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CD 가입 국가 중 최고 노동 시간을 자랑하는 이곳에서 최적의 여가 생활을 찾아가기. 일찍 퇴근하지 못하는 대신 퇴근 후 늦은 그 시간을 건설적으로 보낼 수 있다면, 바로 신개념 ‘저녁이 있는 삶’의 실천이다.

shutterstock_490997914국어사전에서는 ‘여가’를 이렇게 정의한다. ‘일이 없어 남는 시간’. 어느 백과사전은 ‘직장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자기 충전, 휴식을 겸한 다양한 취미 활동이 포함되는 경제 활동 이외의 시간. 개인이 처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이 시간을 대다수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2년에 한 번꼴로 1만 명 이상을 조사하는 바에 따르면 늘 ‘TV 시청하기’가 압도적이다. 올 초 발표된 수치는 46%. 다음으로는 수치가 뚝 떨어지며 인터넷 검색, 게임, 산책 등이 뒤따랐다. 누군가에게는 비스듬히 누워 TV 리모컨을 산만하게 돌리는 일이 일상의 낙이다. 반면 누군가는 일단 집 밖에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을 허투루 보냈다고 생각한다. 여가라고 할 때 떠올리는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런데 ‘TV 시청하기’에서 읽어내야 할 방점은 그것이 주로 휴식을 취하기 위한 여가라는 점이다. 연령대를 불문하고 스마트폰을 통해 방송이나 원하는 콘텐츠를 보는 행위가 보편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집에서는 쉴 겸 TV를 그저 켜두는 상황도 잦기 때문이다. OECD 가입 국가 중 최고 노동 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일주일 중 5일 동안의 저녁은 야근 혹은 퇴근 후의 피로로 채워지기 쉽다. 일에 지치거나 시간이 부족해서, 혹은 막상 뭘 해보려고 해도 할 만한 걸 찾지 못해서 소극적으로 돌아가는 생활의 굴레.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자 새로운 욕구를 품는 사람들의 중심엔 사회생활 좀 해본 30대 이상의 직장인이 있다. 삶의 큰 지분을 직장에 내줬다가 이번 생은 일과 함께 마감하겠구나 싶은 깨달음이 여가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들려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양한 여가 생활을 경험해보지 못해 기대치 자체가 낮은 세대는 오히려 밋밋한 일상에 큰 불만이 없는 편이라고 한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여가 생활 조사에서, 동호회 활동이나 재능 나눔 등이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라는 점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아보려는 나홀로족이 늘었지만, 그건 어떤 방식으로든 뭔가를 향유하려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1인 가구나 나홀로 족, 그리고 누구든 문화적인 욕구가 생긴 개인들이 모이면 결국 각종 클래스나 그룹 활동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성수동 카페 자그마치와 오르에르의 김재원 대표는 이러한 장의 필요성을 느낀 사람 중 하나다. “제 주위에 ‘덕후’ 기질이 다분한 사람들이 있어요. 가끔 함께 수다를 떨다 보면 생각지 못한 정보나 노하우를 주고받게 돼요. 어느 정도 사회 경력이 있는 사람끼리 내공을 나누고 이야기하며 해소할 수 있는 콘텐츠와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유튜브나 인터넷 강의를 통해 뭔가를  배우는 일이 친근한 세대에겐 SNS와 같은 온라인도 새로움을 익히는 질 좋은 장이다. “얼마 전 모야모라는 앱을 알게 됐어요. 이름 모르는 식물 사진을 찍어 올리면 아는 사람들이 주르륵댓글을 달아줘요. 지식을 공유하는 커뮤니티이자 식물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놀이터인 셈이에요.”
100세 시대를 맞아 여가 생활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하는 전문가 세계에선 어쩌다 한 번씩 벌이는 이벤트보다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꾸려나가는 활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특별한 취미 생활 없이 빈 시간에 주로 쉬기만 하는 사람이 큰맘 먹고 여행이라도 다녀온다면, 이후 괜히 돈만 낭비한 듯한 아쉬움이 들거나 여행의 행복감이 생활로 녹여지지 않는 사례가 꽤 있다는 것. 배움이든 엔터테인먼트든, 누군가와 그 시간을 함께 하는 건 유지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요즘 여기 저기 생긴다는 북클럽은 책을 잘 읽지 않는 시대에 어떤 이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자구책일지도 모르겠다. 논현동과 서교동에 지점이 있는 사회적 기업 북티크는 서점이자 북카페, 독서 모임 등이 열리는 다층적 공간이다. 요일별로 다양한 테마의 독서 모임을 진행하는 이곳의 모토는 ‘책과 사람과의 만남을 통한 즐거움.’ “원래 책을 좋아하는데 나눌 기회가 없었던 사람, 가끔 책을 사긴 하지만 시간이나 습관 문제 때문에 제대로 독서하지 못했던 사람이 주로 모임에 와요. 낯선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분위기가 형성되면 책에 대한 이야길 편하게 하면서 재미를 찾죠.” 북티크 대표의 말이다. 무엇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일주일에 한 권씩은 읽자는 목표를 세우고 정기 모임을 하면, 느슨하게 책을 들 때와는 다를 것이다.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직장인이 다수다. 지속 가능한 여가, 보고 듣는 것 많은 젊은 세대의 변화한 눈높이와 향유하는 라이프스타일을 향한 욕구. 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결국 돌아오는 화두는 시간 부족 문제다. 칼퇴근이 무리인 직장인의 사정과 그럼에도 집에서 늘어지기엔 아쉬움 사이에 서 적절한 옵션은 없을까? 공교롭게도 함께 모여 정보를 나누며 즐길 궁리를 하는 김재원 대표나 북티크 모두 ‘밤’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다. 직장인 위주인 북티크의 독서 모임은 주로 평일 저녁에 시작한다. 대형 서점이 문을 닫는 금요일 밤 10시부터 토요일 아침 6시까지는 심야 서점이라는 이름으로 책과 음료가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열어두는데, 그러다 새벽 2시경 직원과 홀 사람들이 모여 책 이야기를 나누는 북토크 타임도 시작한다. 김재원 대표는 무엇보다 늦은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할 흥밋거리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조만간 카페 오르에르 2층 빈 공간을 이용해 가벼운 세미나 프로그램을 이어가려는 그녀는 계획 중인 이 프로젝트를 ‘야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지난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다음 침공은 어디?>에서 마이클 무어 감독은 이상적인 사회상을 찾아 여러 국가를 돌아다닌다. 2시면 퇴근한다는 한 독일 노동자에게 그 시각에 집에 가면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느냐고 묻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개 산책시키고, 여자친구랑 커피도 마시죠.” 남는 시간을 ‘잘’ 영위해야 한다는 마음은, 직장에 머무는 시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하루의 틈을 어떻게든 윤기 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런던 로열 드로잉 스쿨에서 진행하는 흥미로운 회화 클래스(셀프리지 백화점 폐점 전 매장으로 가서 다양한 사물의 정물화를 그리는 클래스 같은)의 저녁반이 오후 5시 반부터 시작한다거나, 그 밖에 저녁 생활의 개념이 우리와 판이하게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들으면 부러울 수밖에. 그런 사이클이라면 저급 체력인 사람도 퇴근 후 좀 더 생산적인 문화 생활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다. 최근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 평일 오후 10시, 금토엔 11시까지 문을 열어두는 K 현대미술관이 들어섰다. 이곳은 6개 층으로 구성된 대규모에 카페와 레스토랑도 마련해뒀다. 밤거리가 화려한 서울에서도 저녁 6~7시면 문을 닫는 대표적인 곳이 갤러리였건만, 보다 ‘서울 사람’에 어울리는 공간이 또 하나 생겼다. 일찍 퇴근할 수 없다면 일단 나의 사이클에 맞는 여가 생활을 탐색하는 것도 현실적인 ‘저녁이 있는 삶’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