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솜을 두르는 오묘한 분위기는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까지 물들일 것이다. 색을 입히면 질감을 지닌 종이처럼 드러내고, 천천히 피어나는 봉오리와 같이 눈을 뜨고 있는 지금, 배우 이솜.

셔츠와 와이드 팬츠는 노앙, 스틸레토 힐은 레이첼 콕스.

셔츠와 와이드 팬츠는 노앙, 스틸레토 힐은 레이첼 콕스.

잡지사 일꾼들에게 이솜은 ‘우리 업계 사람’이었다. 해외 모델들 사이에서 나탈리아 보디아노바나 젬마 워드 같은 베이비 페이스가 새로운 흐름을 이끌 때, 우리에겐 솜털 같은 이솜이 있었다. 패션 모델인 이솜이 진짜 배우의 세상으로 저만치 건너가버렸다고 신호를 준 작품은 2014년 가을 개봉한 <마담 뺑덕>이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일어서는 길에 긴 한숨을 내쉬는 관객과 감탄사를 내뱉는 관객의 소리가 맞물리던 순간을 기억한다. 심청전을 이리 비틀고 저리 꼬아 희한한 세계로 안착시킨 영화의 스토리를 선뜻 지지하긴 힘들었지만, ‘이솜이 잘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무료하고 지루한 삶에서 구원해줄 남자에게 빠지는 순진한 소녀이자 사랑한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복수의 화신. 신인 여자 배우에게 감정 변화의 큰 폭을 보여주며 한 작품을 이끌어가는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난해한 미션을 맡은 이솜은, 자기 몫을 해냈다.
<마담 뺑덕> 이전까지 이솜의 출연작은 단편 영화를 포함해 이미 두 자릿수에 다다른 상태였다. 이솜은 <하이힐> <푸른 소금> <사이코메트리> 등에서 주인공의 주변 인물로 등장하거나, 김지운 감독이 실험적인 기법으로 촬영한 단편 영화 <더 엑스>에서는 니키타 같은 킬러 캐릭터로 분해 총을 잡았다. “<마담 뺑덕> 이후 1년 정도 활동을 쉬었어요. 고민이 많은 시기였죠. 그때 주변에서 제가 밝은 작품에 출연하는 걸 보고 싶다는 얘길 많이 해주더라고요.” 이솜의 새 영화는 이요원, 정만식과 함께 출연한 휴먼 코미디물 <그래, 가족>이다.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는 삼남매 앞에 어느 날 어린 막냇동생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가족의 탄생기라니, 어두운 기운이 내려앉은 요즘 한국 영화 속에서 홀로 다른 색깔을 띤다. ‘연예인 못지않은 외모의 소유자이지만 결정적으로 끼가 없어서 매번 오디션에 낙방하는 만년 아르바이트생.’ 철부지이면서 무한히 긍정적인 영화 속 이솜은 돈 떨어지면 남에게 빌리고, 오디션에 탈락하면 새 아르바이트를 구하며 나름 질긴 생활력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는 캐릭터예요. 단순한 사람이죠. 그런데 삼남매 중 막내로 살다가 갑자기 동생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알게 돼요. 살다가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떤 기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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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립 드레스는 멜트, 벨벳 코트는 하이더 애커만.

이솜에겐 친구 같지만 다른 나라에 떨어져 사는 언니가 있다. 올해 설 연휴는 엄마와 함께 언니가 머무는 곳으로 가 보냈다. 요리를 즐겨 하는 이솜의 엄마는 사실 요리 자체보다 딸이 먹는 모습을 좋아하는 듯한 분이다. 이솜이 되도록 안 먹고 살아야 했던 모델 신분일 때와 지금 크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엄마가 해준 아침밥에 누룽지까지 챙겨 먹곤 한다는 것. 세상의 많은 가족 관계가 그렇듯 이솜 역시 가족에게 애정을 담보로 퉁명스럽게 굴곤 한다. 사람은 식구를 대할 때와 친구, 연인, 사회 동료를 대할 때 등 그 관계에 따라 ‘모드’가 달라질 때도 있는데, 그녀의 태도는 비교적 일관되다. 친한 친구에게 다정히 대하거나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와 그런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여자 중 다분히 후자 쪽이다. “친구한테든 연인한테든, 저는 보기보다 무뚝뚝한 편이에요. 선배나 감독에게 살갑게 굴지도 못하죠. 다만 일하는 현장에서 소통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벽을 허물려고 애써요. 우리 영화를 보고 나면 옆에 있는 이와 대화하며 사는 게 중요하다고 느끼게 될 거예요. 가까운 사이일수록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필요한데… 저도 이번 작품을 하면서 누군가 옆에 있을 때, 할 수 있을 때 잘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슬립 드레스는 멜트, 벨벳 코트는 하이더 애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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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가족>에 출연한 이요원은 모든 작업이 끝난 후 제작보고회에서 이솜의 첫인상에 대해 ‘영화배우 보는 기분’이어서 신기했다고 말했다. 잡지에서 많이 보던 신비로운 이미지의 인물을 직접 보니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데뷔 20년 차 연예인이 이솜을 보고 ‘와! 미디어로만 보던 그 연예인!’이라고 한 셈인데, 워낙 멋진 여성을 좋아한다는 이솜은 또 이요원을 지켜보며 자기 관리에 노력하는 프로페셔널한 인상을 받았다. 실컷 영화를 찍고 나서야 그간의 조심스러운 탐색을 털어놓는 이런 상황은 두 여자가 모두 낯을 가리는 성격이어서 발생했다. 이요원의 솔직한 감상처럼, 이솜을 두르는 오묘한 분위기는 그녀만의 강력한 무기다. 스스로는 자기 얼굴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하다가 10대 시절 모델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커리어를 시작하고부터 ‘내 외모가 독특하구나’ 깨달았다지만, 그전에도 길거리에서 캐스팅되거나 같은 여학교의 학생에게 팬 레터를 받는 일은 종종 있었다(그녀의 인스타그램에 뭘 먹고 그렇게 예쁘냐고 댓글을 다는 이들은 대부분 여자다). 순한 고양이 같기도, 시크한 강아지 같기도 한 얼굴에 ‘솜블리’라는 별명처럼 사랑스러운 표정과 몸짓으로 특유의 매혹적인 공기를 만드는 인물. 웃을 때는 육성으로 ‘헤헤’ 혹은 ‘히히’라고 만화 속 캐릭터가 낼 법한 소리를 들려주며, 촬영 도중에는 확신에 찬 아이 같은 입 모양을 한 채 “나는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좋아”라고 어수선한 장내를 스르르 정리해버린다. 영화 티켓을 새것처럼 보존하기 위해 기계까지 장만하고 일일이 코팅하는 습관은 다시 ‘솜블리’다운 천진함과 연결된다. 이솜이 <그래, 가족> 에서처럼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 어느 연출자든 한 인간의 매력을 금방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디션 보는 일이 아직 떨리긴 하지만 나름 즐거워요. 감독님들도 극 중 캐릭터에 대한 상이 분명히 안 잡혀 있곤 하거든요. 그런데 처음 만난 배우에게 새로운 자극을 받으면서 좀 더 구체적인 이미지를 찾아가기도 하니까, 흥미로운 일이죠.”

니트는 보브, 롱스커트는 더 센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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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에 막 눈뜬 배우들이 보다 다양한 캐릭터에 관심을 보이듯, 이솜도 호기심을 가지고 작품과 역할을 하나하나 흡수해가고 있다. 지난해, <마담 뺑덕>의 덕이에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밝고 유쾌한 작품인 <좋아해줘>를 택했고, 작품의 개성이 돋보인 <범죄의 여왕>에서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지만 실상은 게임 폐인이었던 수상한 청춘을 연기했다. 2016년 여름부터는 쭉 영화에 임하는 나날이다. <그래, 가족> 촬영 이후 정윤철 감독에 이정재, 여진구 등과 함께한 <대립군>은 바로 얼마 전 크랭크업했다. 이솜은 광해군이 가장 아끼는 궁녀로 나온다. 다른 배우들과 어우러져 단체로 찍는 신이 많았던 이 현장은 연기 수업을 따로 받지 않는 이솜에게 배움의 장소였다. 촉을 세우면, 카메라 앞에서 행동하는 다양한 배우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도 경험치가 쌓이는 일이 된다. 편히 쉴 새도 없이 그녀 앞엔 <소공녀> 촬영이 기다린다. <족구왕>을 제작한 광화문시네마의 작품으로, 약간의 로맨스 라인이 있는 상대역은 특별출연 하는 배우 안재홍. “<소공녀> 주인공은 가사도우미로 하루하루 먹고사는데, 집세를 내고 나면 빠듯한 신세죠. 돈이 딸려도 좋아하는 술과 담배는 차마 끊을 수가 없어서 집을 버리는 여자예요. <대립군>은 지금껏 해본 작품 중 가장 어려웠어요. 처음 하는 사극이라 쉽지 않았고, 겨울에 한복을 입으니 춥고…” 신기하게도, 이솜이 매번 인터뷰에서 원하는 색깔의 작품을 대강 언급하고 나면 말하는 대로 이뤄졌다고 한다. 요즘 그녀의 관심을 끄는 건 로맨스다. 사소한 감정 하나로 온갖 에피소드가 피어나는 인간관계, 어떠한 콘셉트가 없이도 재미난 이야기를 증폭시켜 갈 수 있는 로맨스물을 해보길 바라고 있다. 또 한 번 말하는 대로 이뤄질까?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는 겁도 없이 뛰어들었죠. 하지만 연기란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다른 배우들의 말을 이제야 실감하고 있어요. 맡고 싶은 캐릭터, 하고 싶은 작품, 잘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이 연기를 할 때마다 더 강하게 생겨요. 이런 말하긴 왠지 쑥스럽지만, 꾸준히 길게 하고 싶어요. 무슨 일이든 그게 어렵잖아요.” 패션 모델을 지탱하는 건 몸의 매력과 더불어 화보나 쇼에서 보여주는 판타지다. 배우를 선언한 모델은 그 판타지가 깨지는 지점을 연기의 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 어느 누구의 지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포즈로 자신을 뽐낼 수 있었던 존재가 감독의 조련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로 태어날 수도 있다. 화보 촬영 시 모델을 향해 흔히 울려 퍼지는 칭찬과 추임새 따위가 없는 영화 촬영장에서 말이다. 다행히 이솜은 예나 지금이나 덧없는 추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 겁 없이 뛰어든 세상에 한창 눈이 뜨이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것을 흡수하는 천진한 아이, 혹은 새롭게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다. 만개하기보다는 오랫동안 시들지 않는 것도 멋진 길이다.

 

더 많은 화보 컷과 인터뷰는 <W Korea> 3월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