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 말고 예쁜 남자의 시대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나쁜 남자 말고 예쁜 남자의 시대

2018-12-20T23:05:06+00:002016.11.14|FEATURE, 컬처|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 위험한 시대. 나쁜 남자의 판타지는 가고, 안심할 수 있는 무해한 남자가 여자들을 사로잡았다. 박보검이야말로 그 완벽한 증거다.

A plant, painted white, photographed against a white background

연예인의 인기 척도가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비공식적인 통로는 카페 테이블이다. 카페에 앉아서 공기 중에 구름처럼 떠도는 대화의 파편을 붙잡아보면, 누가 위로 가는지 보인다. 2016년 가을 현재 그 이름은 박보검이다. 드라마와 주연 배우의 인기가 방영 주기에 따라 변하는 만큼, ‘대세 배우’의 자리가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건 복면가왕 자리 물려주듯 당연한 일이지만, 현재 박보검의 인기는 여성주의가 새로운 키워드가 된 작금의 사회 상황과 맞물려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박보검이 연기하는 <구르미 그린 달빛>의 이영 세자는 사뭇 전형적으로, 사극 판타지에서 왕족이라는 캐릭터의 이점을 이용해서 주도권을 쥔 남성형이다. 그는 재능이 있고 영민하며 정적들 앞에서 쉽게 물러서지 않는 남자다. 그러나 그는 가족은 물론, 자기보다 약한 백성에게 더없이 따뜻하다. 자신을 연모하는 하연에게는 단호하지만, 모욕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기에 자신이 사랑하는 라온에 대한 배려는 더욱 뚜렷이 표면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전체적으로 그간의 로맨스물이 지향하는 방향과 일치한다.

박보검의 이영은 과거 한국 드라마의 대세 남배우가 그러했듯이 ‘위버섹슈얼’이라는 남성형으로 묶일 수 있다. 자신감, 열정, 재능을 지녔지만, 여성을 배려하는 자상함과 의리가 있는 남성을 정의하는 이 단어는 2000년대 중반 수입되어, K-드라마의 남성 주인공을 묘사하는 말로 쓰였다. 하지만 그간 추상적으로 그려진 위버섹슈얼에는 “차가운 도시 남자. 그러나 내 여자에게만은 따뜻하겠지”와 같은 나쁜 남자의 그림자가 함께 어려 있었다.

강하면서 다정한 남자들은 피아노도 쳐줬지만, 여자가 모욕당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왜 말을 못해!”라고 윽박질렀다.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을 구하는 근사한 초능력으로 그녀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유리창을 우르르 깨기도 했다. 우리의 멋진 남자들은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죽을래, 같이 잘래”라고 소리를 지르고,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고 발로 차기도 했다. 모두 전통적으로는 낭만적으로 받아들여졌고, K-드라마라는 장르를 있게 한 명장면이었다. 남자가 물리적 힘을 발휘하면 폭력인데도 더욱 남성적이라고 여겨졌다. 연애 관계에서는 둘 중 한쪽이 개인 사이의 거리를 침입한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다가가야 하고, 이성애 관계에서 그 역할은 주로 남자에게 주어졌다. 보는 우리는 이런 남주인공들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고, 그들의 의도를 믿으므로 가슴이 설렐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데이트는 이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2016년의 여자들은 깨닫고 말았다. 데이트 폭력은 가끔 이렇게 낭만적인 접근과 남성적 박력으로 이해받고 피해자는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이 된다.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자신보다 물리적, 혹은 사회적 힘이 강한 남성과 연애하며 로맨스와 폭력이 혼용되는 지점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성애자인 여성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우리는 이제 사랑의 다양성을 배움과 동시에 기본값처럼 생각해온 이성애도 새로이 배워야 했다, <태양의 후예>에서 유시진(송중기)은 우르크에서 재회한 강모연(송혜교)에게 키스한 후에,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라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첫 키스라는 클리셰에서 그나마 수정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영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그는 처음 홍라온 (김유정)에게 키스 하려 할 때 가깝게 다가가고 그녀가 눈을 감을 때까지 기다린다. 즉, 접근의 순간에도 허락을 구하는 남자다. 그의 진심을 몰라 불안해하는 라온에게 그간 자신이 혼란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고백하고 앞으로 어떨 계획인지까지도 전한 후 마음을 얻으려 한다. 그런데도 신분의 차이와 개인의 비밀 때문에 라온이 주저하자, 밀어붙이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받아줄 때까지 수신호로 부드럽게 고백한 다.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 라온이 그를 말없이 떠났을 때 이별의 상처로 눈물 흘렸지만, 다시 만났을 때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이 순간의 이영은 다시 만난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섞여 있는 표정을 짓다가 라온이 그의 포옹에 화답하듯 그를 끌어안았을 때야 비로소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캐릭터와 배우를 혼동해서는 안 되지만, 새로운 남성이 나타날 수 있는 근간에는 역시 박보검이라는 배우의 개별적 특성과 매력이 있었다. 실로 단역부터 차곡차곡 필모를 쌓아온 박보검은 깊은 눈망울이나 깎아놓은 밤 같은 이목구비, 훤칠한 키 등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외모로 선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고통을 겪는 역을 대체로 연기했다. 비교적 작은 비중으로 연기한 배역들은 주로 잔악무도한 살인자에게 잡히거나 (<블라인드>), 역사의 희생양(<각시탈>, <명량>)이었다. <차이나타운> 에서는 한없이 맑은 심성으로 세상을 살다가 여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살해당해야 했다. 존재를 확실히 알린 <내일도 칸타빌레>에서는 손목 부상으로 좌절하는 첼로 천재인 윤후를 연기했다. 그는 까칠한 주인공보다도 단원에 다정하고,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일방적으로 굴자 “여자에게 이게 무슨 매너야”라고 날카롭게 나무란다. <너를 기억해>에서는 예외적으로 사이코패스 살인범이었으나, 그조차도 형에게 버림받았다는 괴로움으로 조종당한 것이었고, 결국은 칼에 찔려 사라지고 말았다. <응답하라 1988> 최택은 또래의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좋아하는 여자애를 깎아내리거나 짓궂게 대한 적이 없는 캐릭터였다. 일찍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 어린아이의 외모를 한 박보검은 위험하지 않은 남자의 이미지를 정교하게 쌓아온 것이다.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주어졌던, 납치당하고 각성을 위해 살해당하는 피해자 역할을 하면서 그는 여성에게는 동질감에 가까운 애틋한 느낌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재능 때문에 물리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천재형이라는 멋진 남자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구르미 그린 달빛>에 이르러 그는 상처가 있다고 해서 타인에게 쉽게 난폭해지지 않는 무해한 남자친구라는 남성형을 일구어낸다. 숱한 토크쇼에 출연하는 게스트들이 박보검의 인성을 증명하는 것도 이런 이미지를 공고히 한다.

보살펴주고 싶은 남자는 이상적 여성상으로 어머니를 요구하는 구시대적 인식에 여성을 묶어놓는다. 아직 신인인 박보검은 브로맨스 영화에서 형들과 어깨를 맞대며 지배권을 다투는 역으로 옮겨가는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 그때도 여전히 지금처럼 무해하다 말할 수 있을까. 배우에게 변신은 필연적이고 섬세한 연기력을 가진 그가 어떤 역을 맡든 기대할 수 있겠지만, 본연의 장점을 잊지는 않아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는 현재에 불안을 새로이 확인한 여성들에게 안심할 수 있는 남자로서 그 의미가 남다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