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의 장그래가 바로 자기라고 말하는 3인이 있다. 그들이 들려주는 고달팠던 신입사원 시절 이야기.

너의 목소리가 들려

시험과 과제에 치이며 살던 학생 시절, 나는 하루빨리 사회인이 되고 싶었다. 시험과 과제의 압박으로 밤을 새우는 일이 없는 것만으로도 나의 인생은 훨씬 더 즐거울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하던 시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모든 환상은 입사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산산 조각이 났다. 호기심과 오기, 취업에 대한 무언의 압박에 우연히 발을 들이게 된 홍보 회사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길 반복했다. 육체적 피로는 물론 나무랄 데 없던 정신 상태마저 너덜너덜해졌다.

수만 가지 어려움 중에서도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어이없게도 전화 통화. 전화의 무시무시함을 모르는 순진한 학생들은 분명 “전화 통화? 그게 도대체 뭐가 어렵다고 그래?”라고 말하며 깔깔 웃을 것이다. 음식을 배달시켜 먹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정인 전화를 거는 것조차 꺼리는 나는 이 회사에 들어온 이상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화를 해야 했다. 기자, 제작물 담당자, 기타 관계자 등등 얼굴도 모르는 유령 같은 사람들과 통화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내 목소리라도 좀 고왔으면 얘기가 달라졌을까? 나의 중저음 목소리 또한 내가 통화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에(어릴 적부터 전화를 받으면 내 남동생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의 통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 쉽지 만은 않았다. 게다가 뻥 뚫린 회사는 왜 내가 전화만 하려 하면 유독 조용해지는지! 마치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누군가가 도청하고 있을까봐 나는 수화기를 드는 순간부터 늘 조마조마했다. 특히 답변해주기 곤란한 질문을 하는 기자나 전화해서 다짜고짜 화를 내버리는 사람과 통화할 때는 그야말로 심장이 쫄깃해진다는 말의 뜻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하지만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던가. 주변 선배 및 팀장님들의 통화 패턴, 말투, 응대법을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깨우친 가장 값진 교훈 하나. 자기 일을 처리하기에 바쁜 회사 사람들은 나의 통화 목소리에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3년 차 사회인을 앞둔 지금도 나를 난처하게 하는 전화를 받으면 ‘어버버’ 할 때가 있지만, 이제는 적어도 내가 당황했다는 것 정도는 자연스레 숨길 수 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한 옥타브 높인 또 다른 나의 목소리로 전화를 건다.

– 박소현(홍보대행사 AE)

 

막내라는 단어에 대하여

순수문학 작가로는 아무 때나 드럭 스토어에 가서 쇼핑할 자금조차 마련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방송작가를 양성하는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수료 전 당시 유명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위로는 선배가 8명 있었고, 막내도 나 말고 둘이나 더 있었다. 회사 안에서는 막내지만 어쨌든 작가라는 타이틀을 거의 거저 받아든 우리는 서로 연대했지만 경쟁했다. 섭외를 담당한 막내 연대는 얇디얇지만 끊어지지 않는 낚싯줄 같았다. 회의 시간에 돋보이고 선배들 눈에 들기에 급급했다. “이 사람 누가 섭외했어? 완전 괜찮다”라는 말 한마디가 고파서 전국을 이 잡듯 뒤졌다.

그땐 뭐가 그렇게 항상 억울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나 치열하게 사는 나를 왜 격려해주지 않는지, 나의 귀한 성취를 왜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사소한 실수 하나에 왜 감당 못할 면박을 주는지, 그리고 이직을 통보했을 때 왜 서운한 눈치 한번 없이 “응, 그래”라고 답했는지, A4용지 박스 두 개쯤에 들어갈 짐을 꾸려 사무실을 나올 땐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억울한 이유는 몇십 개도 더 말할 수 있었다. 잊을 만할 때쯤 반복되는 상황 속에 나는 지쳐갔다.

2주 전쯤이었던 것 같다. 막내의 퇴사 소식에 나도 “응, 그래.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겠지”라는 말을 뱉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려다 문득 실소가 터졌다. 갑자기 그간 물음표로 남아 있던 많은 장면이 통으로 이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 내게 “이제 언니라고 불러도 돼”라고 했던 몇 분에게 괜스레 안부 연락을 드렸다.

커리어가 쌓일수록 작가의 삶은 점점 더 치열해진다. 막내라는 단어에 담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젊음, 그리고 작은 실수에 대한 면피권이 오히려 부러울 정도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스스로를 지켜야 하고 감정적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체득하게 된다. 그러니 치열한 작가 생활 속 어린 후배의 작은 감정 하나까지 살뜰히 챙기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후배가 갑자기 나간다고 하면 ‘왜 갑자기 나간다 하지? 뭐가 서운했나?’, ‘더 좋은 곳 갈 수도 있으니 발목 잡진 말자’ 같은 생각이 퐁퐁 샘솟아 입을 닫았을 것이다. 나는 이제야 선배들의 눈빛을, 그들의 심드렁함 속 숨은 외로움을 읽는 연차가 되었다. 세상 모든 막내의, 그리고 작가라는 이름으로 매 순간 치열하게 사는 우리들의 삶을 응원한다.

-은빛나 (방송작가)

 

괜찮아, 신입이야

대학생 때 인턴을 하며 금융계 특유의 긴장감과 치열함에 매력을 느꼈던 나는 운 좋게 외국계 금융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외국계 회사 특성상, 국내 기업들에서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하는 연수가 없기에 입사하자마자 바로 실무에 투입되어 눈치껏 보고 배우고 업무를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9시부터 3시까지 장이 열리는 시간에는 물론이고 장이 끝나고도 업무가 진행되는 증권사에서는 모두가 늘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결국 나는 모르는 것이 있어도 업무에 방해될까 조심스럽게 질문하고, 틈틈이 선배들이 가르쳐줄 때 최대한 신속 정확하게 받아 적고 배운 것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증권사에 입사 후, 가장 당황했던 것은 수많은 시스템에 빠르게 적응하기였다. 거래소 시스템, 예탁원 시 스템, 금융투자협회 시스템, 증권금융 시스템은 물론이고 온갖 내부 프로그램부터 다양한 인증서 종류까 지, 외워야 할 것들은 끝이 없었다. 영어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나에게, 홍콩이나 인도 등에서 걸려오는 전화 속 특유의 억양은 매번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업계에서 줄여 쓰는 영문 금융 용어까지 더해져 하루 종일 긴장했다가 퇴근하면 그대로 쓰러져 잠들곤 했다. 게다가 개인 고객이 아니라 전문 투자자만 상대하는 외사 특성상 오가는 고객의 돈의 액수가 어마어마했기에 신속하되 정확해야 하는 습관을 길러야 했다. 무조건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게 좋은 줄만 알던 신입 시절 5억원을 고객 계좌로 입금 해야 하는데, 5천만원만 입금해서 대형 사고를 칠 뻔했던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지금도 나는 눈치껏 배우고 종종거리며 일을 처리하는 금융 회사 초보 직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강한 억양의 소유자가 건 전화에도 ‘Yes’ 하며 알아듣는 척하고 나서 마지막에 ‘Please Send Me an E-mail’이라 는 말을 덧붙이는 요령도 터득했다. 억 단위 숫자도 끝에서부터 세지 않고 한 번에 바로 읽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계산기는 마치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사람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두드릴 수도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작은 변화일지 모르는 것들이 나에게는 이유있는 자부심이 되었다.

-남유선(외국계 금융회사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