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환상속의 그대>는 연인과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에 남겨진 ‘혁근’과 ‘기옥’,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환상으로 남아준 ‘차경’의 이야기다. 한편 여전히 그 환상으로부터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세 명의 배우 이영진, 이희준, 그리고 한예리가 남긴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예리가 입은 크림색 민소매드레스는 더 로우, 이희준이 입은더블 브레스트 재킷과니트 톱은 모두 보테가 베네타,이영진이 입은 간결한 디자인의화이트 셔츠는 분더캄머 제품.

한예리가 입은 크림색 민소매
드레스는 더 로우, 이희준이 입은
더블 브레스트 재킷과
니트 톱은 모두 보테가 베네타,
이영진이 입은 간결한 디자인의
화이트 셔츠는 분더캄머 제품.

한예리
<환상속의 그대>를 촬영하면서 화관을 쓰고 팔을 벌리고 물 밖에서 돌고래들을 향해 휘파람을 부는 장면이 있었다. 그 휘파람 소리가 물속에서도 잘 들리는지, 진짜 돌고래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몸을 비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차경이가 이 돌고래 친구들에게 정말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영화 <코리아> 개봉 이후 내가 알려졌나? 잘 모르겠다. 현장에선 다 똑같다. 다만 <환상속의 그대>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다거나, 티저 예고편이 공개됐다거나 하는 내 소식을 남을 통해 들을 때,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독립영화에선 ‘멜로 영화’ 전문이었는데 여성 감독님과의 작업에서 유난히 더 그랬던 것 같다. 글쎄, 여자에게 어필하는 여자로서의 매력을 갖고 있는 건가?(웃음) 상업 영화에선 아직 그렇지 않지만, 아쉽지는 않다. 이제 앞으로 천천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당장 때려치울 일도 아니고, 오래할 거니까.
영화라는 장르를 오래하고 싶다. 맨 처음에는 영화를 만드는 현장에서 재미를 느꼈다. 즐겁고 재미있게 일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보면서, 나 역시 저들 안에 섞이고 싶고 들어가고 싶고 열중해보고 싶다는 생각. 그러다 보니 나중엔 잘하고 싶어졌다.
독립영화만 할 때엔 서른까지만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보고, 다시 무용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가 확실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출발하는 입장에 놓여, 오히려 고민 같은 게 없다. 이제부터 쌓아야 할 것들,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으니 고민하거나 갈등하거나 잴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더 좋다.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 그 의미가 너무 광범위해서, 각자 생각하는 좋은 배우의 기준이 다 다르지 않나. 그래도 그 ‘좋은 배우’ 안에 포함되는 것만으로도 되게 행복할 것 같다.
<환상속의 그대>는 볼수록 알아가고 싶은 이야기다. 관객들이 한 번보다는 두세 번 보면 좋겠다. 영화가 잘돼서 ‘상상마당 시네마’ 뿐만 아니라 다른 극장에서도 상영하면 더 좋겠다(웃음).

이희준
<환상속의 그대>의 토대가 된 단편 <백년해로외전>은 우연히 친한 친구 작업실에서 술 마시다가 봤다. 그때 혼자 그랬다. “나 저 감독이랑 작업하고 싶다.” 그런데 얼마 뒤에 강진아 감독님으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말 좋았다.
<환상속의 그대>는 처음 주연을 맡은 장편 영화지만 단역을 맡았다고 해서 ‘단역만큼만 해야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주 작은 역이라 해도, 오로지 그 인물에 집중해서 1시간 반 분량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으로 연기한다.
첫 상업 영화는 아마 <부당거래>였을 거다. 류승완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주고 싶다며 강남의 어떤 중국집으로 오라고 했다. 매니저가 없을 때라 버스 타고 한참을 가면서도, 장난치는 줄 알았다.
홍상수 감독님과 꼭 작업해보고 싶다. 그런 연기 꼭 해보고 싶다. <다른 나라에서>에서 유준상 형이 맡은 역할, 와, 너무 재미있었다. 그렇게 리얼리티한 구조 속에 담긴 코미디를 정말 좋아한다.
연기할 때 어느 순간, 일상보다 더 진짜 같은 순간을 산다고 느낀다. 나는 내 실제 삶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데, 극 속에선 완전히 그리고 온전히 살고 있다는 걸 느끼는 거다. 그렇게 연기하면서 삶보다 더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 그런 순간이 감동적이다.
요즘은 연기가 가끔 일이 되는 순간이 생겨서 고민하고 있다. 연기가 즐거워서 시작했고, 지금까지 거의 모든 순간을 즐기면서 해왔는데. 지금을 잘해내야 진짜 하고 싶은 역할을 고르고 더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맞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환상속의 그대>를 촬영하기 1년 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우는 엄마를 다독이며 장례까지 다 치렀는데, 어느 날 돌이켜보니 외할아버지가 없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그때 할아버지가 얼마나 살고 싶으셨을까, 난 그 순간 얼마나 대충 실감했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누군가에게도 이처럼 위로가 된다면, 이 영화의 몫은 다한 것 같다.

이영진
<환상속의 그대> 개봉일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이상했다. 빨리 개봉했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조금 더 나 혼자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모두의 영화였으면 하면서도, 나만의 영화였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나보다.
사람들은 시나리오 속 ‘기옥’을 보며 이상한 애, 쉽게 말하면 미친 애 같다고 했다. 그런데 난 기옥이 정말 사람 마음의 본질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속이 깨끗해서 마음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감출 수 없는 사람 말이다. 영화 안에서 기옥은 유일하게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 밖에서 만큼은 관객들로부터 사랑받으면 좋겠다.
데뷔작 <여고괴담2>가 남긴 이미지 첫 작품에서 주연을 맡은 건 큰 행운이다. 다만 그 이미지가 기억되는 게 아니라 각인된다고 하지 않나. 나의 숙제는 ‘시은’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은’을 포함한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일일 것이다. 1~2년 할 거 아닌데 조바심 내지 않으려고 한다. 숙제는 언젠가 풀리지 않을까.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코미디 영화를 해보고 싶다. 카메라 앞에서도 맘껏 웃으면서, 그 에너지가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작품, ‘지금 이 영화가 어디로 내달리고 있는 거야?’ 하면서 정신없이 내달릴 수 있는 그런 코미디 말이다.
2005년 1월 1일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났다. 사람들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겠다고 했다. 장례를 치른 후, 결국 봄 즈음 계획했던 영화를 포기하고 두 달 동안 부산을 떠돌았다. 그냥 절만 찾아 다녔다. 괜찮은 척한다고 진짜 괜찮은게 아니고, 상처는 안으로도 곪는 건데, 표면에 보이는 것들만 보는 사람들에게 억울한 마음이 컸다. ‘기옥’의 마음 또한 거기에 있다. 하지만 ‘원기옥’도 그렇고 ‘이영진’도 그렇고 청승은 안 떤다. 못 떤다. <환상속의 그대>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그래서
나에게는 애도 영화에 가깝다. 누군가를 잃어본 사람들이라면 다 그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