단하는 거다.

오랜 시간 아내 에이다를 그려왔다. 아내를 묘사하는 스타일에는 변화를 주었는가? 오, 맞다, 완전히 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에는 보통의 미인 같았다. 그러니까, 아내 대신 다른 여성 열 명을 그 자리에 놓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얼굴이 더 명확해지고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최근엔 종이를 잘라서 에이다의 등을 묘사하는 조각을 만들기도 했다.

회화 작업에 쓸 사진을 아이폰으로 촬영하기 시작했는데. 그렇다. 제스처를 사진으로 찍을 때 아이폰을 쓴다. 드로잉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제스처를 얻어낼 수 있거든. 작업의 속도를 높여준다.

일주일 내내 작업한다.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는가? 팔굽혀펴기 300번과 윗몸일으키기 200번, 마지막으로 스트레칭을 한다. 그런 뒤엔 밖에 나가서 러닝을 한다. 오전 730 분에 일어나서 작업실에는 930분이나 10시까지 가려고 한다.

오리지낼리티를 가졌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지크마어 폴케(Sigmar Polke). 유일무이한 아티스트이고, 정말 대단한 화가다.

당신에게 오리지낼리티의 의미는 무엇인가? 뭔가 새로운 것,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술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검은색 점프슈트는 보테가 베네타 제품.

J-Black 제이블랙 댄서

노래 잘하는 가수와 노래로 감탄을 자아내는 가수가 조금 다르듯, 춤을 업으로 삼은 댄서들도 그렇다. 제이블랙이 움직일 때면 독립적이고도 기묘하게 움직이는 관절 같은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여유와 숙련과 파워가 묻어난다. 그는 월드 클래스라고 해도 손색없는 춤꾼이다. 카리스마 있는 힙합 댄스를 추다가도 이내 또 다른 여성 자아인 제이핑크로 돌연해 손가락의 각도와 눈짓마저 달라질 수 있는, 한국의 유일무이한 캐릭터다.

댄서와 안무가는 어떻게 다른가? 비슷한 것 같지만 상당히 다른 성격이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공연을 하거나 레슨 활동을 하는 점은 비슷하지만, 내 춤을 내가 추느냐 남에게 주느냐의 차이가 있다. 나는 내가 짠 안무를 남에게 주고픈 마음이 별로 없다. 내 춤은 내가 추는 게 제일 예쁘고 멋지다고 생각해서.

이 세상 ‘몸치’들 중에서는 단지 춤에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억압된 면 때문에 몸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거다. 신체를 자유자재로 표현하고 컨트롤하며 살 수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 억압과 춤의 관계, 상당히 공감한다. 나도 군 전역 후 춤추는 길로 접어들었을 때 자유를 제한당하며 사는 것 같은 답답한 감정을 안고 있었다. 원체 나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성격이었다. 그러다 가족처럼 동고동락하며 지낸 팀이 해체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말 그대로 눈앞이 깜깜해지니까 어느 순간부터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더라. 막말로 ‘춤추다 죽어 버려야지’라고 생각하는 지경이 됐다. 그 분노의 감정을 안고 나간 댄스 대회에서, 평생 처음 겪는 경험을 했다. 비로소 날 깨버린 기분이 들었달까? 무대 위에서 춤이 아니라 생 난리를 쳤던 것 같다. 그렇게 한 번 깨버린 이후로 성격도 내 춤도 많이 바뀌었다.

스트리트 댄서 활동을 하다가, 2015년 가수 신세하의 ‘내일이 매일’ 뮤직비디오에서 힐을 신고 여장한 채 섹시한 춤을 췄다. 여성의 자아로 춤추는 제이핑크는 어떻게 태어났나? 존 테 모닝이라는 댄서가 몸에 붙는 보디슈트에 힐 차림으로 춤추는 영상을 우연히 봤다. 친구가 보고 있길래 저렇게 거북스러운 걸 왜 보나 했는데, 이상하게 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영상을 계속 찾아보다가 직접 배우고 싶어서 한동안 개인 레슨도 받았다. 그 시간을 통해 뭔가를 깨부순 경험을 또 한 번 했다. 처음엔 힐을 신고 걷는 연습만 계속 했다. 어느 정도 감을 익히고 나선 힐을 신고 제이블랙 식의 힙합 춤을 추는 연습도 하면서. 내 몸의 밸런스를 기억하기 위해 춤추지 않을 때도 연습실에서 힐을 신고 다녔다.

당신의 커리어가 성장하거나 비약하게 된 계기가 있나? 아무래도 2015년 방송한 Mnet 〈댄싱 9> 출연이다. 힐을 신은 채 춤추는, 나를 깨고 넘어선 경험으로 안무를 짜서 나갔다. 나는 댄서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통상적으로 하지 않는 일을 하고 사는 편이다. 예를 들면 공연 중에서도 올림픽 오프닝 무대나 규모가 큰 성격의 무대, 대중 매체와 관련이 있는 무대에 서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 그만큼 미디어 노출 빈도도 잦다.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댄서의 오리지낼리티는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본능에 집착하는 게 중요하다. 사회생활과 후천적 교육 속에서 누구나 알게 모르게 어떤 틀이 생겨버린다. 어떤 분야든 예술을 하는 인간이라면 그 틀을 조금이라도 깨야 하고, 그 방법 중 하나가 본능에 집중하는 일이다. 퍼포머라면 일상에서 하지 못하고 할 수 없는 것을 무대 위에서는 얼마든지 해도 된다고 여겨야 한다. 나는 무대 위에서 여자도 되고, 좀비도 된다. 평소라면 유치해 보일 수 있는 행위도 무대 위에서는 결코 유치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이다.

제이블랙은 오리지널한 존재인가? 글쎄, 나는 사실 모방을 많이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살면서 언젠가 봤던 많은 것이 무의식에 저장되었을 거다. 그 모든 인생 경험의 집합체가 지금 나라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알려진 이후, 내가 대단히 독보적인 존재처럼 군다며 시기와 질투의 시선을 좀 받았다. 나는 분명 잘하고 프라이드가 있는 댄서지만, 스스로 내가 최고이고 내가 오리지널이라고 내세운 적은 없다. 다만 댄서로서 소위 빵 터뜨린 게 내가 처음일 뿐이다.

그럼 누가 오리지널한가? 마이클 잭슨. 그를 좇거나 자기화한 사람은 여태 많았지만, 마이클 잭슨은 마이클 잭슨밖에 없다. 그는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는 춤과 동작과 동선과 캐릭터를 지녔던 사람이다.

창의적인 춤을 위해서는 남과 다른, 그리고 과거의 나와 다른 안무를 꾀하는 게 중요하나? 똑같은 춤과 동작을 자꾸 하게 돼도 나는 크게 신경 안 쓴다. 특이한 동작 하나보다 중요한 건 퀄리티다. 같은 동작이라도 수없이 반복하면 퀄리티가 달라진다. 춤이란 동작 자체 보다 그 동작을 멋있게 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팔 하나를 뻗을 때도, 클럽에서 모두가 추고 있는 춤을 따라 출 때도, 누구는 멋진데 누구는 덜 멋지다. 이건 춤만이 아니라 다른 일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다. 퀄리티가 중요하다는 것.

춤은 몸을 쓰는 일이고, 몸은 신체 나이와 같은 시간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얼마나 오래 춤추길 바라나? 테디 단이라는 일본의 유명한 댄서가 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아마 60대 초중반까지도 공연한 거로 안다. 그분이 춤추는 걸 보는데, 나를 비롯해 지켜보던 몇몇이 울었다. 그냥 설렁설렁 추는 순간이었는데도 동작의 느낌이 달랐다. 내가 죽기 전 마지막 기억이 무대 위의 나를 보며 사람들이 환호하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그 무대 위에서 댄서이자 아내인 마리와 함께 춤추고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시어한 퍼프 소매 드레스와 벨트는 알렉산더 매퀸 제품.

Lim Kim 림 킴 음악가

일말의 타협을 불허하며 토해낸 ‘배출’과 다름없는 작업이었다. 모닥불처럼 무해하기 그지없는 위로를 건네는 콘텐츠가 주류인 시대에, 이미 종말하고 말았으리라 여겨지던 치열한 자기 투쟁, 나아가 어떤 살기마저 도사린 음악이었다. 2016년 이후 3년 만에 발매한 복귀작이자, 작년 뮤지션 림 킴이 세상에 던진 두 장의 음반 <SAL-KI>와 <GENERASIAN>에 달고 싶은 주석이다. 여성에게 씌워진 불공평의 프레임, 개개인의 오리지낼리티를 부정하는 시대를 향해 기꺼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 줄 아는 림 킴은 노래 ‘Sal-Ki’를 통해 말한다. ‘더 이상 침묵하지 마. 이제는 판을 뒤바꿔야 할 때야’.

2016년 소속사와의 계약이 만료된 이후 3년 가까이 두문불출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당시 어떤 시간을 통과하며 지냈나? 혼자 음악 작업에 몰두한 시간이었다. 기존의 음악 산업에 속해 있으면서 숱하게 들어온 ‘안 된다’라는 대답을 ‘된다’로 실현시키는 시간이기도 했다. 20대에 접어들며 느낀 것,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던 것을 실타래 풀듯 하나씩 실험하는 시간에 가까웠을 거다.

작년 <SAL-KI>와 <GENERASIAN>이 발 매된 직후 쏟아진 말을 기억하나? 하나의 ‘현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대중의 온도차 가 극명했다. 반응이 양극단을 달릴 거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짐작했다. 공격적인 리뷰가 생각보다 적어서 오히려 놀랐지(웃음). ‘각성 하고 돌아온 캡틴 마블 같다’는 댓글도 봤다.

‘발사’에 가까울 정도로 공격적인 랩을 내뱉으며 동양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말했다. 여성을 외친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여성에 국한하기보다 이 사회에서 ‘불가능’이라 분류되는 문제가 그토록 많은 이유가 무엇인지 답답해하며 시작한 작업이었다. 오히려 사회의 다양한 고정관념을 향해 ‘잘못됐다’고 단호히 말하면서 개인을 강조하고, 여성이든 남성이든 저 마다 할 수 있는 것이 다르며, 각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에 가까웠지. 사실 두 작업에 응축된 정서와는 다르게 평소 쉽게 흥분하거나 감정적이지는 않다. 다만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당시 표현하고자 했던 바가 번번이 가로막혔고, 그런 사건들이 응축되면서 굉장히 극적인, 밀도 높은 음악이 탄생한 것 같다.

스스로 오리지낼리티를 가진 사람이라 생각 하나? 그러려고 노력한다. 지난날의 선택이 쌓여 지금이 만들어진다고 믿는 편이다. 문제는 선택을 내려야만 할 때 너무나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대중의 눈치를 보며 대중이 좋아하리라 생각되는 길을 따르거나, 자신을 의심하며 후회스러운 선택을 내리기보다 줏대를 지키며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고유한 시각이나 색깔이 만들어질 테고.

시대를 초월해 당신에게 룰을 깨도 좋다고 알려준 사람은 누구인가? 사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하고 싶은 것은 기어코 하면서 사는 스타일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을 때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흔하고 쉬운 선택을 따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것을 창조해온 사람을 지지하게 된다. 내게는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이 그런 존재다.

디지털을 어떻게 활용하나? 디지털이 당신이 하는 일의 개념이나 스타일을 바꿨다고 생각하나? ‘완전히’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SALKI>와 <GENERASIAN>의 작업은 99% 디지털로 진행했다. 두 작업을 함께한 프로듀서는 그의 사운드 클라우드 계정을 통해 연락처를 알게 됐고, 나머지 스태프는 SNS의 다이렉트 메시지로 처음 인사를 나눴다. 두 음반 모두 합창단을 제외하고 전부 디지털 악기로 작업했는데, 심지어 합창단도 다이렉트 메시지로 연락했을 정도다(웃음). 한 편으로 사람들은 오히려 인터넷상에서 솔직하다는 생각도 든다. 좋든 나쁘든 익명의 세상이기 때문에 ‘사실 난 이런 걸 좋아해’라고 맘껏 표현할 수 있고. 작업을 위해 스태프를 찾을 때도 그런 지점이 가장 와닿는 사람에게 눈길이 가더라. 그리고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는 림 킴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웃음).

의상 모두 본인 소장품.

Rhii Jewyo 이주요 미술가

작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복판, 갈 곳 잃은 예술 작품이 한데 모인 거대한 창고가 들어섰다. ‘올해의 작가상 2019’의 최종 수상자로 호명된 이주요의 ‘Love your depot’다. 향후 작가가 실제로 구현하고자 하는 미술관의 창고 시스템인 ‘Love your depot’는 작품을 보관하는 창고, 작가 10명으로 구성된 콘텐츠 연구소인 ‘팀 디포’, 방송을 송출할 수 있는 미디어 플랫폼인 ‘랩’으로 구성된다. ‘살아 있는 창고’이자 ‘예술 작품의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라 번역할 수 있는 ‘Love your depot’는 철저히 예술가만이 가진 순수한 힘을 믿으며, 그들의 연대가 가능하도록 만든 유토피아와 다름없다.

‘올해의 작가상 2019’의 수상자로 호명되며 당신은 이런 말을 남겼다.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매번 아트 버튼을 눌렀다’. 삶을 예술에 내던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단지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참는 거다. 예술은 나의 많은 것을 내어줘야 하며, 더불어 예술이 아닌 다른 것을 원하는 순간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젊은 시절 불현듯 알게 됐다. 이후로는 예술을 하기 위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을 살았다. 없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예술의 길을 갈 수 없고, 가더라도 계속해서 불행해지니까.

더불어 그러한 삶이 ‘Good Life’라고 덧붙인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고단하다고 해서 좋은 삶이 아닌 것은 아니다. 반대로 편안하다고 좋은 삶도 아니다. 내가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는 것, 한 가지만 원하고 잘할 수 있었다는 것, 지금도 재미있다는 것, 할 수만 있다면 계속해서 하겠다는 것의 끝에는 좋은 삶이 있다.

이전까지 한 개인으로서 일상에서 겪는 불안과 두려움을 작품으로 옮겼다면, 작년 <올해 의 작가상 2019>전에서는 공공을 위한 창고 시스템인 ‘Love your depot’(2019)를 고안했다. 작업의 내용이 개인에서 공동체로 확장한 듯 보인다. 사적인 작품에 임할 때는,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상태를 계속 밀고 나가면서 그것이 최종으로 가 닿는 지점에서도 결코 말로 설명되지 않는 상태에 있으려고 노력한다. 비평가나 관중이 갑자기 말을 던지기도 하지만 스스로 내 작품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굉장히 많다. 그렇기에 가능한 한 말을 아끼는 편이고. 반면 ‘Love your depot’의 목표는 굉장히 명확했다. 작품을 통해 제안한 새로운 창고 시스템이 실제로 구현되기 위해선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그들에게 열심히 설명해 공감을 얻어야만 했다. ‘Love your depot’가 단순히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거기에 머문다면 어떠한 예술적 연대도 만들어질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전까지는 내가 절대로 하지 않은 방식을 택한 것이다.

연대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예술가는 굉장히 강한 존재들이다. 그러한 예술가의 힘이 흩어지지 않고 잘 모였을 때 비로소 세상은 바뀐다. ‘발언’이 가능한 직업이 바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직접 시위에 나서지 않더라도 굉장히 구체적이고 창의적으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고, 이를 항상 드러낼 수 있는 전시회라는 굳건한 매체가 있다. 하지만 우연이 작용하지 않는 한 제도로서 예술가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정책의 한 귀퉁이에 예술가에게 생활비를 마련하는 등 복지 제도가 생겨나고 있지만 여전히 젊은 작가들이 처한 현실은 ‘쓰다’. 짧기 그지없는 전시 기간 동안 열심히 작품을 준비했다가 폐기 하는 경험을 10번 넘게 하면, 작가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굉장히 근본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예술을 사랑해 시작했지만 너무나 쓰라린 경험만 남게 되는 거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떠나도록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것인가. ‘Love your depot’는 이러한 문제를 단지 테이블에 올려보는 시도였지만, 그 자체가 사실은 중요한 것 같다. 누군가 이러한 사례 가 있었다는 것을 찾아보고, 이를 이어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전시가 개막하며 ‘개인 작가가 이 지경에 처하기까지 대체 미술관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식의 제도 비평이 나오기도 했다. 오랜 시간 해외를 순회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지 않았나. 막상 한국에 들어와 보니 한국 사회에 편재한 문제가 눈에 들어오진 않았나? 어릴 때부터 미술을 워낙 좋아해 배우기 시작 했고, 결국 유학길에 올랐는데, 해외에서 작가 활동을 하며 느낀 점은 미술의 역사가 나와는 너무 상관없다는 것, 그들만의 역사이자 그들 만의 리그였다는 사실이다. 이전까지는 모든 문제가 인종에서 출발했거든. 그런데 막상 한국에 들어와 이곳을 들여다보니 모든 문제의 중심에 ‘젠더’가 있더라. 인종 문제가 사라지니까 다시 유리 천장을 마주한 셈이었다(웃음). 실용적으로 자식을 먹여 살리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제도권에는 모두 남자 작가가 포진해 있다. 남성들 서로에게 기회를 나눠주고 남은 영역은 여자들 너희가 차지하라는 식이었지. 명예직에 유독 여성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에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한다고 해서 그 영예가 삶과 이어지지 않는다. 전시가 끝나면 빚을 져야 한다. 굉장히 슬픈 현실이지.

‘오리지낼리티’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어려운 질문이다. 유학을 하며 미술의 역사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에게 절실한 것’을 해나갔던 것 같다. 기본적으로 나는 항상 작고 매일 아팠기 때문에 ‘약함’에 대해 오래 천착해왔다. 그러한 나만의 절실함을 열심히 들여다봤기에 어찌 보면 오리지낼리티에 가까워진 것 같다. 페트병과 양초, 젖은 수건 같은 일상적 사물을 재활용하여 가습기를 형상화한 설치 작업을 할 때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쟤는 좀 다른 것을 하긴 한다’고 말했거든. 당시는 1990년대 후반이었으니까, 내가 절실하다고 느끼는 것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한국에서는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스스로 ‘오리지낼리티’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잘은 몰라도, 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아름답다고 환호하기 힘든 것을 만들어왔지.

당신에게 룰을 깨도 좋다고 알려준 사람은 누구인가? 네덜란드 조각가 헨크 비스(Henk Visch). 그는 항상 ‘나는 어린아이야. 내가 갖고 싶은 것은 가져야 해. 넌 나를 어린아이라고 생각해도 돼’라고 말을 건네는 사람이었다. 굉장히 솔직하고, 어찌 보면 기인이지. 가끔 굉장히 힘들어하는 젊은 작가가 있으면 그를 헨크의 집으로 데려간다.

트렌치 점프슈트는 보테가 베네타 제품.

Kim Bora 김보라 영화감독

우리는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그때가 좋을 때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정말 그때가 좋았을까? 평범한 중학생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 그 일상을 따라가며 개인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이입하게 만드는 영화는 놀랍게도 흔치 않다. 김보라의 장편영화 데뷔작 <벌새>는 지금까지 해외 영화제에서 50개의 상을 수집했다. 물론, 이 수치는 앞으로 또 바뀔 것이다.

영화감독으로서 당신은 스스로 오리지널한 존재라고 생각하나? 교과서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사람에게는 오리지낼리티가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고유함을 지녔고, 맑은 거울과 같은 존재다. 다만 그 거울에 먼지가 많이 끼어 있을 때 그걸 얼마나 자주 닦아내는지, 혹은 먼지가 끼어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자각하는지의 차이가 중요하다. 내 경우 나만의 오리지널함을 만들어야겠다고 의식하며 노력한 건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온 시간이 나를 맑은 거울 상태로 머물게 한 부분이 있었던 듯 하다.

분야에 상관없이 어떤 면에서든 오리지널함이 있다고 여기는 이는 누구인가? 나의 명상 선생님. 약 15년 전에 만나서 지금껏 가깝게 지내고 있다. 나이가 가늠이 잘 안 되는 분이다. 그저 선생님을 보면 ‘영원의 아름다움’ 같은 말이 절로 떠오른다. 한번은 카페에 앉아 있는데 선생님이 다가옴과 동시에 화사한 기운, 봄 같은 기운이 그 공간에 확 들어온다는 걸 느꼈다.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의 것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섬세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명상은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 10대 시절부터, 그리고 대학에 가서도 여러 인간관계를 맺고 부대끼며 사는 동안 줄곧 본질적인 무엇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연애나 즐거운 술자리, 혹은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꿈꾸는 삶 같은 것만으로는 내가 진정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일찍이 짐작한 편이다. 명상 센터라는 게 흔치 않았을 때라 얼리어답터처럼 찾아다녔지(웃음).

명상이 영화 작업이나 예술관에 끼친 영향이 있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인정 투쟁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아끼지 못한 채 사는데, 내가 ‘맑은 거울’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게 바로 명상이다. 명상에 깊이 들어가면 스스로가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나는 아름다운 존재이며 나를 긍정 하게 되는 어떤 느낌과 행복함. 그런 시간이 20년 가까이 쌓이면서 훈련된 부분이 있을 거고, 자연히 <벌새>에도 반영된 것 같다. <벌새>를 통해 치유 효과를 경험했다는 반응과 심리 상담이나 명상하는 분들의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나? 예술에 대해서라면 신화하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는데, 거창한 무엇이나 확신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 처음 시작은 별것 없었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기 전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기 싫어서 예고에 간 게 시작이라면 시작이다. 영화를 배워보니 카메라 뒤에서 하는 일이 좋았고, 영화가 자신을 설명하는 요긴한 방법이라고 느꼈다. 그 정도의 충족감으로 시작해서 점점 내가 만듦새 자체에 욕심이 있다는 걸 깨달아갔다. 졸업 후 첫 단편 <리코더 시험>을 만들 때부터 웰메이드를 지향했다.

<벌새> 개봉과 뜨거운 반응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영화를 찍는 과정이 개인적으로 힘들었고, 상처받거나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그런데 <벌새>를 통해 많은 반응을 얻고 영화에 대해 얘기하며 내 안에서 용서나 화해의 감정이 일었다. 내 손 붙잡고 우는 관객도 있었고. 그 눈물이 고마웠다. 인간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구나 하는 걸 새삼 느꼈다.

예술가가 독창적인 한 세계를 구축해가는 길에 중요한 게 있다면 뭘까? 거짓말과 환영으로 둘러싸인 이 세상에서 뭔가를 자각하는 것. 명상 선생님의 경우 평화로운 한낮에 아주 일상적인 일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꼈고, 다음 날 바로 명상 센터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그게 나에겐 큰 영감을 준 이야기였다. 예술가의 오리지낼리티란 바로 그런 순간인 것 같아서다. 다양한 예술가들이 있지만, 어쨌든 예술가는 세상에 균열을 내고 충돌을 일으키는 존재다. 보편 다수가 안전하다고 말하며 끌고 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관습을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 게 예술가의 몫일 거다.

나고 자란 동네나 생활한 도시가 당신의 창의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서울의 대치동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이런저런 비교 문화에 아픈 적이 많았다. 좋지 않은 기억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랄까, 그런 시간을 겪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점이 많다. 덕분에 삶의 방향도 정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뉴욕 에서 대학원에 다니며 공부했는데, 뉴욕은 서울에서 보지 못한 다양성이 확실히 풍부했다. 사람들의 체취, 체형, 피부색, 눈동자 색도 다 제각각이었고, 무엇보다 다양한 모양과 사이즈의 엉덩이를 볼 수 있었다. 일정한 규격 밖에 있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없는 곳에서 진짜 자유로움이 뭔지 느꼈다.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내일이면 샌프란시스 코로 가서 3개월 정도 머물 예정이다. 그사이 <벌새> 일본 개봉이 있어 다녀오겠지만, 당분간 좀 쉴 생각이다. 시나리오가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 많이 읽지도 못했다.

의상 모두 본인 소장품.

Jean-Paul Goude 장 폴 구드 사진가

패션 산업에 몸담은 사람 가운데 장 폴 구드가 직접 촬영하거나 디렉팅한 사진을 그냥 지나칠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장 폴 구드가 패션 매거진에 몸담기 시작한 1968년부터 현재까지, 대중은 그가 제시하는 농축된 창의성을 맛보며 예술과 상업의 경계에 선 작품을 마주했다. 치열하되 결코 유머를 놓치지 않으며, 패션 산업의 최전선에 서 있되 예술적 영감을 늘상 손에 쥐고 있던 장 폴 구드야말로 이 시대의 오리지낼리티다.

가수 그레이스 존스(Grace Jones)와 오랜 시간 함께 작업했다. 그녀의 페르소나를 가다듬는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그레이스와 연인 시절이었던 1970년대에 <뉴욕> 매거진을 위해 포트레이트를 촬영하면서다. 그녀가 무대 기획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마치 할리우드 작가들이 대본을 쓸 때처럼 허구의 캐릭터를 그려 나갔을 뿐인데 그것이 오랜 시간 그레이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녀의 캐릭터는 그 시절 엔터테이너들의 요란스러운 스타일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푸르스름한 메이크업으로 아프리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짧게 깎아 올린 헤어스타일에 딱 달라붙는 남성용 슈트를 입혀 양성성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디바’라기보다 위협적인 ‘에일리언’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고 인기 가수들이 으레 그렇듯 노래를 힘차게 부르는 대신, 영어 선생님처럼 느리고 정확하게 읊었다. 1978년의 그레이스는 음악 산업에 있는 그 누구와도 달라 보였고, 다른 소리를 냈다.

커리어를 통틀어 패션 사진가에서 광고와 디렉팅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매체로 작업했다. 모든 작업을 아우르는 특징이 있는가? 좋든 싫든 춤추고 그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어렸을 때 깨달았기에, 두 가지 기술을 모든 프로젝트에 넣기로 결정했다. 광고든 사진이든 극장에서 일어나는 행사, 심지어 미술관 전시가 되었든지 말이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다 똑같다.

커리어상에 어떤 후회도 없나? 있기는 한데, 1970년대에 게이 디스코에서 핼러윈을 맞이하던 밤이었다. 내가 디렉팅뿐 아니라 초대장을 위해 사진까지 찍은 이벤트였다. 그레이스는 사자로 분장하고 무대에 네발로 기어 올랐고, 합창단 소년 두 명이 실제 사자를 무대로 데려왔다. 그레이스가 사자 우리에 다가가며 야수에게 도발하는 사이 조명이 꺼지고, 몇 초 뒤에 불이 켜졌을 땐 사자가 있던 우리 안에 우두커니 선 그레이스가 관객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가짜 고기를 우적우적 먹는 퍼포먼스였다. 센트럴 파크에서 열리는 셰익스피어 공연이 아니라는 점, 이 쇼가 그저 익살스럽고 엄청나게 재미있어야 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대에서 열리는 쇼는 사라지고 남은 건 사진뿐이다. 뒤돌아보면, 사실 그 공연 전체가 최악의 취향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완벽히 맞아떨어졌더라도.

당신에게 룰을 깨도 괜찮다고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은 누구인가? 50년 전 〈에스콰이어> 매거진의 전설적인 에디터이자 나의 보스였던 해럴드 헤이스(Harold Hayes). 해럴드는 내 노이로제를 고스란히 반영한 화보를 잡지에 싣게 해줄 만큼 처음으로 나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준 사람이다. 그 화보에는 ‘프랑스식 보정(French Correction)’, 즉 다양한 보형물을 활용해 형태적 불완전함을 개선한다는 의미의 제목을 붙였다.

가장 오리지낼리티를 지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항상 리나 베르트뮐러(Lina Wertmuller)를 좋아했다. 베르트뮐러는 페미니즘 작가이자 영화 <귀부인과 승무원>을 찍은 감독이다. 1970년대 중반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마초적인 남성성과 남성 혐오가 대립하는 45년 묵은 영화이다. 보석 같은 작품이랄까.

당신에게 ‘오리지낼리티’란 무엇인가? 오리지낼리티는 창조적인 대담함이다. 진정성을 갖고, 차별화되고, 가능하다면 유니크한 것.

작업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나? 엄청나게 많이 신경 쓴다. 난 벽장 뒤에 숨어서 환호를 사랑하고 나쁜 리뷰를 증오하는 퍼포머니까!

티셔츠는 45rpm, 팬츠는 마르니, 스니커즈는 아디다스 제품.

Jonah Hill 조나 힐 감독, 시나리오 작가, 배우

영화 <머니볼>,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넷플릭스 드라마 <매니악> 등에서 출중한 연기를 선보인 배우가 마니아층을 거느린 스타일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1990년대 LA 배경의 성장물에 스케이트보드와 힙합 등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문화를 녹인 감독 데뷔작 <미드 90> 덕분이다. 조나 힐은 얼마 전 공개된 아디다스 오리지널스의 2020 S/S 캠페인 영상도 참 그답게 만들었다.

당신에겐 누가 ‘오리지널’인가? 요르고스 란티모스(Yorgos Lanthimos), 쿨 키스(Kool Keith), 델 더 펑키 호모사피엔(Del The Funky Homosapien), 프린스 폴(Paul Huston), 그리고 비스티 보이즈(The Beastie Boys).

당신의 패션 스타일을 묘사해보라. 종종 상당히 많은 면에서 내 안에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은 내가 입는 옷에도 반영된다. 어떤 날에는 타이다이 염색한 옷에 버킷햇, 핑크색 반바지, 아디다스 슬리퍼 차림이고, 또 어떤 날에는 올 블랙이나 올 네이비의 더로우 제품으로 빼입고 드레스업 슈즈를 신는 식이다. 어떤 날에 미친 분위기로 옷을 입을지, 단색으로 맞춰 입을지, 혹은 어른답게 입게 될지 나도 절대 알 수 없다.

당신의 스타일 아이콘은? 프란체스코 리소(Francesco Risso), 메리케이트 올슨과 애슐리 올슨(Mary-Kate and Ashley Olsen),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 헨리 롤린스(Henry Rollins), 찰리 펠드스타인(Charlie Feldstein), 잭 앤 라즈(Jack and Laz), 1960년대 마이애미에 있던 노년의 유대인을 찍은 사진, 랙원(Raekwon), 큐팁(Q-Tip), 그리고 비스티 보이즈(The Beastie Boys).

처음으로 거금을 들여 구입한 패션 아이템은? 캐멀색 프라다 캐시미어 코트.

옷장 속 아이템 중 가장 아끼는 것은? 더로우의 가죽 재킷, 두꺼운 끈이 달린 아디다스 삼바 스니커즈.

화이트 터틀넥 톱은 유니클로 제품.

Hwang Inchan 황인찬 시인

황인찬의 시는 이렇게 말해지곤 한다. ‘단조로운 세계’라고, 혹은 ‘언어를 씻기는 방식’이라고, 시쳇말로 ‘이케아 가구로 여백을 부각시킨 방’이라고, 끝내 ‘투명한데 섬뜩하다’라고. 2012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김수영문학상을 거머쥔 황인찬에게 시란 ‘감각에서 출발하는 일’이다.

2012년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가 출간된 직후 쏟아진 상찬을 어떻게 기억하는 편인가? 이전 세대 시인들이 워낙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2010년대 시인 가운데 눈에 띄는 이름을 모색하는 분위기 속에서 운이 좋게도 내가 호명되었다. 처음 시집을 내고 예상보다 빠르고 뜨겁게 주목받으면서 오히려 ‘내가 대단히 잘못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웃음). 빠르게 주목받으면 그만큼 빠르게 소비돼서 사라질 거라는 불안도 있었고, 그보다 사실 ‘이 사람은 대체 뭐지?’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시를 남기고 싶었다.

평론가들이 당신의 시를 설명하기 위해 종종 꺼내는 ‘점착성 없는 건조한 언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 시가 감정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일 거다. 감정은 항상 구조를 만들 때 윤활유처럼, 혹은 데코처럼 사용하는 정도여서. 오히려 내게 시는 감각에서 출발하는 일에 가깝다. 결국 우리가 타자를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감각이고, 감각을 최대한 보존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대상을 보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2000년대 황병승을 비롯한 소위 미래파 시인들이 전위적 언어로 시를 무너트리고 붕괴시켰다면, 당신을 비롯해 2010년대 시단에 등장한 시인들이 형성하고 있는 시적 세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무엇 하나로 묶어 호명하기 어렵다는 것. 어떻게 보면 이 표현이 2010년대 시단에 대한 거의 유일한 합의하고 생각한다. 전위 혹은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시도는 기본적으로 역사, 사회, 문화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데, 사실 2010년대는 그러한 희망조차 사라져버린 시대에 가깝지 않나. 나를 비롯한 다른 시인들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시점이 많지 않구나’라는 한계를 끌어안으며 시 쓰기를 이어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떤 한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시 쓰기는 각자만의 방식이 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방법론적으로 하나로 묶어 호명하기 어려워진 측면이 있다.

작년 11월, 세 번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가 출간됐다. 시를 써가며 가장 많이 되풀이한 감각은 무엇이었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는데 여전히 살아 있구나’라는 실감. 이런 시가 계속해서 쓰이는 이유는, 앞서 말한 한계와 연결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전의 <구관조 씻기기>와 〈희지의 세계>는 뚜렷하게 말을 건네는 시집이었다면, <사랑을 위한 되풀이>는 ‘지금도 내가 살아 있구나’라고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의 제목은 ‘레진코믹스’의 연재 만화 <미지의 세계>에서 차용했다. 서브 컬처, 대중문화를 시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시도를 즐기는 것 같다. 포켓몬으로 쓴 시도 있다(웃음). <사랑을 위한 되풀이>의 수록시 ‘재생력’에서는 아이들이 여름방학에 신령의 도움을 받아 마을의 위기를 함께 해결하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말미에 스태프롤이 올라가며 방학 직전의 시점으로 돌아간다. 특정 시간대가 반복되는 ‘루프물’의 구조를 슬쩍 녹인 시다. 이런 식으로 평소 재미있게 보거나 들은 애니메이션, 노래에서 단어나 착상을 가져와 전혀 다른 의미로 이행하는 시도가 개인적으로 흥미롭다.

시에 대중문화를 녹이는 작업의 의미는 무엇인가?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의 차이는 어쩌면 이런 거다. 대중문화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 이내 안심하고, 힘을 얻어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음 날 직장에 나갈 수 있게 된다. 어찌 보면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사회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대중문화의 역할이다. 반대로 순수예술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익숙한 것을 부수고 자꾸 의심하게 만든다. 이런 차이가 있기에 대중문화를 순수예술에 적극적으로 차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잘 활용하면 고정되어 굳어진 인식을 훨씬 잘 깨트릴 수 있으니까.

당신에게 오리지낼리티란 무엇인가? 무엇이 되었든 그것에 오리지낼리티가 담겨 있다고 명명하는 ‘시대’가 중요한 것 같다.

가장 오리지낼리티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시인은 누구인가? 김소월. 그는 한국의 현대 서정시를 가장 먼저 완성한 사람이다. 그로부터 한국의 시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시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유니크’한 시를 남긴 이라면, 단연 이상. 이상의 시가 1930년대 쓰였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그가 과연 한국의 시인이었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당시의 시대상과 이상의 시적 세계 사이의 간극이 크다.

당신에게 룰을 깨도 좋다고 알려준 사람은 누구인가? 고정관념을 깨라고 일러준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이를 말로만 이해하는 것과 실제로 고정관념이 무너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얘기다. 오히려 시를 쓴 시간들과 내가 사랑하는 수많은 문학 작품으로부터 고정된 사고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언어가 그토록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며, 상대적이라는 것은 철저히 시 쓰기를 통해 안 사실이다.

Hitchhiker 히치하이커 음악 프로듀서, 디제이

20149월, 유튜브에 히치하이커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일레븐’ 뮤직비디오가 공개됐다. 기괴한 전자음 위에 ‘아바바바바바바’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요상한 곡. 정체불명의 반짝거리는 캐릭터는 입을 두드리며 춤추고 있다. 이후 갖가지 괴담과 반향을 낳은 히치하이커는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를 비롯해 수많은 곡을 작곡한 프로듀서이자, 밴드 롤러코스터의 지누로 활동한 인물이다. 이 독특한 캐릭터는 세계 음악 페스티벌을 누비며 디제잉을 한다. 곧 래퍼 소코도모와 협업한 음악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런 ‘캐릭터 뮤지션’ 콘셉트는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음악을 시작한 지 꽤 오래됐고, 안정된 시스템 속에서 아이돌 가수들과 퀄리티 있는 작업을 하다 보니 문득 딴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희한하고 재밌는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 음악인 외에 <토이스토리> 같은 걸 만드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꿈이었다. 그래서 내 영상 작업을 위해 히치하이커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었다. ‘일레븐’ 속의 모습도 다 CG로 만든 것이다.

CG로야 얼마든지 SF적인 캐릭터를 구현할 수 있는 법인데, 실물로 봐도 반짝임이며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가상의 캐릭터가 어떤 계기로 현실에 현현했나? ‘일레븐’이 생각지 못하게 큰 반응을 얻고 이슈가 되면서 해외 유수의 레이블로부터 같이 작업하자는 연락을 꽤 많이 받았다. 2015년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에 초청받은 일을 계기로 실물 캐릭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3D 데이터를 평면화해서 의상팀이 일일이 손바느질하며 이 모습을 만들어냈다. 헬멧의 앞부분에는 매직 미러를 사용했다. 외부에서 보기엔 불투명하지만, 안쪽에서는 밖이 보인다.

당신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언캐니 밸리를 일으키는 히치하이커 캐릭터에 대한 소감과 ‘저만 일레븐이 중독적인가요?’ ‘그 곡을 자꾸 들으면 구토가 나온다는데 정말인가요?’ 같은 질문이 여전히 눈에 많이 띈다. 처음 그런 반응을 접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통쾌했다. 내가 SM엔터테인먼트의 가수들과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일레븐’ 뮤비도 SMTOWN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했는데, SM이 해킹당했다는 반응도 있었다(웃음). 블로거로 활동하는 어느 목사님은 뮤비 장면을 캡처해서 ‘히치하이커는 일루미나티의 증거’라고 조목조목 이유를 대더라.

곧 소코도모와 함께 만든 곡을 발표한다. 이제 막 성인이 됐지만 굉장히 유니크하고 실력 있는 래퍼다. 그와 어떤 인연이 있나? 어느 행사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히치하이커를 엄청 좋아한다며 그 기분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줬다. 그렇게 서로 교류하게 됐다. 재밌는 건 그 친구도 나처럼 CG며 뭐며 직접 영상 작업을 한다는 점이다. 지금 뮤직비디오를 위한 소스는 다 촬영한 상태고, 같은 데이터를 가지고서 영상 작업을 반반 나눠서 하는 중이다.

어떤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선보일 예정인가? 히치하이커로서는 EDM풍의 곡을 많이 만들었다면, 그보다 더 레트로 사운드의 미디엄 템포 곡이다. 뮤비는 최대한 ‘괴상하게’ 만들고자 한다(웃음). 매끈한 모습의 히치하이커가 성수동이나 자양동의 슈퍼마켓 같은 곳 앞에서 춤추고 있을 때 같은 기이한 느낌을 좋아하고, 그게 이 캐릭터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오리지널한 존재라고 생각하나?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남들이 하지 않았는데 먼저 내놓은 것들이 있을 때면 내가 한 발은 앞서갔다고 느낀다. 클럽 사운드의 가요를 시도했을 때나 히치하이커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음악계 사람을 만나보면 도전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대부분 고민이 많아서 실행으로 대뜸 옮기지 못한다. 그런 스타일과 내 차이가 있다면, 나는 고민 없이 일단 실행하고 본다. 오늘 뭘 생각하면 내일 결과물을 내는 성격이라.

히치하이커에게 작곡가로서 다른 챕터를 만들어 준 곡은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아브라카다브라’다. 그 곡을 발표하기 전에 예감이 좋았나? 전혀. 오히려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웃음). 그 당시에는 훅송이 대세였다. 클럽 음악 같은 대중가요가 발표된 일은 없었다. ‘아브라카다브라’의 도입부는 내가 클럽에서 디제잉할 때 쓰려고 만들어둔 것이다.

90년대 솔로 가수, 2000년대 롤러코스터의 지누, 2010년대 히치하이커에 이르기까지 대중음악산업 속을 거쳐왔다. 가요계에서 퀄리티를 유지하며 오래 가기 위해 중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나? 맥스 마틴이라고, 미국 팝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히트곡을 만든 스웨덴 사람이 있다. 에이스 오브 베이스 시절부터 활동해 케이티 페리에 이르기까지 히트곡을 낸 자다. 그가 스웨덴의 한 시상식에서 평생 공로상을 받았는데, 그 상은 보통 과학자나 클래식 음악가가 받는다고 한다. 그가 울먹거리며 소감을 말할 때 한 말이 ‘계속 작업하다가 여기 왔는데 다시 작업하러 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빵 터뜨릴까, 오래 살아남을까 고민할 게 아니라 그저 작업에 미치고 매진하면서 살다 보면 히트작도 나오고 그러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봉준호 감독이나 허영만 화백도 그런 사람들일 것이다.

대중음악이 독창성을 가지려면 어떤 특징이 뒷받침돼야 할까? 대중음악 산업이 시스템화되면서, 대형 기획사는 주식시장에 상장되기도 하는 기업이 됐다. 보통은 열 곡 정도 담긴 한 앨범을 만들려면 기획사에서 몇천 곡을 받는다. 그럼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다수결로 곡을 추려간다. 그게 안정감과 민주적인 방식에서 오는 장점인데, 거기 함정도 있다. 대개 ‘보편타당한 곡’에 높은 점수를 주고, 위험도가 따르는 독특한 시도는 잘 안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요즘엔 소녀시대 ‘Gee’, 원더걸스 ‘텔 미’, 빅뱅 ‘거짓말’ 같은 빅 히트곡이 안 나오는 것 같다. ‘텔 미’의 경우 박진영이라는 한 사람의 뛰어난 감과 독특함이 빅 히트로 이어졌다. 다수의 안정적인 결과 도출보다 소수나 한 사람의 감이 훨씬 좋은 결과를 만들 때도 있다.

가죽 재킷과 팬츠는 에르메스, 셔츠는 샤르베, 양말은 디올 제품.

Asia Kate Dillon 아시아 케이트 딜런 배우

2016년부터 현재까지 네 시즌이 방영된 드라마 <빌리언즈(Billions)>의 테일러 메이슨이라는 인물은 미국 TV 역사상 최초의 ‘논 바이너리’ 캐릭터다. 그 역을 맡은 딜런 역시 자신을 ‘He’나 ‘She’가 아닌 ‘They’로 규정하는 논 바이너리이며, 생물학적 성만을 따르지 않거나 트랜스젠더인 예술가들과 연극 공연도 했다. 영화 <존 윅 3>,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블랙>에 출연했다.

<빌리언즈>라는 드라마에서 논 바이너리 캐릭터를 연기하며 미국 TV의 역사를 새로 썼다. 그 캐릭터에 대해 어떤 피드백을 얻었나? 전 세계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에게서 ‘나와 같은 인물이 또 있다는 걸 몰랐다’는 반응을 들었다. 어떤 이는 내게 연락해 ‘나는 보수주의자에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혐오하지만, 당신이 보여준 연기로 인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도 했다. 어느 누구도 <빌리언즈>가 교육적인 기능을 할 거라고 예상치 못했을 거다.

클로에 카다시안 역시 본의 아니게 교육 효과에 일조했다. 언젠가 카다시안이 당신의 연기를 칭찬하려고 쓴 트윗에서 당신을 ‘미스(Miss) 아시아’라고 불렀고, 둘은 논 바이너리를 지칭하는 문제를 두고 대화를 나누지 않았나?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엄청난 기회라고 여겼다.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가 사용하는 존칭은 ‘미스(Mx.)’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트윗을 남겼지. 카다시안의 반응은 사람들이 어떤 이의 성 정체성을 잘못 인식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예시였다. ‘오, 이런, 미안해’라고 사과하고 나서 올바른 존칭을 사용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이다. 누군가의 성 정체성을 잘못 인식했을 때 그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과도하게 사과하거나 속상해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건 성 소수자와 같은 편이 되는 유용한 방법이 아니다.

당신은 에미상 후보에 올랐을 때 ‘여우 조연상’이 아닌 ‘남우 조연상’ 부문에 올려달라고 텔레비전 아카데미 협회에 요청한 적이 있다. 시상식에서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를 나눠 시상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기길 바라나? 나는 내가 논 바이너리라는 걸 깨닫기 전부터 ‘배우(Actor)’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게 성 중립적인 단어라고 느꼈다. 우리가 예술을 판단하고 상을 수여할 때 성별에 근거해서 인간을 분리할 필요는 없다. 여배우 부문에서는 여성으로 확인되거나 태어날 때부터 여성으로 정해진 이들이 상을 받는다. 그렇게 정해두지 않으면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대부분의 상을 받을 테니까. 하지만 ‘여배우’라는 카테고리가 무슨 해결책이 될까? 그건 일회용 반창고 같은 임시 방편에 불과하다. 시상식의 ‘여배우 부문’이란 백인 여성 이외의 사람을 대변하기 위해 아무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만약 성별 구분 없이 그저 ‘연기자(Performer)’ 부문만 놓고서 시상하는 변화가 생긴다 해도, 9명의 이성애자와 한 명의 유색 인종이 후보에 오르곤 하는 일을 목도하면 ‘그래, 알겠는데, 이걸 어쩌지?’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머리는 언제 처음으로 삭발했나? 열네 살 무렵부터 짧은 머리를 했지만, 머리를 민 건 스물한 살 때다. 내 진짜 모습을 알고 싶었고, 어쩐 일인지 머리를 다 밀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삭발하지 않으면 내 두상이 어떤 모양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까.

당신의 스타일 아이콘은 누구인가? 프린스 아니면 데이비드 보위 둘 중 하나. 특히 특정 시기의 프린스는 글램이나 로큰롤, 아방가르드부터 아주 일상적인 스타일까지 변화무쌍하다. 두 사람 다 자신이 느끼는 바를 표현했고, 성적 유동성에 관심이 있었다.

10대 때는 어떤 패션을 선호했나? 터틀넥, 컨버스 운동화, 낙하산 바지나 통이 넓은 데님을 많이 입었다. 어느 겨울날, 레깅스 차림에 큰 군화를 신고 학교에 간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다. 굉장히 추웠고 불편했다. 나에게 어울리는 느낌도 아니고 불편함마저 준다면 앞으로 취할 필요가 없는 스타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뷰티 아이콘이 있나? 간단한 질문이지만, 대답하기에는 꽤 복잡하다. 왜냐  난 미국에서 자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어떻게 생겨야 하는지, 무엇이 돼야 하는지 단언하듯 알려주는 광고가 온 사방에 깔린 환경에서 자랐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뷰티 아이콘을 꼽자면 늘 큰 조력자가 되어주는 내 어머니, 그리고 뭔가 다른 것을 대표했던 이 세상 모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패션 에디터
이예지, 김민지
피처 에디터
권은경, 전여울
포토그래퍼
Willow Smith, Luca Guadagnino, Jeff Henrikson, 김신애, ANDREAS LASZLO KONRATH
헤어
Giulia Cigarni(@ CloseUp Milan), 조영재, 장혜연
메이크업
Giulia Cigarni(@ CloseUp Milan), 이숙경, 황희정, ERIN GREEN FOR NARS (@ ART DEPARTMENT)
사진 콜라주
Jean-Paul Goude
스타일리스트
NORA MIL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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