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며시 자리 잡은 당신

데이비드 핀처의 2008년 작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는 짧지만 강렬한 장면이 있다. 벤자민(브래드 피트)과 엘리자베스 애봇(틸다 스윈턴)이 어느 날 밤 영업이 끝난 호텔 레스토랑에서 캐비아와 보드카를 즐기는 신이다. 그 장면에서 엘리자베스는 소매가 짧은 드레스에 조그만 퍼 스톨을 걸쳤다. 영화가 끝난 뒤 생각했다. 왜 카디건이나 재킷이 아닌 퍼스톨이었을까? 아마 비중이 작아도 존재감이 확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퍼는 지난겨울부터 다각적인 방식으로 변주되고 있다. 퍼 소재 자체가 장식적 요소로 활용되고 있는 것. 이번 시즌 블루종의 소매 부분만 퍼 소재로 대치한 마크 제이콥스나 상반신 중간 부분에 덧입는 밴드 형태의 퍼 스톨을 내놓은 프로엔자 스쿨러 등은 이 조류 안에서 퍼의 보온성과 장식적인 효과를 영리하게 계산한 디자이너들이다. 그런가 하면 소매 끝이나 주머니 등 옷의 일부분에 컬러풀한 퍼를 디테일로 차용한 구찌, 프라다, 마르니의 디자인은 퍼의 장식적 측면에만 집중한 예. 재미있는 사실은, 이 경우의 퍼는 실제 보온 기능이 크지 않음에도 ‘따뜻해 보이는’ 시각적 효과는 분명하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보온성이 없는 퍼는 쓸모 없다고 일침을 가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비즈와 프린지 등 화려한 장식 모두가 의미 없는 것 아닐까? 방한용 소재를 넘어 미학적인 측면의 장식으로 기능하게 된 새로운 퍼를, 우리는 좀 더 가볍게 즐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