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는 어떤 눈동자들을 편애한다. 검은자위가 유독 선명하고 촉촉한 송승헌의 눈은, 아무리 깡패의 옷을 입고 주먹을 휘둘러도 이 배우의 선량하고 느긋한 품성을 믿게 만들어버린다.

봄 그림을 담아야 하는 겨울의 드라마 촬영장에서 가장 무방비 상태인 사람은, 바로 배우다.

봄 그림을 담아야 하는 겨울의 드라마 촬영장에서 가장 무방비 상태인 사람은, 바로 배우다.

4월호는 월간지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계절이다. 날짜가 짧은 2월을 그나마 삼일절 휴일이 잘라먹는 데다, 아직 겨울의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싸늘한 공기 속에서 봄 그림을 담아내야 하니까. 하지만 잡지보다 처지가 나쁜 쪽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4월에 시작할 드라마를 찍는 사람들. 각종 교육기관의 입학식이 다 치러졌으니 계절로는 봄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3월 초이지만 강원도 평창에는 겨우내 묵은 눈이 여전히 단단하게 쌓여 있다. 드라마 <남자가 사랑할 때>촬영이 진행 중인 알펜시아의 음악 텐트에는 이른 아침의 냉기가 고여 있었다. 이럴 때 한겨울 산에서나 입을법한 두툼한 패딩 재킷으로 무장한 스태프들 틈에서 딱할 정도로 무방비 상태인 건 배우들이다. 공연장 문으로 들어와 객석에 내려와 앉는 동선을 몇 차례 체크한 송승헌은, 간단한 리허설이 끝난 뒤 슛이 들어가면서 가벼운 봄옷 차림이 되었다. 살짝 그을린 얼굴빛이 파인 뺨을 도드라지게 만들고, 얇은 옷 아래로는 분명 몸에 붙이는 핫팩을 여러 장 댔을 텐데도 몸의 선이 날렵하다.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여러 차례 인터뷰해온 덕에 이 배우의 몸에 대해 몇 가지를 알고 있다. 매일 두세 시간씩 운동하는 것을 번거로운 일보다는 자연스럽고 개운한 일상으로 여긴다는 것, 촬영 전에는 식이 조절에 엄격하고 성실하다는 것, 군살이 붙으면 스스로 느슨해진 증거일 뿐 아니라 대중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다는 것 등등. 3년 만에 다시 만난 송승헌의 여전히 단단한 체격은 그가 보낸 지난 시간을 가늠하게 했다. 카메라가 편애하는 그 검은 눈동자도, 역시 변함이 없었다.

김인영 작가의 신작 에서 송승헌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남자 역을 맡았다. "격렬한 감정을 다루면서도 남성적인 스케일의스토리잖아요. 요즘의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선이 굵으면서 묵직한 멜로 드라마가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4회까지 나와 있는 대본을 가지고, 한 달 먼저 찍고 있다고는 해도 드라마 촬영장의 리듬은 조금씩 쉬지 않고나아가는 코끼리 걸음이다. 그 속에서 스타라 해도 쉴 수 없고 지쳐서 안 되는 건 예외 없는 규칙이다.

김인영 작가의 신작 <남자가 사랑할 때>에서 송승헌은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남자 역을 맡았다. “격렬한 감정을 다루면서도 남성적인 스케일의
스토리잖아요. 요즘의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선이 굵으면서 묵직한 멜로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4회까지 나와 있는 대본을 가지고, 한 달 먼저 찍고 있다고는 해도 드라마 촬영장의 리듬은 조금씩 쉬지 않고
나아가는 코끼리 걸음이다. 그 속에서 스타라 해도 쉴 수 없고 지쳐서 안 되는 건 예외 없는 규칙이다.

<남자가 사랑할 때>는 <태양의 여자> <적도의 남자>를 쓴 김인영 작가, 그리고 <환상의 커플>과 <아랑사또전>을 연출한 김상호 피디가 만난 새 드라마다. 송승헌은 여기서 남자 주인공 한태상 역을 맡았다. 거친 조직에 몸담고 있는 폭력배로, 일 때문에 자신이 괴롭혀야하는 대상인 여주인공 서미도(신세경)와 사랑에 빠지며 자신의 의무와 욕망이 충돌하게 되는 역할이다. “작가님의 전작 드라마들을 보면 격렬한 감정을 다루면서도 남성적인 스케일의 스토리잖아요. 요즘의 말랑말랑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선이 굵으면서 묵직한 멜로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전작인 타임슬립 소재의 사극<닥터진> 방영에 맞춘 프로모션을 위해 싱가포르에 막 다녀오자마자 체감 기온이 30도는 떨어진 새 드라마 촬영장에서 송승헌은 빨간 볼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대본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의료용 밴드가 손가락을 감고 있고, 손등 아래쪽으로는 갈색 멍이 번져 있다. 전날 미도의 집인 서점으로 찾아가 위협하는 장면 촬영에서 주먹으로 유리를 깨는 연기를 하다가 다친 흔적이다.

이날은 서점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야 하는 촬영이었다.붕대로 미리 손을 감고 스태프들의 장치가 있었지만,다음 날 촬영 현장에서 만난 송승헌의손에는 넓게 멍이 들어있었다. 드라마 연기란 매순간 격렬한 감정을 쏟아내는열연의 질주라기보다 마라톤에 가깝다. 때로 고되고 지루한 시간마저성실하게 견디는 긍정의 정신을 배우에게 요구한다.

이날은 서점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야 하는 촬영이었다.
붕대로 미리 손을 감고 스태프들의 장치가 있었지만,
다음 날 촬영 현장에서 만난 송승헌의
손에는 넓게 멍이 들어있었다. 드라마 연기란 매순간 격렬한 감정을 쏟아내는
열연의 질주라기보다 마라톤에 가깝다. 때로 고되고 지루한 시간마저
성실하게 견디는 긍정의 정신을 배우에게 요구한다.

“보통 특수 촬영에서는 더 잘 깨져서 조각조각 부서지는 유리를 쓰잖아요. 그런데 어제 촬영용은 잘 안 깨지는 강화유리더라구요. 제가 주먹을 뻗어 치면서, 동시에 스태프가 안쪽에서 망치로 유리를 내리찍어서 깨지게 해 찍었어요. 그러다 손에 충격을 받아서 다친 거죠. 뭐 드라마 찍다 보면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요(웃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쓰윽 내려다보던 송승헌이, 매니저에게서 다음 촬영지가 대관령의 어느 목장이라는 얘기를 듣자 반짝 활기를 찾았다. “아, 거기 가는 거야? <가을동화> 때 이후로 처음인데?” 막상 바다까지 내려다보이는 고지대의 목장에 갔더니 날개 길이가 20미터는 되어 보이는 풍차들이 쌩쌩 돌아갈 만큼 엄청난 강풍이 불어서, 배우의 생기까지 동해로 날려보낼 지경이었지만 말이다. 스태프들은 패딩코트의 후드를 단단히 눌러썼다지만 얇은 홑겹 재킷을 입은 배우에게는 바람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드라마 연기란 매순간 격렬한 감정을 쏟아내는 열연의 질주보다는 주먹을 다치거나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시간을 묵묵하게 견디고 버티는 두어 달의 마라톤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정성을 들여야 겨우 자신을 유지해내는 운동처럼 때로는 유산소의 숨가쁨으로, 때로는 웨이트 트레이닝의 묵묵함을 가지고. 장인이 짓는 옷이라면 정말 한땀 한땀일 듯이 여러 사람의 힘이 모여 더디 진척되는 촬영장에서, 13년 전의 <가을동화> 때와 마찬가지로 송승헌이 서 있었다. 자기 몫의 성실함을 가지고 움직이고 또 버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