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귀에 뻔한 캐럴 세례는 이제 그만. 음악 좀 듣는 사람들의 플레이 리스트에서 해저에 숨은 보물 같은 음악만 골랐다. 행복하다가 우수에 젖고, 신나다가 이내 차분해지는, 특별한 크리스마스용 컴필레이션 앨범이 완성됐다.

크리스마스엔 이런 음악

01. Grandma Got Run Over by a Reindeer / 엘모&팻시
때는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만취한 상태로 귀가하던 할머니는 광속으로 달리는 썰매를 미처 보지 못하고 썰매를 끌던 사슴 떼에 치여 사망한다. 운전수였던 산타클로스는 당시 눈보라가 휘몰아친 데다 정신없이 달리느라 할머니를 들이받는지도 몰랐다고 자백하는데… 그러나 비보를 접한 할아버지는 평소처럼 TV를 보고, 아이들은 선물에만 관심을 가진다. 여기까지가 이 노래의 줄거리다. 부부인 듀오는 엽기적이고 끔찍한 이야기를 컨트리풍 반주에 맞춰 너무나도 신나게 불러 젖힌다. 미국에선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70년대 후반에 발표된 이 노래가 라디오에서 정말 많이 나온다. 미국은 참 괴상한 나라다.

02. Wonderful Christmastime / 폴 매카트니
‘존 레넌은 음울하고 심각하다’거나 ‘폴 매카트니는 밝고 가볍다’는 식으로 두 인물의 작곡 스타일을 단순 비교하는 건 경계하는 편이다. 그러나 적어도 각자 솔로 활동을 하며 낸 크리스마스 음악의 경우, 이 단순 비교가 딱 맞아떨어진다. 존 레넌이 1971년에 발표한 ‘Happy Xmas(War is Over)’는 반전과 인류 화합의 메시지를 담은 묵직한 노래. 반면 1979년에 나온 이 싱글은 철 지난 ‘뿅뿅’ 사운드와 함께 큰 의미 없는 가사가 흘러 가볍게 즐길 수 있다. 이 노래가 존 레넌의 곡만큼이나 위대하다고 생각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03.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 / 캣 파워
진정 ‘메리’한 크리스마스란 불가능한 걸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서 워낙 요란하게 띄우는 날이다 보니,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은근히 슬픈 크리스마스 노래가 많은 것도 그런 연유 때문 아닐까? 이 곡은 1944년 영화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요>에서 주디 갈란드가 처음 부른 후 프랭크 시내트라부터 샘 스미스까지 무수히 많은 아티스트가 커버한, 우울한 크리스마스 노래의 대표 주자다. 시린 겨울날의 따뜻한 코코아 한잔 같은 캣 파워 버전이 유난히 좋다. – 김치완 (칼럼니스트)

04. The Little Boy that Santa Claus Forgot / 베라 린
종군가수 베라 린 여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이 싸우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피폐해진 영국 국민에게 용기를 심어주면서 훈장을 받기도 한 인물. 그녀의 노래로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말미에 농담처럼 삽입된 ‘We’ll Meet Again’이 유명하지만, ‘산타클로스가 잊은 어린 소년’ 역시 무척 가슴 아프다. 친구들과 달리 선물을 받지 못한 소년이 있는데, 이는 아버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가사가 전시의 우울한 풍경을 우화로 풀어낸다. 격동의 20세기를 모국인 영국을 위해 살았던 이 위대한 가수는 아직 생존해 있다. 1917년생이니 올해로 만 100세다.

05. It Is Accomplished / 피터 가브리엘
마틴 스코세이지의 논쟁적 작품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인간적인 면에서 갈등하는 신의 아들 예수를 다뤄 많은 기독교인의 반감을 샀다. 이 영화 음악 작업에 열정을 가진 피터 가브리엘은 기독교 세력의 방해로 영화 제작에 거듭 제동이 걸리는 상황에서 힘겹게 작업을 완성해 갔다. 뭐 결국엔 OST 앨범으로 그래미까지 수상한다. 당시 월드 비트에 집중한 그는 서구와 전 세계, 고난과 환희, 신과 인간 사이에서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었다. 예수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을 제목으로 쓴 이 수록곡은 의외로 크리스마스의 본질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06. The Closing of the Year / 웬디&리사
프린스의 밴드, 레볼루션의 멤버였던 웬디와 리사는 이후 듀오로 활동한다. 그리고 이전보다는 부드럽고 투명한 음악을 만들었는데, 이런 스타일은 영화 <토이즈>의 주제곡인 이 노래에서 절정에 달한다. 어릴 적 영화를 봤을 때의 기분을 상기시키는지라 제목처럼 매년 한 해를 정리할 때 듣곤 한다. 장난감 공장을 둘러싼 사투를 그린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이 작품은 당시 어린이들이 폭력적인 비디오 게임에 매료된 데 부정적 입장을 취했다. 요즘엔 아이들이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놀고, 정작 어른들이 장난감을 사 모으고 있는 것 같다. 참고로 <토이즈>는 이미 25년 전, 현재 전쟁에서 사용되는 장난감 사이즈의 전투형 드론 같은 것을 예측했다.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 연주자)

07. Rachmaninoff Cello Sonata In G Minor Op.19 III. Andante / 송영훈
첼리스트 송영훈은 첫 솔로 앨범인 <라흐마니노프 앤 쇼스타코비치>를 2009년에 발표했다. 그리고 올해 3월 공연 무대에서야 이 곡에 얽힌 일화를 들려줬다. 존경하는 스승에게 배운 마지막 곡이 바로 이 소나타이고, 뉴욕 센트럴 파크 내 라흐마니노프가 자주 산책하던 곳에서 휠체어를 탄 스승과 라흐마니노프 이야길 했다고. 그래서 송영훈은 이 곡을 연주할 때면 돌아가신 스승이 떠오른다고 한다. 라흐마니노프의 유일한 첼로 소나타에서도 3악장은 그가 남긴 음악 중 가장 로맨틱할 것이다. 연주자의 특별한 추억이 담긴 서정적인 선율이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다가온다. – 정다솜 (스톰프뮤직 A&R팀)

08. Um Feliz Natal / 이방 링스
지금은 사라진 ‘비하인드’라는 이름의 카페에 제법 오래 몸담았는데, 출근해서 주로 한 일이 음악 틀기였다. 십수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날 출근하는 담당으로 2년 연속 당첨됐다. 다소 우울해진 마음을 해소하고자 좋아하는 캐럴을 잔뜩 튼 기억이 난다. 브라질 싱어송라이터 이방 링스의 크리스마스 앨범 도 그중 하나다. 따뜻한 나라에서 만든 캐럴을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이방의 목소리를 워낙 좋아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재생했다. 그리고 카페에 이 곡이 흐를 때면 가수가 누구냐고 묻는 사람이 꼭 있었다.

09. R2-D2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 Various Artists
<스타워즈> 테마곡을 디스코로 편곡해 상업적 성공을 거둔 메코가 프로듀싱하고, 영화 속 캐릭터인 C-3PO가 이끄는(정확히는 목소리를 맡은 배우 앤서니 대니얼스의 수다와 노래가 담긴) 크리스마스 앨범 수록곡이다. 당시 무명이었던 존 본조비와 아이들이 먼저 노래를 하면 로봇인 알투디투가 특유의 목소리로 화답하는 훈훈한 형식. 이 앨범은 <스타워즈> 팬이 아닌 자에겐 이상하고 시끄러울 수도 있으니 약간 주의가 필요하다.

10. Winter Wonderland / 턱 앤드레스
21세기 들어 첫 겨울, 당시 근무하던 음반사의 폐품 창고에서 턱&패티의 기타리스트인 턱 앤드레스의 크리스마스 앨범 를 우연히 발견했다.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커버도 좋았고, 턱의 어쿠스틱 기타로 듣는 크리스마스 음악도 훌륭해서 그 후 이 무렵의 애청 앨범이 됐다. 혼자 보내는 외로운 크리스마스나 두세 명이 함께하는 조촐한 모임 시 배경음악으로 제격이다. 익숙한 선율이지만 턱의 분주한 두 손에서 나온 연주에는 진부함이 없고, 때때로 잔잔하나 참신한 유머 같은 게 섞여 있다. – 김영혁 (김밥레코즈 대표)

11. Santa’s Coming For Us / 시아
시아가 캐럴을 부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애절한 목소리로 대체 무엇을 어떻게 부를까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한 맺힌 캐럴이 탄생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따끈따끈한 신보 는 앨범 커버부터 캔디처럼 컬러풀하다. 이 곡은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고, 그녀가 밝은 멜로디도 소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수록된 10곡 모두 창작곡이다.

12. Alone On Christmas Day / 피닉스
소피아 코폴라와 빌 머레이가 다시 만난 넷플릭스 영화 <어 베리 머레이 크리스마스>를 보고 나면 사랑하는 이를 만나지 못하고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낸다는 내용의 이 삽입곡이 여운을 남긴다. 적당히 멜랑콜리하며 느긋한 템포다. 원곡은 예전에 비치 보이스가 공연을 할 때만 가끔 부른 미공개 곡. 그걸 소피아 코폴라의 남편이 멤버로 있는 프랑스 록밴드 피닉스가 작년에 싱글로 부활시켰다. 비치 보이스의 마이크 러브는 잊힌 곡이 빛을 보게 되었다며 밴드 측에 고마움을 표했다는 후문. – 장선화 (워너뮤직 마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