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정갈한 고급스러움을 숭배하는 이들에게, 한 벌 수트는 일종의 종교다. 그리고 조르지오 아르마니라는 이름은 이들에게 있어 의심 없이 믿고 따르는 교주인 셈이다.

1. 몸을 휘감는 소재가 일품인 수트. 1981 F/W.2. 알도 팔라이가 촬영한 1980 S/S 컬렉션.

1. 몸을 휘감는 소재가 일품인 수트. 1981 F/W.
2. 알도 팔라이가 촬영한 1980 S/S 컬렉션.

 

 

3. 현재와 비슷한 모양의 수트. 1979 S/S.4. 짧은 재킷과 크롭트 트라우저가 특징인 이번 시즌 수트.

3. 현재와 비슷한 모양의 수트. 1979 S/S.

4. 짧은 재킷과 크롭트 트라우저가 특징인 이번 시즌 수트.

 

 

수트는 기본적으로 잘 차려입은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선택하는 옷이다. 따라서 부드러움, 편안함과 같은 미덕은 수트라는 단어에는 내포되어 있지 않다. 남성복에서 시작한 수트는 개성의 발현이라기보다는 귀족들이 자신의 신분, 계급 의식을 드러내 려는 차원에서 입었던 옷이어서 1백 년이 넘는 현대 복식사 속에서 비교적 그 원형이 잘 보존된 아이템이다. 물론 시대와 유행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보이긴 하지만 기본 틀은 분명했기에 그 틀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은 것이 오래 입을 수 있고 럭셔리해 보인다. 격동의 현대 복식사 속에서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으며 유행이나 개성보다는 입는 사람의 품위를 드러내며 마음가짐을 격려하는 옷. 세상에, 패션계에서 이처럼 보수적인 아이템이 또 있을까?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회 초년생들은 전장에 나서는 군인이 군복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제대로 된 수트를 준비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날카로운 첫 수트의 기억’은 학교를 졸업하거나 사회에 첫발을 디딘 순간에서 시작할 것이다. 나도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는데, 패션 잡지의 에디터가 되고서 선배들로부터 받은 충고 중 하나는 ‘유행을 타지 않는 괜찮은 트라우저 수트를 한 벌 사라. 이왕이면 아르마니나 질 샌더를 사라’였다. 다수의 넥타이 부대 옆을 장식하는 펜슬 스커트 소대가 되기 싫어서(물론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다) 잡지 기자를 희망했기에 당시 유행하는 과격한 아방가르드 룩이 아닌, 평범하다 못해 몰개성해 보이는 수트를 사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선배 손에 이끌려 들어간 신세계 백화점 본점 매장에서 세일도 하지 않고 가격표 숫자 그대로의 돈을 지불하고 산 아르마니 회색 수트 한 벌은 아직도 옷장에서 굳건하게 살아남았다. 최근에는 1년에 채 한 번도 입지 않았지만, 9년 전 더블유 면접에서도 ‘전의’를 굳건하 게 다져준 그 수트는 오랜 전우와도 같은 존재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패션을 다루다 보니, 선배가 굳이 콕 찍어 두 브랜드를 추천 했는지도 이해가 간다. 질 샌더와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둘 다 난해한 예술의 해석을 추구하기보다는 패션의 현실 감각에 바탕을 둔 디자이너이며, 무엇보다 수트로 정평이 났기 때문이다.

 

형광색과 회색을 기본으로 한 이번 시즌 수트 역시 정교한 재단을 바탕으로 한다.

형광색과 회색을 기본으로 한 이번 시즌 수트 역시 정교한 재단을 바탕으로 한다.

 

 

피터 린드버그가 촬영한 1993 F/W 광고 비주얼.

피터 린드버그가 촬영한 1993 F/W 광고 비주얼.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잘 알려졌다시피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리처드 기어가 입었던 헐렁하고 큼직하면서도 피트감이 좋은 수트로 크게 히트를 치면서 남성복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양복점, 혹은 양장점의 ‘맞춤’ 수트 위주의 시장에서 기성복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는 시기에 아르마니가 스타일을 주도했다는 것도 아르마니 수트 신화를 전 세계적으로 퍼트리는 데 일조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여성복을 시작하면서 여성 트라우저 수트에 집중한 것은 사업 확대의 측면에서 당연한 선택이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의미하는, 어깨가 넓은 파워 수트로 시작했지만 시대에 따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 여성 활동의 다각화에 의해 그 디자인은 조금씩 변화를 겪었다. 현재 ‘조르지오 아르마니 여성복 수트’라고 하면 누구나 흐르는 듯한 실루엣의 고급스럽고 부드러운 트라우저 수트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브 생 로랑의 ‘르스모킹’으로 대변되는, 남자의 옷을 그대로 빌려온 듯한 날카로운 경직성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아카이브 사진을 보면 모델의 헤어와 메이크업을 제외하고서는 2014년 컬렉션에 올려도 손색없을 정도의 현대적인 테일러드 수트를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아르마니의 정수라 할 트라우저 수트는 시즌을 거듭하며 여성의 체형을 고려해 더욱 정교하게 재단되며, 새로운 볼륨과 커팅으로 전에 없던 디자인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특히 작고 둥근 어깨를 강조한 짧은 재킷과, 가녀린 손목을 강조하도록 너무 길지 않게 커팅한 소매, 넉넉한 통에 복사뼈가 드러나는 길이로 과감하게 크롭트한 트라우저가 특징이다. 수트에 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공식이 담겨 있다고 말하는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단 몇 밀리미터의 차이로 모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된다면서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듯한 라인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비결이라고 밝혔다. 최근 여성복에서 테일러드 아이템이 갖는 비율이 극적으로 높아졌고, 남성복의 원형에 가까운 것에서부터 가슴과 허리를 극적으로 강조하는 페미닌한 것에 이르기까지, 같은 수트라고 해도 표현할 수 있는 범위도 크게 확대되었다. 굳이 따지자면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재킷과 트라우저를 입고 있더라도 스스로 여성스럽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트, 즉 여자가 가장 여자다워 보이는 수트를 만든다. 물론 남성복의 구조적인 힘과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는 충실한 기본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말이다. 역시, 선배의 가르침은 버릴 게 하나도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