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그 후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전쟁 그 후

2016-11-09T10:29:15+00:002016.11.17|FASHION, 트렌드|

2016F/W 시즌, 수많은 디자이너들은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는 자신만의 캔버스로 밀리터리 무드를 선택했다.

2차 세계대전이 그 시절 유럽과 미국 패션계에 ‘긴축’을 강요했고, 시대적 분위기와 함께 당시 사람들은 밀리터리 룩을 입는 것 자체를 승리를 위한 패션이라 여겼다. 그때의 밀리터리 룩은 대부분 보이시한 실루엣에 그쳤고, 미학적 측면에서는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오늘날의 디자이너들에게 밀리터리 룩은 또 다른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재미있는 대상이 되었다.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있는 도화지처럼 말이다. 대전 이후 밀리터리가 다시 유행한 적이 있었다. 반전과 평화를 외치던 60년대에. 그 시절 존 레넌이 즐겨 입던 M-65 밀리터리 재킷, 이브 생 로랑이 제안한 아이코닉한 사파리 재킷은 당대의 밀리터리 룩이라 할 만했다. 그럼 오늘날의 밀리터리는? 2016년 가을/겨울은 마치 디자이너들에게 “이번 시즌 당신이 상상하는 밀리터리 룩은 어떤 것인가요?’ 라는 공통의 질문을 던졌나 싶을 정도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들의 대답이 다 달랐고, 하나같이 다채로웠고, 기발했다는 것. 먼저 패션은 사람을 꿈꾸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돌체&가바나는 말과 행동이 정확하게 일치된 컬렉션을 선보였다. 18세기 유럽의 의복과 군복을 로맨틱하게 재해석한 그들의 밀리터리 재킷은 화려한 견장과 금속 단추와 레이스 조각을 곳곳에 부착해 그들만의 로맨스를 투영했다. 하의로 선택한 7 부 길이의 조퍼스 팬츠 역시 그 시절의 의복을 꼼꼼하게 탐색하고 연구해 완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화 속 왕자님이 입을 법한 제복을 바로 지금, 현실로 고스란히 재현한 것.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 역시 18 세기 유럽 군복에 판타지를 더했다. 미켈레의 개인 계정 인스타그램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그가 요즘 중세 시대에 매혹됐음을 인지했을 터. 그 시절 귀족이 입었을 법한 장식적이고 성스러운 것들은 미켈레식 밀리터리 룩에 고스란히 담겼다. 잔뜩 부풀린 퍼프 소매, 풍성한 어깨, 화려한 금사 장식 재킷에는 러프하게 밑단을 자른 7부 팬츠와 조퍼스 팬츠, 그리고 메리제인 슈즈가 절묘하게 매치되어 신선함을 더했다. 또 다른 밀리터리 재킷에는 군복과는 상반된 이미지의 핑크 새틴 리본을 가득 장식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아름다움을 새롭게 제안했다. 눈에 익지 않지만, 그 이질적인 모습을 보고 누구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 그렇다면 밀리터리 룩이 넘쳐나는 이번 시즌, 이 룩을 이해하는 핵심 포인트는 무엇일까? 바로 그들은 각자 좋아하는 것들의 편린을 모아 하나같이 추상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요즘 유행하는 XXL 사이즈에는 관심도 없는 듯 몸에 꼭 맞는 벨벳 밀리터리 재킷에 복고풍 플레어 팬츠, 목에 두른 긴 스카프를 매치한 로베르토 카발리에서는 자신의 젊은 시절, 70년대를 회상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샤넬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들은 아이코닉한 소재 트위드로 밀리터리 코트를 만들고, 이번 시즌 큰 테마인 승마를 연상시키는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밀리터리의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그뿐이 아니다. 웨스턴 무드와 밀리터리 무드의 서로 다른 부분을 근사하게 조합한 페이와 주술적 요소를 중화시키는 용도로 밀리터리 코드를 이용한 지방시도 밀리터리 경계를 확장시킨 경우다. 한편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룩에 다 넣기도 전에 흘러내릴 것 같았던 디스퀘어드2 역시 밀리터리 코드를 재치 있게 풀어냈다. 밀리터리 재킷에 화려하고 장엄한 빅토리언 장식을 더하고, 아프리칸 무드는 슈즈에 집중 배치하고, 일본풍의 보디 스타킹까지 더했다. 너무 과하다고 생각되다가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들이야말로 누군가의 눈을 의식해 옷을 만드는 게 아니라 본인들의 호기심과 정열에 집중해 옷을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장식적인 코드를 더하기보다 깔끔하게 디자인된 밀리터리 코트 하나를 일상에서 근사하게 활용하는 방식에 무게를 둔 버버리에트로의 제안 역시 인상적이다. 슬립 드레스나 시폰 꽃무늬 같은 부드럽고 가녀린 소재의 드레스와 딱딱한 밀리터리 코트의 대비를 통해 재미를 주었다. 스트리트에서 밀리터리 코트를 활용하는 방식으로는 에트로와 버버리의 제안이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포인트는 오빠의 예비군 군복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으려면, 동시대적 감성이 깃든 아이템을 영리하게 매치해야 한다는 것. 클래식한 밀리터리 재킷을 입었다면, 하의는 태슬이 달린 재미있는 데님 팬츠를 매치하거나, 군복과는 전혀 상반된 무드의 레이스 스커트를 매치하자. 하의는 오버사이즈로 입되 상의는 몸에 피트되는 니트 톱을 입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밀리터리를 재치 있게 꾸며줄 간단한 포인트 아이템을 찾아 활용하는 것도 유용한 팁이다. 마지막으로 2016년식 밀리터리 룩을 가장 정확하게 정의해 표본을 제안한 브랜드는 바로 프라다메종 마르지엘라다. 이 둘의 노선은 전혀 다르지만, 확고한 철학과 일관된 원칙 아래 디자인을 했기 때 문이다. 프라다는 군복 중에서도 육군이 아닌 해군의 유니폼에서 영감 받은 룩을 대거 제안한다. 피코트 위에는 나이팅게일이 연상되는 코르셋이 레이어드되었고, 패션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비밀 일기장이 달린 목걸이까지 더해졌다. 뿐만 아니라 니트 소재 타이츠, 해군 모자까지, 프라다의 밀리터리는 군복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펼칠 수 있는 상상력의 끝을 보여줬고, 여기에 재단사의 노련함까지 더해져 더없이 완벽했다. 한편 메종 마르지엘라에 존 갈리아노가 투입된 후 제대로 놀란 건 모델들이 꼽추처럼 걸어 나온 지난 시즌의 크레이지한 쇼였고, 두 번째는 바로 이번 시즌 밀리터리 룩을 본 순간이었다. 마르지엘라의 아이코닉한 해체주의를 군복에 접목해 그 진가를 제대로 펼친 순간 말이다. 마르지엘라의 밀리터리 룩 몸통은 그저 평범한 밀리터리 재킷이며, 팔은 보머 재킷이고, 재킷의 밑단에는 플레어스커트가 달려 있다. 이리저리 해체한 뒤 재조합한, 딱 봐도 마르지엘라라는 신호를 온몸으로 드러내는 룩은 특히나 흥미롭다.

지금의 밀리터리 룩은 제2차 세계대전 시절의 한정적인 스타일만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수많은 실루엣에 밀리터리 요소가 더해지고 있으며, 유니폼이라는 흔적은 컬러에서만 찾아야 할 정도로 다채로운 변형이 시도되고 있다. 화려하고 장식적이기도, 해체적이기도 하며, 미니멀하기도 하다. 2016년을 기억하는 밀리터리는 이렇게 다채롭게 정의되지 않을까? 수많은 실루엣과 장식에 얹힌 밀리터리를 당신은 자기에게 맞는 애티튜드에 맞춰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