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 더블유 코리아 (W Korea)

숨바꼭질

2015-11-05T17:56:11+00:002014.06.19|피플|

말줄임표 같은 웃음 뒤로 숨어버리나 싶다가도 불쑥 솔직한 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유아인은 뻔하게 예상되는 정답이 아니라 쉽게 풀리지 않아서 흥미로운 질문에 가깝다.

간결한 디자인의 다홍색 재킷은 Nohant, 흰색 탱크톱은 Kimseoryong Homme, 팬츠는 Zegna Couture Collection by Stefano Pilati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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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츠와 검은색 라펠의 흰색 턱시도 재킷은 모두 Marc by Marc Jacobs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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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테랑>을 촬영 중이다. 크랭크업은 언제쯤으로 예상하나?
유아인6월 말까지, 어쩌면 7월 중순까지 찍게 될 수도 있다.

현장 분위기는 어떤가?
뭐, 편하고 빠르고 재미있다. 첫 악역이다. 배우를 인터뷰할 때면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캐릭터는 없는지 묻게 되는데, 사이코패스 살인마처럼 비일상적으로 센 악당을 언급하는 경우가 열에 일고여덟은 된다. 다들 센 거 좋아하니까. 나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베테랑>은 아주 심플한 권선징악 이야기다.
시원하게 뚫고 가서 악당을 해치워버리는 깔끔하고 통쾌한 영화다. 그 안에서 제대로 센 악의 축을 담당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한다고 하니 뭔가 특별하고 매력적인 악당이 아닐까 짐작하는 분도 많다. 전혀 아니다. 어떤 매력도 없이 그냥 나쁘다. 왜 이렇게 나빠졌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감독님께서는 영화 개봉 전에 광고 계약 같은 것도 빨리 마무리해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신다, 하하. 확실히 모험이다. (잠시 생각하다가) 나 잘하고 있는 거 맞나?

입체적이라기보다는 단순하고 선명한 캐릭터인 걸까?
입체적인 묘사가 생략됐다고 그게 곧 단순한 건 아닐 거다. 물론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캐릭터는 어떤 배우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성장하거나 뒤틀린다. 유아인이라는 배우를 대입하면서 류승완 감독이 기대한 바가 있을 것 같다.
그런 부분도 있다.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조태오를 연기할 때 발생하는 효과가 있더라. 20대의 나름대로 트렌디한, 그리고 잘 알려진 남자애가 센 가면을 쓰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강렬한 이질감을 느끼는 거다. 예를 들면 조금만 나쁘게 굴어도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다거나.

올해는 본인에게 꽤 의미가 큰 시기일 것 같다. <베테랑>도 그렇고, 직전에 끝낸 <밀회>도 그렇고, 연기자로서는 새로운 도전이라 할 만하다.
상황이 맞아떨어졌고 스스로의 의지도 있었다. <완득이> 이후로 한동안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맴도는 느낌이었는데 <밀회>를 통해 거기서 한 발짝을 떼게 된 것 같다.

얼마 전에는 노앙의 티셔츠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밀회> 시청자였던 40~50대 여성들이 백화점 팝업 스토어에서 그걸 그렇게 많이 사갔다고 들었다.
하하, 아이들 준다고 사가셨나 보다.

드라마 한 편의 영향력이 상당히 큰 것 같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밀회>는 두 사람의 ‘밀회’ 자체보다 그 사건이 오혜원에게 미치는 변화를 중요하게 다루는 작품이었다. 즉, 이선재보다는 오혜원에게 무게중심이 실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캐릭터를 견주어봐도 혜원이 입체적인 회색이라면, 선재는 천재적이고 낭만적이고 이상적이고 또 맑다.
그래서 최대한 사실적인 인물로 그리려고 했다. 마냥 비현실적인 천재가 아니라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캐릭터가 되길 바랐다. 내 의도를 떠나 이미 감독님부터도 워낙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이야기한 대로 <밀회>에서 나는 중심을 담당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리고 그건 <베테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곁에서 아주기능적인 역할을 한다. 오히려 그런 부분에 끌렸다.

<베테랑>의 조태오나 <밀회>의 이선재는 거칠게 말하면 전형에 가깝다. 새로운 디테일보다는 익숙한 빈칸이 많이 보이는 인물들이다.
일부 설정이 전형적이기는 하지만 글쎄, 선재가 전형적인가? 나는 사상 초유의 캐릭터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나?
감독님과 작가님이 인물을 창조해낸 방식, 표현해낸 방식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화법 덕분에 얼핏 전형적으로 보이는 설정 안에서도 인물이 전형성을 빗겨갈 수 있었다. 특별해서 신선한 게 아니라 평범하고 현실적이어서 신선했다.

며칠 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선생님을 인터뷰했다. <밀회>를 무척 열심히 봤다고 하시더라.
실제 클래식 연주자들께서 많이 보신 것 같다. 극에 등장하기도 한 손열음 씨는 칼럼까지 쓰시고. 연기자들이 무척 훌륭했고, 피아노 연주 장면의 핸드싱크도 그럴듯했다고 하시더라.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듣지 않았을까 싶다.

연습 과정은 어땠나?
그냥 했다. 연주자가 앞서 촬영한 영상을 흉내 내면서….

원래부터 피아노는 칠 줄 알았나?
아니다. 그런 장면은… 그냥 음악을 느끼면 되는 것 같다. 내 피아노 실력이 늘지도 않았다. 다만 <밀회>라는 드라마의 메커니즘 안에서 피아노 연주 연기를 하는 스킬이 생긴 것뿐이다. 다른 작품으로 가면 아마 상황이 또 달라질 거다.

짐작과 달리 피아노 연주 신에 대한 스트레스는 크지 않았나 보다.
그렇기도 하고… 별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대단하다고 말하는 게 좀 징그럽다. 물론 대한민국 드라마 중에서 피아노 신을 제일 잘 찍어낸 작품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장면의 핸드싱크가 내가 소화하는 대사들보다 특별한 무엇이었던 건 아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럼 어떤 게 어려웠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잘 기억은 안 난다. 사실은 굉장히 편하게 했다. 이렇게 막 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웃음). <밀회>뿐 아니라 다른 작품에서도 나는 연기를 어렵게 하는 편이 아니다. 캐릭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고민하거나, 끝내고 난 뒤 빠져나오기가 힘들다고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뭐든 정답은 내 일상, 내 삶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배우로서의 나한테는 평소의 내가 어떤 인간인가가 중요하다. 얼마나 순발력 있게 스스로를 몰아쳐서 내 자신을 열어 보일 수 있는가가 배우의 스킬 아닐까? 연기적인 기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적어도 내 방식은 그렇다.

한 인터뷰에서 제니퍼 로렌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슬픈 장면을 연기할 때 어머니나 강아지의 죽음을 상상해보라는 디렉팅을 받으면 짜증이 솟구친다고.
정말 그렇다.

차라리 이 순간에 눈물을 흘리라든지, 고개를 조금 더 돌려보라는 식의 분명하고 담백한 지시가 훨씬 도움이 된다는 거다. 자신에게 연기는 거창한 예술이기 이전에 은행원이나 외판원 같은 직업이라는 논지였다. 유아인의 생각은 어떨까?
그저 일로서 받아들이려고 꾸준히 마인드컨트롤을 한다. 너무 무겁게 느끼면 불행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냥 오라고 할 때 현장 나가고, 거기 가면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최대 출력을 낼 수도 있고… 모르겠다. 나 오늘 왜 이렇게 말을 못하지? (웃음) 나는 그냥 한다. 거창한 연기론을 펼치는 게 점점 징그러워진다.

연기를 말로 설명하는 일이 징그럽다는 뜻인가?
그런 모양이다. 나는 이런 연기자라면서 부글부글대는 일이 징그럽다. 그래서 더욱 그냥 하려고 하고,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문득 연기라는 게 목숨처럼 나한테 달라붙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안 하면 살아갈 수가 없고, 나한테 너무 큰 의미고…. 그러면 그 생각을 발로 걷어찬 뒤 창 밖으로 집어 던지려고 한다.

디자인이든 뭐든 다른 분야를 건드리는 것도 스스로의 주의를 흐트러뜨리기 위한 시도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관심도 많다. 하고 싶은게 간절하다기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문제는 그 일을 하면서 생기는 피로감을 내가 감수할 수 있을까다. 그런 자신이 없다면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새롭게 계획 중이거나 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나?
일단은 영화부터 찍어야 한다. 모르겠다. 리얼리티 쇼를 또 할지도 모르고.

예전에도 해보지 않았나. 경험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너무 좋았다. 나는 그런 게 팝아트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고, 새롭고 흥미로운 무언가를 던져주고. 말쑥하게 정제된 모습으로 연기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얼굴 팔린 사람이 이런 시도를 하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물론 배우로서의 내가 먼저겠지만, 그 외 ‘유명인’으로서의 나도 있다. 스스로가 일종의 퍼포머라고 생각한다. 나를 보여주는 데서 어떤 만족감을 느끼고 즐거움도
얻는다.

몇 년 전 더블유와의 인터뷰 때 자신이 지어놓은 울타리를 다른 사람이 침범하는 건 견디지 못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말한 내용과는 별개의 이야기인가?
내가 허락한 부분을 보여주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최선을 다해 완전히 까발려도 여전히 내게는 남이 볼 수 없는 세계가 있을 테니까.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누군가가 나를 침범하는 건 싫지만 내 스스로가 선택해서 오픈하는 건 괜찮다 정도가 아니라 집중해서 하고 있는 일 중 하나다. 솔직히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사진 올리고 사생활 공개하는 것과 그 본질이 별반 다르진 않다고 본다. 어쨌든 나는 아티스트니까 비슷한 행위를 새로운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것뿐이다.

자카드 소재의 드레시한 더블 브레스트 재킷과 팬츠는 모두 Kimseoryong Homme, 검은색 플립플롭은 Louis Leeman by Koon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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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랜드마크를 프린트한 오렌지색 코트는 Burberry Prorsum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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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실루엣을 연출하는 아이보리색 셔츠와 갈색 팬츠는 Prada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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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의 안판석 감독 인터뷰를 봤는데 내용 중 유아인에 대한 언급이 있더라.
아, 나도 읽었다.

‘아주 섬세하고 맑은 영혼인데다 느낌으로만 연기를 하는 게 아니고 감성을 지적으로 통제해가면서 연기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칭찬하는 걸 들으면 어떤가?
오그라든다, 으하하! (잠시 말을 쉬었다가) 눈물이 날만큼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그분과 함께 일할 수 있었으니까. 최고의 파트너이자 최고의… 신인 것 같다. 종종 이야기했는데 감독이나 작가는 나한테 신적인 존재다. 그런데 가끔은 그 신들이 일그러져 있기도 하다. 자리의 무게와 책임, 역할을 정확히 아는 리더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감독님 인터뷰를 읽으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했다. 나에 대한 칭찬은 징그러웠지만.

칭찬 듣는 걸 힘들어하나 보다.
두 개의 마음이 있다. 감독님 칭찬을 스크랩해서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마음 하나,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마음 하나. 종방연 때 말씀을 드리기도 했는데, 극 중에서 선재가 오혜원에게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고 난 뒤 알 수 없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나? 신기하게도 그 장면을 찍은 뒤 연기하면서 가장 듣고 싶었던 평가를 감독님으로부터 들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나를 발탁하고 잘 이끌어주신 많은 분들이 계셨다. 하지만 특히 그 순간에 선재가 느꼈을 법한 감동을 경험했다. 나한테는 오혜원 선생님 같은 존재인 거다.

어떤 말씀을 하셨던 걸까?
연기를 참 세련되게 한다고 하셨다. 하하.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참 어렵다. 예전에 뵈었던 어떤 감독님은 내가 기능적인 연기에 서툴다면서 연속극을 좀 해봐야 한다고 하신 적도 있다. 나를 최대한 활용하기보다는 그냥 본인 틀에 맞추려고 하신 거다.

‘세련된 연기’라는 건 참 세련된 칭찬 같다.
내가 ‘세련병’이 좀 있다. 친구들이 나한테 하는 이야기다. 인간은 끊임없이 촌스러움에 빠지지 않나. 부끄러워서 감추고 싶어도 또 어디서 불쑥 구질구질한 내가 튀어나온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과해지고 지저분해지고 캐릭터와 상관없는 배우의 욕망이 역할을 오염시키곤 한다. 세련되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쓴다는 건 결국, 내가 절대로 세련된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물론 그 와중에 뭔가를 성취하며 조금씩 나아가기는 한다.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그 순간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꽤 감격스럽다.

한참 칭찬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 욕은 어떤가?
할리우드 유명인들이 자신에 관한 험담 트윗을 읽는 <지미 키멜 라이브>의 클립을 트위터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 영상을 너무 좋아한다. 한국에서는 그런 농담을 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아무튼 연예인도 팬들도 매사에 심각하게 반응하는 대신 좀 쿨해질 필요는 있다고 본다. 대중이 건네주는 사탕만 기다리며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돌발적인 행동도 하고 간도 보면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려고 한다. 안 그러면 너무 갑갑하니까. 뭔가 사건이 터지면 이민이나 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난 사실 아주 현실적이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인간이다. 왜 그래야 하나. 바꾸면 되잖아, 조금씩 천천히. 그렇게 생각한다.

황정민과 공연하는 <베테랑> 이후의 작품도 일찌감치 결정을 했다.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을 다룬 이준익 감독의 <사도 : 8일간의 기억>인데 송강호, 문근영 등이 함께 캐스팅된 상태다. 공교롭게도 원톱으로 나서기보다는 앙상블에 섞여야 하는 작품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선배님들과 앙상블을 이루면서 묻어가고 싶은 욕심이… 있나? 김희애 선배, 황정민 선배, 송강호 선배, 다 어마어마한 분들이다.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고 싶기도 했고, 부담도 덜고 싶었던 것 같고.

<밀회>를 보면서 유아인이 상당히 좋은 ‘상대역’이라는 생각을 했다. 함께하는 배우의 감정을 잘 받아내면서 장면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고조시킨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하, 그럼 잘 받아야지, 던지겠나? 그게 다 처음부터 주기를 잘 줘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상대역을 만난다는 건 목표로 삼을 만한 일이다. 김희애 선배는 최고였다. 직접 호흡을 맞추기 전에는 솔직히 오해도 했다. 관객이나 시청자의 눈으로 봤을 때는 워낙 정확하고 말끔한 연기를 하시는 분 같았으니까. 내가 계산에 없는 무언가를 했을 때 잘 받아주실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좋았다. 많이 배웠다는 말을 무척 싫어하는데 실제로 많이 배우고 느꼈다.

스물여섯에는 교복을 입고 <완득이>에 출연했으며, 스물아홉인 올해는 <밀회>에서 스무 살의 이선재 역할을 맡았다. 실제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자주 맡았는데 <베테랑>의 경우는 어떤가?
내 또래거나 그보다 좀 높은 정도일 거다. 기획전략실의 팀장이니까. 그러고 보니까 이런 식으로 ‘실장님’을 하게 됐다. 다른 이야기인데 내가 좀 변태 같은 습성이 있다. 실장님이나 본부장님 하기 싫다고 떠들고 다니더니 결국 이런 파렴치한 실장을 하면서 사람들 뒤통수를 치려고 한다. 그런 욕구에서 벗어나질 못하나 보다. 미움 받을 짓을 사서 하는 거다. 실제의 나는 너무나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인데, 그런 나약함을 상쇄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날 한번 미워해보라며 도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뭔가 일그러진 방식으로 밸런스를 맞추려고 든다.

내년이면 서른이 된다. 30대에는 많은 것들이 바뀔 거라고 예상하나?
하하,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냥 나이를 먹는 것일 뿐인데 촌스럽게도 나는 서른이라는 숫자에 이미 너무 많은 의미 부여를 해둔 상태다. 무척 두렵다. 어떻게 보면 요즘 나를 가장 압박하는 게 그 숫자일지도 모르겠다. 심지어는 조카가 자라는 걸 보면서 혼자 이런다. 나는 아직 스물아홉이고 이 시대의 주인공이라고 여기면서 사는데 다음 세대가 성장하는 동안 점점 그 중심에서 멀어지겠구나. 저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쟤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내가 계속 주인공을 해먹고 싶은 거다(웃음).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유독 생각이 많은 눈치다. 20대가 그렇게 좋았나?
정말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나이가 ‘갑’인 것 같다. 그 무엇으로도 젊음을 얻을 수는 없을 테니까. 물론 난 여전히 젊고 몸과 생각에도 탄력이 있지만 내가 매일 헬스장에 가는 건 그걸 잃을까 두려워서다. 대단한 몸짱이 되거나 멋있어지려는 게 아니다. 단지 외모뿐만 아니라 내 사고의 틀과 프레임까지도 자꾸 흐려지거나 굳어질까 봐 소름 돋고 무섭다. 40대 초반인 지인에게 주말 계획을 물으면 보통 집에서 쉴 거라고 답한다. 그게 제일 편하다면서. 나도 점점 그렇게 되는데 조금은 슬픈 것 같기도 하다.

30대의 삶에 기대가 되는 건 전혀 없나?
배우로서의 진짜 절정은 30대일 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20대에 이 정도까지 해낸 것도 스스로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30대에는 진짜 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야, 진짜 섹시해질 거야, 이런 상상도 해본다(웃음). 사실 대부분의 20대는 30대를 기대한다. 일반적으로 20대는 대학에서 취직으로 이어지는 계단 같은 시기니까. 하지만 나는 달랐다. 늘 지금이 내 타이밍이라고 여기면서 지냈다. 모르겠다. 꽤 엿같이 살았는데도 운 좋게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뤘다. 좋은 집, 좋은 차, 넉넉한 잔고같은 세속적인 소득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무수한 시선을 견디면서도 내가 나인 것을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내가 아닌 채로 성취한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진짜 성취 같다.

이 정도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 일요일인데 몇 시간 남은 주말은 어떻게 보낼 계획인가?
그냥 집으로… 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