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차별적인 현실을 점점 민감하게 인식하게 되지만, 모든 한국 남자를 ‘한남’이라 부르며 영영 등돌릴 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고 함께 삶을 일구어야 할 동반자는 그들이니까. 그렇다면 페미니즘과 낭만적 사랑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1950s COUPLE SITTING BACK...

작년 가을의 어느 날 나는 싱글인 여자 친구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늘 그랬듯 일과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다. 다만 대화 분위기가 예전과 같지는 않았다. 여성을 향한 폭력이 집중 조명되고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던 때라 우리의 대화는 활발했지만 약간 침울하기도 했다. 이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입장에 자주 절망하지만 이를 같이 이야기하고 분개할 친구가 있다는 건 좋았다. 그런데 우리는 둘 다 이성애자로서 고민이 있었다. 한국에 남성 중심적 문화가 이렇게 완고하고 팽배해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극복해야 할 관습이 그렇게 많다면 정치적으로 공정한 ‘헤테로 로맨스’가 가능한가? 그 대화 끝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연애할 대상은 결국 ‘한남’인 건가.” 그 말이 지금 이 글의 화두가 되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법에 대해 매일같이 토론한다. 하지만 한국의 가부장제 문화를 만들어낸 당사자인 한남과 연애하는 법은 알지 못한다. 이제껏 의문 없이, 자못 유연하게 받아들여온 관계의 양식들이 허물어지고 있다. ‘한남’이라는 단어는 광범위한 비난을 담고 있다. ‘한국 남자’의 준말일 뿐인 이 용어가 부정적 함의를 담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가. 밤길을 혼자 걸을 때나 택시 탈 때면 느껴지는 잠재적 폭력의 위협, 남자 동기와 똑같이 노력했는데도 승진에서 밀려날 때 실감하는 유리천장, 추석에 남자들이 둘러앉아 TV 보고 있을 때 여자들은 부엌에서 허리가 부러지게 전 부치는 게 당연한 시월드. 구조만도 불리한데, 평범하고 다정한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의 개인적 사진을 찍어 공유하거나 이별을 고했을 때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사건도 드물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 헤테로 싱글인 또 다른 여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진지한 관계를 맺는 게 어렵다고 하면 잠만 같이 자는 상대라도 구하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아. 내 몸에 해를 가하지 않고, 사진 찍지 않고, 소문내지 않을 사람을 구하는 일조차.” 한국 사회에 존재할 점잖은 남자는 이런 강력한 불신에 억울해할 것이다. 바라건대, 그런 억울함이 타당한 사람만 마주치며 살고 싶다.
진지한 연애란 그 누구에게도 약간은 버겁다. 적당한 타인을 적당한 때 만나서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일은 삶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해주지만, 그만큼 에너지를 소진한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로서의 여성을 자각하면 이성 간의 연애는 더 버겁다. 이전에는 드라마에서 클리셰처럼 반복되며 낭만적인 장면처럼 여겨진 벽에 밀어붙이기, 손목 틀어잡기, 합의 없는 갑작스러운 키스에 내재한 폭력성을 깨닫게 된다. “너는 여자다워서 좋아”, “우리 엄마에게 며느릿감으로 소개하고 싶어” 같은 말에 숨은 남성 중심적 기대를 감지하게 된다. 그렇다고 나에게 접근하지 않는 남자를 만난다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만 하는 상대는 한편으로 수동적인 사람이고 연애를 힘들게 만든다. 적극적인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항상 먼저 접근하고 받아주고 조직하는 사람이 된다면, 먼저 노력하기 싫어하는 남자에게는 이용하기 ‘편리한’ 여자가 되어버릴 뿐이다. 결국, 연애 관계란 동성이든 이성이든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공간에 침입하는 행위가 전제된다. 그러나 이 침입이 강압이 아니고 초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동등하면서도 동시에 적극적인 입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페미니스트 연애는 거창한 게 아니라, 이를 고민하는 일이다.
남자들의 시각은 어떨까. 평소 알고 지내는, 비교적 평화로운 남자인 작가 선생님에게 ‘한남과 연애하는 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자신도 소위 남고와 군대로 빚어진 한국 남자의 무리에서 명백히 거리를 두긴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단순히 연애가 대상의 문제이기만 하다면, 남들이야 어떻든 나만 ‘비-한남’을 찾는 데 주력하면 된다. 글로벌 데이팅 앱 틴더에 가입해서 여성 인권이 높은 나라의 남자, 가령 북유럽에 사는 올라프를 찾아보나? 하지만 확률도 낮거니와 인권 의식이 높은 사회에도 예외는 있다. 혹은 한국 사회 어딘가에 유니콘이나 드래곤처럼 존재할지 모르는 남성 중심 문화를 거부하는 남성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나? 하지만 만난다고 해도 어떻게 알아보나? 한남 연애 테스트처럼 체크리스트가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이는 운에 기대는 방식일 뿐이며, 더 큰 문제는 그런 남자와 다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면 연애를 포켓몬고 게임처럼 보고 일단 XP 수치가 괜찮고 잠재력이 있는 사람을 만난 후 진화를 시키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에겐 가기만 하면 무한히 자원을 충전해주는 포켓스탑도 없는데 에너지가 남아날까? 그렇다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적정한 합의에서 주저앉는 건 어떨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연애에서 여성-남성의 불균형이 현대 세계의 모순임을 받아들이고 개인 사이에서만 협의하고 노력해본다는 현실적인 방법. 그러나 이 방법은 사회가 변화할 때까지는 나 자신으로는 무엇도 바꾸지 않고 체념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는 타협이 되지 않는다면, 게임을 떠날 수도 있다. 비혼, 탈-연애는 인기 없는 여자가 남아버린 현상이 아니며, 적극적으로 선택한 삶의 결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연히 결정적인 정답은 없다. 한국 남자와 연애하는 법은, 입장을 바꾸면 한국 여자와 연애하는 법이며 그건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이다. 며칠 전 참고할까 싶어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와 미나시타 기류의 대담집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을 읽었다. 이 책은 사회 진단에 가깝지, 대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중 규격 아래서는 우리가 행복할 수 없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페미니즘을 포함한 모든 삶에 대한 진보적 자세는 규격을 거부하는 데서 나온다. 결국, 사회적인 양식이자 개인적인 관계인 연애의 방식은 다 각자가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싸울 것이고, 여성 이성애자는 거기서 남성을 동반자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서로에게 공정한 연애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그리하여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그게 정치적으로 공정한 로맨스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시작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