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맥 맥카시, 스티븐 킹, 마이클 클라이튼… 훌륭한 ‘원작 소설가’인 이들도 시나리오 작가나 영화감독으로서는 ‘망작’을 내놓았다. 어째서 소설가 중에는 성공한 영화인이 드문가?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조원희가 그 이유를 짚는다.

1933년에 태어난 코맥 매카시는 미국 현대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 중 하나다. <모두 다 예쁜 말들(1992)>, <국경을 넘어(1994)>, <평원의 도시들(1998)>로 이어지는 소위 ‘국경 3부작’은 물론 영화로 만들어진 <로드(2006)>와 그의 원작 소설 중 영화로 가장 성공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5)>에 이르기까지 그의 수많은 작품이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런 코맥 매카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쓴 영화 <카운슬러>가 마이클 패스벤더와 캐머런 디아즈, 브래드 피트와 페넬로페 크루즈에 이르는 화려한 캐스팅과 거장 리들리 스콧의 솜씨로 영화화됐다.

적지 않은 이들이 호평을 보냈으나 그 화제성에 비해 박스 오피스 성적이나 일반 관객들로부터는 그리 좋은 반응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스티븐 킹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책이 팔리는 소설가 중 하나지만 그가 ‘직접’ 영화에 손을 댔을 때마다 ‘망작’으로 불리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킹이 직접 감독한 1986년작 <맥시멈 오버드라이브>는 괴작임엔 틀림없지만 나를 포함한 괴작 전문 마니아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 그가 원작 소설을 쓴 <쇼생크 탈출>이나 <캐리>같이 완성도와 흥행 면에서 모두 성공한 케이스도 있지만 직접 시나리오를 맡은 <공포의 묘지>나 <고양이의 눈>, <크립쇼> 등은 모두 컬트로 남았을 뿐이다.

<주라기 공원>으로 유명한 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 역시 마찬가지다. <웨스트월드>로부터 <코마>를 거쳐 <런어웨이> 등의 영화를 직접 감독했지만 어느 하나 소설만큼의 성공을 따라잡지 못했다. 이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영화감독이라는 작자가 뻔하게도 영화라는 예술이 소설보다 우월하기 때문임을 주장할 것이라고 예상한 분들께는 미안하게도 그 반대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대부분의 상업 영화는 스크린에 영사되고 커트의 분절이 존재한다는 물리적 형식을 제외하고 그 내러티브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다루고 있는 ‘비극’의 플롯을 전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매우 복잡한 설명이 필요한 이야기지만 그 일부분만 간략하게 줄여서 이야기하자면 “전체는 시작과 중간과 결말(시학 제 7장 중)의 3막 구조로 만들어져야 하며 그 세 개의 묶음 안에는 플롯 포인트라는 것이 존재해 관객의 주의 집중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다수 상업 영화에서 유효한 부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쓴 건 기원전 300년대다. 무려 2300년이 넘은 고리타분한 도그마 안에 영화는 갇혀 있는 셈이다. 소설은 영화 내러티브에 비해 매우 젊은 문학의 형식이다. 현대적인 ‘소설(Novel)’의 개념이 정립된 것은 18세기의 일이다. 소설은 서사시를 기원으로 설화를 거쳐 중세 시대의 로망스를 일신한 ‘새로운(라틴어 Novellus)’ 서사다. 영화처럼 물리적 시간의 제약도 적고 인물이나 공간의 한계 역시 지니지 않는다. 플롯의 자유로움은 말할 것도 없으며 선형 혹은 비선형, 내지는 무선형의 어떠한 스토리텔링 역시 가능하다. <시학>의 대원칙을 지키지 않는 영화도 물론 존재하지만 일단 근본적으로 제작자들과 투자자들의 필터링을 통과하기 힘들다. 특히 비선형 플롯을 추구하는 타란티노 같은 감독의 이름이 떠오를지 모르나 그것은 매우 ‘예외적인 인물’들이며, 예의 타란티노 역시 그 비선형 플롯을 해체해 선형으로 조합해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바로 그 고전적 플롯을 그렇게 많이 피해가지 않고 있음을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외적인 인물’이라는 것에 방점을 둬야만 한다. 소설가 중 성공한 영화감독으로 손꼽히는 사람을 찾아보자면 이창동 감독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은 <녹천에는 똥이 많다>나 <소지>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소설가였다. 그리고 <초록 물고기>로부터 <박하사탕>을 거쳐 <오아시스>, <밀양> 그리고 <시>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지닌 이 시대의 ‘거장’감독이 됐다. 중요한 것은 이창동 감독이 다분히 ‘예외적인’ 시네마투르기로 승부하는 감독이라는 점이다. <시>를 예로 들었을 때, 미자는 자신이 속한 세계와 괴리된 시의 세계에서 철없이 방황하기도 하고 구원을 얻기도 한다. 나아가 미자가 현실 세계에서 보여주는 행동은 그 시와 대위법적 관계를 이룬다. 이런 독특한 스토리텔링이 앞서 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3막 구조’ 플롯에 담겨 있다. 고전적인 플롯에 번연하지 않은 스토리텔링을 담아내는 것이 이창동의 장점이며 이는 ‘칸 영화제 각본상’이라는 증거물로 현출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영화적 작법에 능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소설과 영화의 작법 양면을 모두 능란하게 구사하는 것이야말로 이창동의 흉내 내기 어려운 오리지낼리티다. 소설과 시나리오의 발화법 그 자체가 매우 다른 것 역시 중요한 문제다. 시나리오는 문장 자체의 미려함이 전혀 필요 없다. 문장과 수사가 돋보이는 시나리오는 오히려 대부분의 스토리 애널리스트들로부터 거부된다. 상황을 정확하고 객관적인 필체로 묘사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대사 또한 철저히 구어체여야 하고 지나치게 긴 독백이나 내레이션은 ‘못 쓴 시나리오’에서 많이 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더욱 중요한 부분은 시나리오의 경우 ‘영상으로 만들어질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작가가 영상을 머리에 떠올리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방식만이 통한다는 것. 소설에서도 그런 작법이 이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의 경우다. 하물며 시나리오 작가는 현실적으로 어떤 규모의 제작비로 영화가 만들어질지를 고려해 작업해야 하며 어떤 배우가 연기해야 할지 역시 염두에 둬야 할 때가 많다.

소설가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한없이 자유로운 맵에서 수만 가지 아이템으로 무장한 플레이어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게임을 하고 있다가 갑자기 단조로운 공간에서 한 가지의 병구만을 사용하는 이가 이길 수 있는 퀘스트를 맞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그런 형편 속에서 보는 이들이 상상할 수 없는 대단한 이야기를 보여줘야만 한다. 소설가들에게 영화는 어쩌면 너무 가혹한 족쇄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