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옥과 감선주(the kam), 박미선(gear3), 박소현(post december), 이재림(12 ILI).이 다섯 디자이너가 ‘Wear Grey(웨어 그레이)’라는 이름 아래 뭉쳤다. 이들은 왜 모인 걸까.

(왼쪽부터)디자이너 박소현,이재림,임선옥, 감선주, 박미선.

(왼쪽부터)디자이너 박소현,이재림,임선옥, 감선주, 박미선.

<W Korea> 다섯 명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임선옥 20년 이상 컬렉션을 하는 동안 내가 어떤 철학으로, 어떤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는 디자이너인지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이렇게 오래 활동했는데도 내 브랜드는 ‘어떤 셀렙이 입었다’로 남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고, 소모적으로 일하는 사이클의 고리를 끊어 브랜드의 제품이나 본질이 무엇인지, 디자이너 이전에 작업자로서의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쇼룸이 가까워 줄곧 만나는 박소현 실장을 중심으로 모였고, 지금 이 다섯 명과 포럼을 구성하게 되었다. 비즈니스로 필요한 부분을 나누고, 일할 가치에 대해 고민하며, 한국 패션을 세계화시키는 데 힘을 합쳐보자고. 다수의 목소리가 모이면 우리의 말에 더 귀 기울이지 않을까.
박소현 패션 디자이너는 늘 재고와 싸움을 치러야 하는데, 팔지도 못하는 옷더미를 만드는 건 환경 파괴나 다름없다는 데에 동감한다. 우리는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포럼을 통해 ‘Eco Friendly, Keep Earth’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려고 한다.

왜 ‘웨어 그레이’인가?
이재림 각자 시즌 콘셉트를 얘기했는데, 모두의 공통점이 ‘그레이’였다. 파츠파츠나 포스트 디셈버 역시 메인 컬러가 그레이였고, 더 캄 역시 역사적인 흑백 사진을 준비한다는 것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각자가 생각하는 그레이란?
임선옥 혼재의 시대에 걸맞은 불분명한 색으로, 넥스트 블랙이자 화이트.
박미선 따뜻하거나(웜그레이) 차갑거나(쿨그레이). 다양한 톤을 낼 수 있는 색. 숨기고 있는 위장 컬러로도 보인다.
박소현 흑과 백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색이 아닌 혼색.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색이다.
이재림 각각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컬러.
감선주 그레이는 아카이브다.

프로젝트의 첫 번째 시도로 직영 쇼룸을 운영한다고 했다. 첫 번째 시도로 삼은 이유가 있나?
박미선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웃음). 각자 비즈니스를 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고 다음 단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들이 만든 플랫폼이 아닌, 우리의 플랫폼인 직영 쇼룸을 운영해보자는데 합의했다.

프로젝트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나?
박미선 디자이너들도 모여서 한목소리를 낼 수 있다! 한 사람의 목소리는 약할 수 있지만 여러 명이 모이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에 힘을 보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형태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할 수도 있고… 다른 디자이너들이 우리의 활동을 궁금해한다고 들었다.
임선옥 우리가 사회운동가는 아니지만, 일상적인 옷의 힘을 보여주는 건 의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대기업과 다른 점이지 않나. 출발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플랫폼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도 고민하나?
임선옥 팔로어가 곧 존재감을 드러내는 걸 보면 조금 허무하다. 새로운 문명에 대한 전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잡지와 미디어, 패션, 디자이너가 적극적으로 얘기하고 소통해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진정성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미선 디지털의 콘텐츠가 일시적이고 쉽게 사라져버린다는 속성에 역설적으로 남길 수 있는 책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중요하게 여겨진다. 포럼을 할 때마다 녹음을 해서 대담집으로 남길 생각이다. 그걸 아카이브로 만들어서 전하고 싶다.

두 번째 프로젝트에 대한 주제가 나왔나?
박미선 하루만 쉬고 싶다(웃음). 아직 구체적인 얘기는 나오지 않았지만… ‘Keep Earth’에 대해 더 논의해보고 싶다.
임선옥 홍콩 바이어들은 ‘왜 한국의 패션은 다 스트리트 패션이죠?’라고 묻는다. 한국의 키워드는 빠르게 움직이는 ‘패스트’에 입각해 있다. 심지어 <사우스 모닝 포스트>에서는 ‘제로 웨이스트’, ‘서스테이너블’을 추구하는 브랜드가 한국에 있는지조차 놀라워했다.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삶의 가능성이 녹아 있는 작업을 계속해서 확장해나갈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만 하기 어렵다. 미디어의 힘이 필요하다.

포럼의 첫 명제이기도 했던, ‘패션 디자이너로 한국에서 살아남기’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다.
박미선 9년째 gear3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 하고 싶은 것을 했고 다음에는 필요한 것을 했다. 오직 브랜드와 디자인에 집중했다. 여전히 브랜드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지만,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으로 모두가 모여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소현 작년 1년간 컬렉션을 쉬었다. 처음엔 매출이 반토막이 나고 난리가 날 줄 알았는데 유지가 되는 걸 보고 알았다. 억지로 뭔가를 만들기보다는 내가 어떤 방향성과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중요한지를 말이다.
감선주 신진 디자이너에게 중국은 척박한 공간으로 알려졌지만 그보다 더 척박한 곳이 한국이다. 한국은 라벨 유통과 영업, 재고 부담, 유통 현실이 모두 디자이너가 떠맡아야 해 공방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재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비슷한 규모로 발전하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확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