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의 성취감만큼이나 읽은 사람의 즐거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두 명의 작가가 나란히 새 장편을 발표했다. <28>과 <안녕, 내 모든 것>에 대해, 정유정과 정이현에게 직접 물었다.

우리 존재 화이팅 정유정

“어땠어요? 재미있었어요? <7년의 밤>과 비교해서요.” 질문을 던진 쪽은, 인터뷰어가 아니라 인터뷰이였다. 대답 또한, 인터뷰이에게서 나왔다. “지난 소설보다 한발 나아갔다. 제일 듣고 싶은 칭찬은 이거예요.” 한동안 그에게 향하는 문단과 독자의 시선은 반은 호기심, 남은 반은 의심이었다.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는 소설만이 문학으로 인정받는 사이, 이야기 본연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소설이 겪어야 하는 서러움이었다. 하지만 <7년의 밤>이 성공을 거두고 2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장편 소설 을 들고 나온 이 이야기꾼 앞엔 호기심과 의심 대신 기다림과 기대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고 작가가 긴장할 거라고 예상했다면 잘못 짚었다. 괜스레 사유와 성찰에 천착하는 척 멋 부리지도 않는다. 대신 독자를 인수공통전염병이 창궐해 봉쇄된 도시에 28일간 가둬놓고, 다섯 명의 인물과 한 마리의 개의 시선으로 정신없이 밀어붙인다. 그러곤 온갖 잔혹하고, 슬프고, 참담한 것들에 휩쓸리는 독자들을 향해 태연하게 묻는다.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자체로 타 당성을 지니지 못하는 존재가 존재할 수있는지.

2년 전 <7년의 밤> 출간 직후, 더블유와 가졌던 인터뷰를 기억하나? 그때, 지금껏 2년마다 한권씩 책을 내왔으니, 다음 번엔 1년 만에 써보고 싶다고 말했다.
실패했다(웃음). 결국 2년 3개월이 걸렸으니까. 사실 초고는 <7년의 밤>을 펴낸 2011년 겨울에 이미 다 완성했다. 그런데 초고를 마친 후 보충 취재를 하고 나서 다시 책상에 앉았을 때, 갑자기 아무것도 써지지 않았다. 초고가 마음에 차지 않았던 탓이다. 통째로 버리곤, 지리산 암자로 들어갔다. 동 트기 직전이면 안개 때문에 내 손조차 안 보이는 곳이었다. 고시 공부하는 총각들과 웃고, 떠들고, 운동하면서 2주를 보냈을 즈음, 다시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초고의 어떤 점이 그렇게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인수공통전염병이란 소재에만 매달린 데다, 주인공들은 철학적인 메시지를 향해서만 달려 나갔다. 이야기는 재미가 없고, 공자 왈 맹자 왈 가르치고만 있었다. 다 엎어버리고, 인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쓰자고 마음먹었다. 6월에 지리산에 들어가서 10월에 내려왔으니, 4개월이 걸린 셈이다. 몇 번이나 ‘이러다 못 쓰는 거 아니야?’ 하며 겁먹었는지 모른다.

을 이끌어가는 여섯 화자 중, 링고라는 개가 눈에띈다.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선, 링고가 가장 힘들었다. 스스로 개가 되어보지 않고는 링고처럼 바라보고 링고처럼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링고와 스타의 사랑을 쓸 땐 달랐다. 인간과 달리 아무 조건 없이, 본성에 의해 끌려서, 자기 목숨을 다 바쳐서 하는 사랑에 대해 쓰고 있으니 참 좋았다. 행복했다.

하지만 개를 살리기 위해 인간이 희생되는 장면에선 온전히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지막엔 차라리 링고가 죽고, 재형과 기준 모두가 살아남기를 바라기도 했다.
재형은 처음부터 죽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소설 속에서 희망을 전하는 건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니다. 삶은 때로 절망이고, 그 자체로 폭력적인 요소가 있다. 남이 죽어야, 내가 사는 폭력. 그래서 이 소설속에서 구원은 오히려 죽음 속에 숨겨져 있다. 게다가나는 언젠가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모두 죽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런 비극이 닥친다면, 인간이 인간을 넘어 생명을 위해 헌신할 때에야 비로소 함께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유혹이 없었던 건 아니다. 재형이를 살려주고 싶다. 윤주랑 둘이 잘 살게 하면 안 될까?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런데도 결국에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내가 독해서 그런가 보다(웃음).

재형이 화자로 나서는 챕터에서, 그러한 주제 의식이 두드러졌다. 정유정은 이야기 자체가 지닌 힘을 보여주는 작가였기 때문에,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문장이 등장할 때면 낯설게 느껴졌다.
고민이 많았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독자를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과 개가 같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과연 개를 먼저 생각하는 인간이 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승산 없는 게임을 시작한 걸 수도 있다. 그래서 재형에게 독자를 설득하는 임무를 주었던 거다. 동물도 우리와 같은 생명이며,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명을 해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고.

노수진이란 인물은 실제 간호사로 일했으며 그 병원에서 어머니를 간호했던 것으로 알려진 작가 본인의 개 인사와 겹쳐지기도 한다.
노수진의 경우, 죽는 장면만 내가 아니라 해도 좋을 정도다. 엄마한테 가려고 하는데 사람들에 의해 짓밟혔던 꿈은 실제로 많이 시달렸던 꿈이고, 엄마를 간호하는 데 집중하고 싶은 마음과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 사이에서의 갈등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노수진을 쓰면서 너무 힘들었다. 특히 수진을 통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 가장 비참하고 잔혹하게 죽는 상징을 남기고 싶었다. 실제로 재난이나 전쟁과 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그렇게 선량하고 약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심지어 잔인하게 희생당하니까.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도 마지막에 수진이 유린당하는 장면을 쓰면서는 정말 도는 줄 알았다.

화양이라는 도시가 정부에 의해 봉쇄되고 버려지는 과정은 마치 1980년의 광주를 보는 것 같았다. 의도한바인가?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이 광주를 떠올렸다고 말한다. 독자들이 그렇게 느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게다가 내가 광주 출신이니까 혐의가 뚜렷하지 않나. 다만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 현대사에서 같은 케이스는 광주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자료집을 놓고 쓴 것은 사실이다. 도시가 봉쇄되는 과정을 그리기 위해 두꺼운 자료집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봤다. 불편하게 느끼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광주 사람들은 피해자이면서도 마치 가해자가 된 양 ‘너네, 아직도 그 얘기 하는 거야?”라고 질타를 받는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상처이고, 아무도 어루만져주지 않았으면서, 잊으라고 용서 하라고 강요한다. 우리도 잊고 싶다. 하지만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아프게 쓴 글을 내보낸 지금,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다시 글을 쓰는 일 빼고. 지금까지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 여권을 만들었다. 산티아고에 가고 싶어서다. 40일 정도 걸어야 한다는데, 내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싶다. 그래도 그 길을 걸으며 머리를 비우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더 너그러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내가 인간을 엄청 싫어하는 줄 아는 사람이 많더라. 난 인간에 대한 애정과 희망이 굉장히 강하고, 내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데 말이다. 내 소설 속에선 그게 잘 안 나타나는 건가? (웃음)

청춘 뒤에 남은 것 정이현 <안녕, 내 모든 것>

1990년대는 한국 소비자본주의의 요란했던 사춘기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욕구가 맹렬하게 끓어올랐다가 IMF 경제 위기를 계기로 한순간에 사그라진 시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무렵 짧은 청춘을 통과한 사람들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애틋해진다. 1990년대 초 대학 시절을 보낸 정이현 역시 신작 <안녕, 내 모든 것>에서 당대에 대한 아련한 애정을 드러낸다. 소설은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세미와 지혜, 그리고 준모가 보낸 고교 시절을 그린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김일성의 사망, 삼풍백화점의 붕괴 같은 사건들이 배경으로 흘러가는 가운데 셋은 특별한 연대감을 나누고 충격적인 우연을 겪은 뒤 갑작스럽게 멀어진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과거에만 집착하는 쓸쓸한 회상은 아니다. 작가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그 시절을 거쳐 주인공들이 닿게 된 지금이다. 성장이지만, 그것이 진보의 동의어는 아니다. 각각의 점으로 흩어져 살아가게 된 ‘나’의 도시가 항상 달콤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쓴맛까지 긍정하며 자기 몫의 현재를 버티는 게 어른이라고 정이현은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주인공들과 비슷한 나이에 1990년대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안녕, 내 모든 것>을 읽으며 각자의 기억을 돌아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소설 자체보다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 소환한 자신의 옛 시절을 말씀하는 분들이 많다. 작가 입장에서 그런 점이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떼고 보면 <안녕, 내 모든 것>은 1994년부터 1996년까지의 이야기다. 김일성의 사망과 삼풍백화점의 붕괴, 서태지의 노래 가사 같은 당대의 장면들이 구체적으로 빼곡하게 묘사된다. 정확히 그 시기여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나?
IMF 이전 시대의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무도 그때 이야기를 하질 않는다. 나는 9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는데 지금의 20대에게는 말하기 미안할 정도로 소비자본주의적인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던 시기다. 앞을 가로막았던 1980년대의 벽이 사라지자 문득 광장이 나타난 거다. 그런데 다 함께가 아니라 그 광장에 나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노래방, 비디오방 같은 방이 참 많았다. 그렇게 다들 저마다의 방으로 숨어들었고 처음으로 어떤 개인성이 생겼다. 아무도 그 시대를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뒤이어 터진 IMF 때문이다.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시절이기 때문에 일부러 폄훼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무렵에 애정이 많다.

모든 이야기에는 출발점이 있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어디서부터 시작을 했나?
구덩이다. 연재 당시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아이들이 누군가를 묻으면서 끝나는데 돌연하고 갑작스러웠다. 편집부 반응은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왜 그러셨어요?”였다. 하지만 미팅을 하면서 이 부분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구덩이에 윗세대를 묻는 행위가 이 소설의 착점이었으니까. ‘어느 집에나 더러운 빨랫감은 있다’던 <위기의 주부들>의 내레이션도 생각이 나는데, 다들 구덩이에 더러운 빨랫감을 숨기고 매끈한 척 덮으면서 어른이 되는 것같다. 하지만 그 성장이 반드시 진보는 아니다. 비밀을 감추는 게 현대 사회 성장의 제의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삼풍백화점의 구덩이일 수도 있다.

읽으면서 초기 단편인 <삼풍백화점>을 떠올렸다.
시대배경이 동일하고 비밀스러운 연대와 결별이라는 이야기의 얼개에도 비슷한 면이 있다. <삼풍백화점>이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그걸 버리고 갈 수는 없었다. 일종의 자전소설로 썼는데 단편으로 마친 것이 개인적으로는 늘 아쉬웠다. <삼풍백화점>의 마지막 문장이 ‘그곳을 떠난 뒤에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다. 언젠가는 그 뒤로 이어지는 긴 이야기를 붙여보고 싶다고 예전부터 생각했다.

제목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인 ‘내 모든 것’에서 빌려왔다.
연재 때는 ‘안녕’ 없이 그냥 <내 모든 것>이었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부터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평범한 단어의 조합으로 이렇듯 강하고 순수한 충격을 줄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서태지가 참 대단한 사람인데, 정말 개인성의 왕이다. 아무리 사소하고 미미하더라도 ‘내 모든 것’이면 그 이상 강렬할 수가 없다는 걸 어떤 문학이나 예술보다 앞서서 내게 알려줬다. 사실 편집부 반응은 안 좋았다. 대안이 있냐고 묻길래 열여덟, 그러니까 ‘18’이라는 제목을 댔더니 역시 안 되겠다고 했다(웃음). 이 나올 줄 알았으면 더 안 되는 거였지. 우여곡절 끝에 문득 ‘안녕’이라는 단어를 붙여봤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완성된 것 같았다. 출판사도 회의해보겠다고 하더니만 일주일 후에 괜찮겠다는 답을 줬다.

정이현의 소설에서는 인물들이 각각의 개인으로서 존재한다. 가족 묘사를 보면 특히 그런 생각이 든다. <안녕, 내 모든 것>을 봐도 혈연은 특별히 끈끈한 연대가 아니고, 오히려 때로는 섬뜩할 만큼 냉정한 관계다.
그런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산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정점이 <너는 모른다>였다. 원제가 였는데 그 각각의 알파벳이 등장인물들의 이니셜이다. 집에 모여 살지만 사실은 개별적인 개체라는 것, 우리는 서로의 일부분이나 뒷모습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나는 저 사람을 몰라’가 아니라 ‘넌 날 모르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혈연이든 뭐든 완벽한 우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타자라는 걸 인정하고 바라봐줄 때 오히려 불행이 덜하지 않을까. 그런데 누군가의 엄마가 된 뒤에는 내가 그 같은 신념에 환상이 컸구나, 그리고 나 역시 어리석은 사람이었구나 싶을 때가 있다. 실생활에서 느끼고 깨지고 부딪치는 게 많다.

물론 소설가와 캐릭터는 별개의 인물이지만 가끔은 부모 자식처럼 닮은 부분을 공유하게 되곤 한다. 세 주인공 중 그 나이 또래의 정이현이 특히 많이 담긴 캐릭터를 꼽는다면?
지혜다. (에필로그와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현재는 지혜의 시점에서 서술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걸 다 기억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지혜의 진술일 뿐 입증된 바가 없다. 특별해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용기도, 계기도 없이 지낸 인물이다. 그래서 셋이 흩어지는 계기가 된 ‘그 사건’ 이후로 가장 많이 변한 건 지혜일 거라고 생각했다. 세미에게는 그랬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고 준모에게도 세미를 사랑한다는 동기가 있었다. 지혜는 얼떨결에, 안 할 수가 없어서 말려든 경우다. 그 후 자신의 삶 자체가 얼떨결에 떠밀려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까 많이 고민하면서 결국 스스로 설 수 있는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부모 세대와 자주 연락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고, 팍팍해 보이지만 가장 담담하게, 하루하루 사는 게 곧 닳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아는 사람. 내게는 그게 ‘어른’ 같다. 시간이 흘러 재회했을 때 결국 “너의 요즘은 어떠니”라고 묻는 건 세미가 아닌 지혜다. 스스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꾸준히 돌아보는 어른이됐기 때문에 그렇게 물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서울, 그 안에서도 강남이라는 공간이 잘 보이는 작품을 많이 썼고 <안녕, 내 모든 것>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곳의 이야기로 꾸준히 돌아오게 되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나 자체가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기껏 멀리 가본 게 분당인 사람이다. 도시적인 삶 외에는 뭘 잘 모른다. 그리고 강남은 한국 사회의 여러 모습이 축약되어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기본적으로 관심이 있는 건 지금의 서울, 그리고 메트로폴리스를 살아가는 개인적인 현대인의 삶이다. 그들의 현재를 말하려면 단면만 훑는 대신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야 한다. 무엇이 그들을 만들었나 시대적으로 우회해서 보기도 하고. 그래서 같은 공간이 자주 언급되는 것 아닐까? 어쩌면 미래로 갈 수도 있다. 2030년의 서울 이야기를 쓴대도 그 목적은 2010년대를 잘 보기 위함이다.

이번 작품을 마친 뒤 각별하게 든 생각이나 느낌이 있었나?
한 시대랑 완전히 안녕한 기분이다. 다시는 이런 이야기를 못 쓸 테고, 안 쓸 것 같다. 어떤 작품이든 장편을 마치면 늘 아쉬움이 있었다. 이 작품에는 이상하게 그런 게 없다. 약 1년간을 꼬박 달려서 완성했고,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기 때문에 어떤 반응이든 달게 받겠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굉장히 좋게 헤어진 기분이랄까? 그래서 당분간은 장편을 안 쓸 것 같다. 이번 사랑을 잘했기 때문에 정말 좋은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