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스웨그 가득 머금은 래퍼들의 하이패션 점령기.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크게 유행한 ‘힙합 스타일’을 떠올리면 대부분 이렇다. 끝내주게 펑퍼짐한 타미 힐피거 티셔츠에 시대를 풍미한 푸부 힙합 바지, 뭉툭한 팀벌랜드 워커, 겹겹이 걸친 블링블링 체인 목
걸이와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힌 열 손가락 반지까지! 당시만 해도 힙합 가수들에게 패션은 스포티 무드가 섞인 캐주얼 스타일이 전부였다. 비속어와 욕설이 난무하고, 마약, 범죄 문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지는 힙합 가사들은 고결한 상류층의 전유물인 하이패션과는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 음악 장르였다. 베르사체, 루이 비통 등 화려한 럭셔리 브랜드 이름 역시 랩 가사에 자주 등장했지만 그저 과시하기 좋아하는 래퍼들의 짝사랑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런데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세상이 바뀌어 정반대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내로라하는 럭셔리 하우스의 수장들은 너도나도 SNS를 통해 잘나가는 래퍼들과의 우정을 과시하고, 패션위크 시즌마다 그들을 친히 프런트로로 초대한다. 광고 캠페인의 모델로 모시는건 물론이고 특별한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제안하는 등 래퍼들을 향한 패션계의 구애가 끊이지 않고 있다.

프라다, 돌체&가바나, 발렌시아가, 헬무트 랭, 알렉산더왕, 이자벨 마랑, 까르띠에, 질 샌더, 랑방, 발맹, 고야드, 디올, 톰 포드…. 이들은 모두 현재 가장 패셔너블한 래퍼로 꼽히는 에이섭로키(A$AP Rocky)의 노래 ‘패션 킬라(Fashion Killa)’에 등장하는 브랜드다. 패션에 관해선 비범한 취향을갖고 있다는 걸 만천하에 과시하듯 에이섭로키는 톰 브라운, 릭 오웬스, 라프 시몬스, 앤 드뮐미스터, 다미르 도마 같은 디자이너 브랜드도 줄줄이 언급했다. ‘공연할 시간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빼곡한 패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로키. 쿨하기로 소문난 ‘왕 스쿼드’의 일원인 만큼 알렉산더 왕의 쇼와 파티에 참석해야 하고, 디올 옴므 쇼에 들러 크리스 반 아셰와 인사도 나눠야 한다. 최근엔 구찌 스카잔과 자수 데님 팬츠를 입고 쇼장을 찾았는가 하면, 지난달 2017 S/S 남성 컬렉션에선 J.W.앤더슨과의 단독 캡슐 컬렉션 론칭을 알리기도 했다. ‘주크박스 조인트’ 뮤직비디오 촬영 때 J.W.앤더슨의 옷을 입어본 이후 브랜드 홍보대사를 자처하고 나선 로키가 조너선과 함께 비니와 트랙슈트, 퍼 재킷을 선보인 것! 오프화이트의 전신인 파이렉스는 물론 슈프림, 후드 바이 에어, 피갈 등 일찌감치 유스 컬처를 앞세운 스트리트 브랜드의 전성기를 이끈 장본인인 로키는 최근 들어 럭셔리 브랜드와 스트리트 브랜드를 오가며 보다 진화한 사토리얼적 면모를 뽐내고 있다.

NEW YORK, NY - JUNE 01:  Rapper Kanye West and singer Pharrell Williams pose on the winners walk at the 2015 CFDA Fashion Awards at Alice Tully Hall at Lincoln Center on June 1, 2015 in New York City.  (Photo by Larry Busacca/Getty Images)

원조 힙합 패셔니스타 카니예와 퍼렐.

힙합 스타일이 단순히 커다란 후드티를 걸친 게 아님을 보여준 하이패션 래퍼 1세대를 꼽자면, 이제는 명예의 전당으로 모셔도 될 법한 퍼렐 윌리엄스와 카니예 웨스트가 있다. 루이 비통, 샤넬, 셀린, 발맹, 지방
시와의 인연은 물론 다양한 협업 프로젝트, 캡슐 컬렉션까지, 이들이 직접 입고 등장하거나 조금이라도 관여한 일은 하나같이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엄청난 판매로 직결됐음은 물론이다. 미국에선 카니예와 A.P.C의 협업 제품이 단 하루 만에 완판되었을 정도. 에너지 넘치는 카니예는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컬렉션 이지(Yeezy)를 론칭했고, 지난 2016 F/W 시즌 쇼에선 신생 래퍼인 릴 야티(Lil Yachty)를 모델로 등장시키며 자신을 이을 래퍼 패셔니스타를 홍보하는 데 발 벗고 나서기도 했다.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과시성 짙은 모습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자신의 성취를 당당하게 과시하는 모습도 힙합 정신의 일부이니 그야말로 새로운 힙합 부르주아 시대를 연 래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베트멍의 첫 런웨이 쇼로 파리 전체가 들썩였던 지난 2016 S/S 시즌, 일찍이 뎀나 바잘리아의 활약상을 눈여겨본 카니예는 버질 아블로와 뎀나의 쇼장을 찾았다. 둘 사이엔 래퍼 트래비스 스콧이 함께했다. 에이섭로키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며 밀레니얼 세대의 추종을 받고 있는 힙합 패셔니스타 말이다. 무대 위에서도, 일상에서도 베트멍을 즐겨 입기로 소문난 트래비스는 리카르도 티시와 돈독한 친분을 자랑하며 최근 지방시 스쿼드 ‘러브갱’에 합류한 래퍼이기도 하다.

“힙합 자체도 어떤 면에서 패션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인 거죠. 패션, 문화, 음악, 예술이 모두 합해진거예요.” 힙합 컬렉티브 ‘프로 이라(Pro Era)’로 활동하는 래퍼이자 캘빈 클라인의 #mycalvins 시리즈 캠페인에도 등장한 조이 배드애스(Joey Bads$$)의 말이다. 힙합에선 타 장르와는 달리 유독 컬렉티브 그룹이나 크루, 스쿼드 개념이 자주 등장한다. 공동체라는 개념을 통해 제작과 피처링, 뮤직비디오 등 음악에 관한 스타일과 노하우를 뮤지션끼리 공유하고 발전시켜가는 게 일반화됐기 때문. 이를 통해 래퍼들은 빠른 속도로 팬덤을 넓혔고, 스트리트 트렌드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패션과 문화 전반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갖게됐다. 그러니 상업적인 이득을 항상 따져야 하는 패션계에서스타일 좀 아는 래퍼들의 후광을 탐하는 건 당연한 일일 터. 더군다나 무엇이든 특유의 스웨그를 통해 자신만의 캐릭터로 흡수하는 래퍼들에겐 자신감, 자본력, 창의력이라는 무기가 있고, 이것이 진정한 하이패션을 자유자재로 영위할 수 있는 센스를 허락하니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