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여름보다 더 뜨거운 한철을 보냈다. 올림픽에서의 메달 획득 여부와 그 색깔에 상관없이, 만나고 싶고 만나야 할 국가대표 선수들이 있었다.

터틀넥은 아딘, 와이드 팬츠는 3.1 필립 림 제품.

태권도 이대훈
그는 무엇이든 흡수할 자세를 갖췄다. 삶에서 운동 외의 이야기를 하려면 말줄임표부터 붙고 보는 많은 국가대표와 달리 세상에 관심이 많다. 지금은 잠시 멈췄지만 영어 과외도 받았고, 기타도 연습했다. 트레이닝복 외의 옷차림은 너무 모르고 산다는 생각에 패션을 잘 아는 이가 권하는 옷은 일단 입어본다거나, 인스타그램 테마가 영화인가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영화와 대사를 기록한다. ‘운동이든 뭐든, 개척하지 못할 거면 모방이라도 잘해야 한다’고 예상치 못한 말도 뱉는다. 워낙 꽃미남이기도 하지만, 이런 생기 역시 이대훈의 반짝이는 인상을 만들 것이다. 8강전에서 만난 요르단 선수에게 패한 후, 상대 선수의 손을 들어주고 박수 치면서 보인 환한 모습에도 그런 반짝임이 있었다. “그 잠깐의 행동이 화제가 되어 놀랐어요. 스포츠에서 함께 경기 치른 선수의 손을 들어주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닌데.” 태권도는 유독 ‘경기가 재미없다’는 반응을 얻곤 하는 스포츠다. 기량을 갈고닦은 선수가 제대로 된 발차기 한 번 못하고 시간이 가버리기도 한다. “왜 태권도만 재미없게 생각하느냐는 말은 못하겠어요. 선수인 제가 봐도 재미없을 때가 있으니까요. 6분밖에 안 되는 경기 시간 탓이 있을 거예요. 90분짜리 축구 경기도 그 시간 내내 재밌을 수는 없지만, 하이라이트 모음만 보면 재밌거든요. 한쪽이 공격을 계속하고, 한쪽이 제대로 맞기만 해도 보는 이에겐 즐거워요. 그러기 위해선 경기의 룰 자체를 정비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겠죠. 선수가 경기장에 들어서면서 취하는 작은 제스처만 있어도 사람들은 그 모습에 흥미를 가질걸요?” 경기 중 무릎을 크게 다쳐 절뚝거리면서 끝내 동메달을 따낸 이대훈. 그는 알까? 이젠 이대훈 자체가 태권도의 흥미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셔츠와 패턴이 들어간 슈트는 모두 푸시버튼 제품.

배구 김연경
김연경을 한국 여자 배구의 현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현재에서 훨훨 날아다니지만, 한국 여자 배구 혹은 체육계를 둘러싼 현실은 그녀가 뻗은 손과 배구 코트 사이의 낙차만큼이나 큰 이질감이 있다. 선수가 컵라면을 먹고 뛰었다는 뒷이야기를 2016년에 듣게 될 줄이야. 여자 배구팀이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하며 끌어올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김연경은 귀국 후 방송과 많은 일정으로 정신없는 와중에도 종종 리우에서의 순간을 곱씹는다. “우리 경기 시각은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괜찮은 편이었어요. 경기 중계도 방송 3사에서 다 해줬고요. 마지막 경기였던 8강 네덜란드전에선 그때까지 보여준 경기력에 비해 가장 안 풀렸던 것 같아요. 런던올림픽 때는 4강까지 올라갔는데 4년 전 그때 뭔가 더 잘했어야 했나 싶은 생각마저 들어요.” 하루의 어느순간 치고 들어오는 후회는 어쩔 수 없지만, 귀국 직후부터는 스포츠 스타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경기 때마다 기합 소리를 내며 쉰 목소리는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신나게 노래 부른 덕분에 완전히 잠겼다. 만나는 사람들은 ‘장하다’ ‘잘했다’는 말을 들려준다. “예전에는 은메달을 따도 죄송하다고 말하는 분위기였는데, 이젠 선수들 자체도 메달 색에 상관없이 기뻐하고 만족하는 게 보여요. 격려하는 국민들의 정서도 그렇고 뭔가 변하긴 변했어요.” 김연경의 할 말 하는 여유와 털털함 앞에선 그녀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일지 괜한 궁금함이 생긴다. 마음 졸이며 108배를 드리는 국가대표의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김연경이 봐도 쿨한 그녀의 어머니는 유별남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고. “제가 어쩌다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으려 치면 별것 아니라는 듯이 화제를 전환하는 분이죠. 서로 살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 사랑받고 자란 막내딸이에요. 절 보면 그게 딱 느껴지지 않아요?(웃음)” 국가대표로서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특유의 건강함으로 후배들 다독이고, 작전도 좀 생각하고, 이것저것 하며 운동 외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했다. 곧 소속팀이 있는 터키로 간다. 그곳에서는 자기 할 것만 잘하면 된다. ‘우리 누나’가 마음 편하게 훨훨 날아갔으면 좋겠다.

터틀넥은 준지 제품.

펜싱 박상영
올해를 결산하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2016년의 말은 ‘할 수 있다’로 낙점될 것이다. 펜싱 남자 에페 결승전에서 헝가리의 노련한 선수 임레 게저에게 뒤지고 있던 박상영. 그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10 14라는 스코어에서 내리 5점을 내며 금메달을 확정 짓기까지의 시간은 스포츠가 드라마로 치환될 수 있음을 오롯이 보여줬다. 에페 종목에는 ‘동시타’ 라는 것이 있다. 두 선수가 동시에 찌르면 각자 점수를 챙긴다. 상대 선수가 한 점만 내면 경기가 끝나는 상황에서, 박상영의 검은 찌르기에 앞서 막기부터 해내야 했다. 그는 막고, 찔렀다. 심장이 격렬하게 쪼그라들 것만 같던 시간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니 이렇게 쉽다. “뭐 하나 특출나게 잘하는 일이 없었어요. 칭찬받을 일이 없는 아이였죠. 그런데 중학생 때 펜싱을 하면서 처음으로 칭찬이란 걸 받았어요.” 그는 칭찬에 ‘매료’됐다는 표현을 썼다. 매료는 애착을 낳았다. “칼을 잡으니 눈빛이 달라지네.” 유소년 선수 시절 함께 훈련하던 여학생이 건넨 말이다. 박상영의 지난 페이스북 게시물 중엔 그가 재미로 본 2015년 신년 운세 내용이 있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었으니 새로운 희망이 활짝 열렸구나.’ 인터넷 토정비결은 정확하게 엉터리였다. 박상영은 작년 초 무릎 부상으로 수술을 하면서 위기의 시간을 보냈으니까. 이제 끝났다는 수군거림도 들려왔다. “심리 치료를 받으면서 종이에 펜싱은 ‘재밌는 놀이’라고 쓰곤 했어요. 그리고 하기 싫을 땐 검을 놓고, 좋을 땐 하루종일 검을 붙들고 살았죠. 뭘 하든 일이라고 생각하면 따분해지지 않나요? 즐기면서 하면 능률도 훨씬 좋아요.” 비장함과 절박함보다 즐기려는 마음이 먼저 보이는 국가대표. 올림픽 무대에선 가끔 숨을 못 쉴 정도로 공기가 다르다는 선배들의 경험담에 짓눌리지 않았던 스물두 살. 올림픽을 축제로, 스포츠를 놀이로 여기는 박상영의 태도에서 새 시대를 여는 젊음의 기운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