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강수진이 무대를 떠난다. 하지만 한국 무대 은퇴 공연을 두 달 앞두고 만난 그녀에게서는 이별의 그늘이 느껴지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오직, 그리고 여전히 뜨거운 사랑뿐.

은퇴라는 단어는 곱씹고 되풀이할수록 무거웠다. 30년의 현역 생활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발레리나는 과연 어떤 기분일까? 무대와 헤어지는 비감에 젖어 있거나 고된 훈련의 의무를 내려놓는 해방감에 이완되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짐작했지만, 마주 앉은 강수진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바람처럼 재빠르게 화보 촬영을 마친 그녀는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스케줄의 틈을 벌리고 쪼개서 자신의 마지막 공연을 준비하느라 120% 스스로를 가동시키는 상태였다. 자기 자신과 주변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활력의 한가운데서, 지난 발레 인생을 돌아보는 회고의 질문을 잔뜩 준비했던 나는 머쓱해졌다.

“사람에게는 의욕을 불어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굉장히 중요해요. 아주 조그만 킥 있잖아요. 그런 게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거든요.” 1년 반째 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후배들에게 그런 킥을 주어 성장시키는 데 몰두해 있다. 발레단 색깔에 잘 맞으며 단원들을 성장시킬 프로그램을 만들고 공연을 올리면서 맛본 희열은 발레리나로서 무대에 서는 것 이상이었다. 그리고 ‘오늘 당장 발레를 그만해도 후회가 없지만’ 팬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작품 <오네긴>을 골랐다. 그가 평생을 보낸 슈투트가르트 발레단과 함께하는 11월 6일부터 8일까지의 이 공연이 한국에서 발레리나 강수진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년 독일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2016년 7월 22일 공식 은퇴한다. 이 날짜는 강수진의 남편 툰치 소크만의 생일이기도 하다.

“발레에 대해 나는 욕구 불만이 없는 상태 같아요. 내가 하지 못한 게 없기 때문에 더 바랄 게 없고, 그래서 후배들에게 백퍼센트를 물려줄 수 있어요.” 강수진에게 어울리는 건, 적어도 지금은, 뒤돌아보고 손을 흔드는 우아한 고별 행진이 아니다. 직진밖에 모르고 평생을 달려온 이 여자에게는 은퇴마저도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후배들에게 발레의 기쁨을 알려주고, 팬들에게는 더 사랑할 한국 발레를 물려주는 큰 그림 속에서 강수진이라는 한 사람은 산산이 부서지고 사라진대도 행복해 보였다.

11월 한국 은퇴 작품 <오네긴>을 앞둔 기분이 어떤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슬픔 이 끼어들 틈이 없다. 발레리나로서만 살아갈 때는 공연에만 집중하기에 충분한 삶이었지만, 이제는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서의 삶도 함께 하고 있기에 시간을 쪼개서 공연을 준비하는 중이다.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업무를 하면서 연습을 병행 해야 하니 힘들겠다. 가장 중요한 건 국립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서의 해야 할 일, 그리고 발레단 단원들이다. 스케줄을 조정하고, 새벽에 일어나는 시간을 앞당기면서 연습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쉽지는 않지만 행복하게 하고 있다.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하면 더 어렵고 힘들어진다. 그냥 현실에 충실히 하 고 있다(웃음).

발레리나로서의 일만 할 때보다 더 어려운가? 내 인생에서 쉽게 공연을 준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평생을 몸담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언제나 여러 가지 작품을 병행 연습하며 지냈다. 또한 투어 공연을 다닐 때에도 언제나 복수의 작품을 준비했기에 늘 피곤했다. 하지만 그렇게 준비한 공연에서 관객들 앞에 백퍼센트를 보여준 다음 찾아오는 피곤함은 나쁜 느낌이 아니다. 그 느낌 속에 내가 발레리나로서 살아가는 리듬이 있다. 지금 내 자리는 발레리나로서의 리듬만 느낄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그렇기에 공연을 앞둔 시점에서는 발레리나로서의 상태로 돌아가려 애쓰고 있고, 쉽지만은 않다.

체력적인 어려움은 없는가? 경험이나 나이가 오히려 도와주는 부분이 있다. 예전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던 연습도, 더 집중할 수있기 때문에 압축적으로 줄일 수 있다. 지금 하는 움직임 가운데는 아무리 젊었어도 못했던 것들이 있다. 여전히 계속 배우는 중이고,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걸 느낀다.

한국 관객에게는 당신의 공연이 마지막이다.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마음을 짐작은 하지만, 나는 그 어마어마함에빠져 있을 시간이 없다. 당장 이번 주말에는 안무자 육성 프로그램을 무대에 올리고, 다음 주말에는 아카데미 학생들과 발레단이 함께하는 갈라가 예정되어 있고, 그다음 주에는 ‘해설이 있는 전막 발레’ 돈키호테, 그다음엔 왕자 호동… 이렇게 꽉 찬 일정을 생각하면 슬퍼할 겨를이 없다.

국립발레단 단장 직 제안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나? 이번에 승낙하지 않으면 영원히 인연이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시도해보지 않고, 경험해보지 못한걸 나중에 후회하면서. 그렇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이 아니면 한국에서 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한 번쯤 후배들에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욕과 열정을 전해주고 싶었다. 어제 연습을 보면서도 한 스텝에서 다른 단계로 올라가는 무용수가 보였는데, 너무 행복하더라. 자기 발전의 맛은 맛있는 음식처럼 중독되는데, 한번 맛보면 사람이 달라진다. 그 중독성이야말로 살아가는데 중요하다.

새로운 업무가 힘들지는 않았나? 예산이나 행정 같은 분야는 까다로웠을 텐데. 잘 이해 못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하게 되더라. 직원들이 많이 가르쳐주고 도와줬다. 살면서 여러 분야의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녔고 여러 조직을 겪어봤지만 국립발레단만큼 잘 되어 있는 곳은 드물다. 하고자 마음먹은 일은 콤팩트하면서도 순간적으로 만들어내는 유능한 직원들이다. 발레에서 군무, 솔로, 주역, 스태프 모든 게 잘 맞아야 한 공연이 이뤄지듯이 모든 시스템을 운영하려면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 코치를 하면서 후배들의 성장과 발전을 볼 때 행복하다.

당신은 노력을 이기는 재능이 없다는 말을 종종 해왔지만, 사실 그렇게 지치지 않고 노력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재능인 것 같다. 남편이 늘 놀라워하는 부분이다. 물론 거꾸로 내가 못하는 걸 남편이 갖고 있지만. 나는 목표를 크게 잡지는 않지만 고집이 있다. 그걸 이루고 넘어가지 않으면 다음 날 후회하면서 일어나는 게 불편하다. 예전에 후회가 쌓여 엉덩이에 불이 붙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거쳐 이렇게 달라졌다.

무대에 서지 않는 것이 허전할 때는 없을까? 예술감독으로 일하는 1년 반 동안 내가 무대에 서지 않아도 한 번도 허전한 적이 없었다. 이런 얘기를 나누지 않으면 무대에 서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 생각도 안 난다. 희한하다.

 

최고를 누렸고, 모든 걸 쏟아 후회가 없기 때문일까? 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살아왔다. 모든 작품을 했고, 오늘 발레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어도 받아들일 수 있다. 아쉬울 필요가 없는 건 언제나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한국 발레에는 사랑할 발레리나, 발레리노가 너무 많다. 강수진을 떠나보내는 슬픔이 있다면, 그다음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떤 발레리나로 기억되고 싶은가? 그런 것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발레는 종합 예술이니까, 예술인으로서 기억에 남으면 좋고 아니면 할 수 없다. 열심히 살다가 떠나면 그걸로 행복하다. 남아 있는 분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지만 그걸 존중한다.각자 다르게 기억할 그분들의 몫이다. 많은 분들에게 추억을 줬다면 거기에 감사드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