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을 가장 이상적인 남편의 모습으로 보낸 유준상이 결혼에 관한 화려하고 우아한 괴담을 들고 돌아왔다. 뮤지컬 <레베카>는 어두운 비밀과 거짓말로 정교하게 설계된 고딕풍의 스릴러다. 하지만 미스터리의 열쇠를 쥔 주연 배우는 인터뷰에서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돌아갔다.

캐멀색 재킷은 BananaRepublic, 터틀넥 스웨터는Pringle at Mue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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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상보다 유준상의 노랫소리가 먼저 지하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부터 흥얼거린 건 개막을 앞둔 뮤지컬 <레베카>의 삽입곡이었다. 대프니 뒤 모리에의 원작 소설은 이미 앨프리드 히치콕도 스크린에 옮겼을 만큼 흥미로운 스릴러다. 주인공인 ‘나’가 부유한 영국 신사인 막심 드 윈터와 결혼해 대저택에 입성한 뒤, 사고로 죽은 그의 전처 레베카의 그림자에 서서히 짓눌려가는 과정이깨진 유리 조각으로 만든 샹들리에처럼 화려하고 위험하게 묘사된다.

“대사 하나, 눈빛 하나를 그냥 넘기기가 힘든 작품이에요. 음악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긴장감이 탁월합니다.” 연습이 고되다기보다는 빨리 공연을 올릴 날이 기다려진다는 배우의 설명이다. 혹시 무대 위에 매력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 막심은 스릴러의 언어로 번역한 방귀남인 걸까? “완전히 다르죠. 섬세하고 다정한 신사의 모습 안에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또 다른 사람을 숨기고 있거든요. 여자 관객들은 ‘이런 사람이랑 어떻게 살지?’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직접 연기해보니까 또 살아볼 만한 것 같기도 하고. 하하” .1월의 공연장을 찾으면 이 비밀스러운 남자가 과연 함께 아침밥을 먹어도 될 만한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겠다.

바쁜 스케줄 중에도 1년에 한두 편씩 꾸준히 뮤지컬을 선택하고 있다. 무대가 주는 어떤 만족감 때문일까? 영화나 TV에 출연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자극을 받나?
데뷔 초기부터 뮤지컬을 해왔기 때문에 애착이 크다. 여러 무대를 경험하면서 공연만큼은 평생 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됐다. 하나의 뮤지컬을 완성하려면 여러 가지 조건이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 당연히 연습량도 많다. 힘들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경험이다.

1월 12일에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뮤지컬 <레베카>를 준비 중이다. 규모가 크고 이야기도 극적인 만큼 해야 할 숙제가 많은 작품일까?
준비가 어렵다기보다는 하루빨리 무대에 오르고 싶을 정도로 연습이 즐겁다. 로버트 요한슨의 연출이 훌륭하고 원작의 힘이 상당하며 무엇보다 곡이 굉장히 좋다. 배우가 노래 부를 맛이 날 정도로.

보고 난 뒤 관객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게 될 장면으로는 어떤 걸 예상하나?
내가 맡은 캐릭터인 막심이 덮어뒀던 과거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소리도 지르고 다른 사람의 흉내도 내고, 거의 미치광이처럼 행동한다. 연기와 노래 모두가 강렬해야 한다. 스릴러다운 긴장감이 밀도 있게 담긴 장면이다. 처음에는 이 신의 노래를 익히는 게 무척 힘들었다. 플랫이 여섯개씩 붙었나 싶더니 그 뒤로 샵 네 개가 이어지고, 갑자기 박자까지 바뀐다. 음 찍는 것조차 힘들어서 동료 배우들과 ‘아니, 이걸 어떻게 불러?’ 막막해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입에 붙고 나니 너무 재미있더라. 그 장면을 빨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지난여름에는 뮤지컬 <잭 더 리퍼>에 참여했다. 공연 중 한 번은 가사를 잊어서 크게 당황스러워했다고 들었다.
다들 무대 위에서 한두 번씩 경험하는 사고다. 그런데 그때는 유독 심하게 기억이 안 났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스케줄이 한참 몰렸던 때라 워낙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많이 연습했던 곡을 부르다 갑자기 멍해지는 경험은 처음 해봤다. 결과적으로 내게는 큰 자극이 됐다. 그 사건 이후 한동안은 무대에 올라갈 때마다 가슴이 떨리고 공포스러웠다. 20년 동안 무대를 오르내리면서 그렇게 겁먹은 적이 없었다. 극복하지 못하면 다시 무대에 못 설 것 같았다. 그래도 결국에는 원래의 컨디션을 찾았다. 계속 공연을 하면서 천천히 극복한 거다.

머릿속이 갑자기 멍해졌을 때, 그 위기는 어떻게 넘겼나?
순발력으로 얼버무렸다. 물론 스태프들은 눈치를 챘는데, 끝난 뒤 무대 뒤에서 이러더라. “형, 또 옹알이 하셨어요? ”

객석에서는 유준상이 실수한 걸 몰랐을까?
아마 대부분의 관객은 모르고 넘겼을 거다. 그런데 뮤지컬 같은 경우 20~30번 씩 보는 팬들이 있다. 그분들은 작은 실수 하나도 놓치질 않는다. 한 분이 블로그에 오늘 유준상 씨 가사 틀렸다고 적은 걸 봤다. 정말 대박이구나 했지.

지금까지 유준상이 무대 위에서 겪은 것 중 가장 아찔한 사고라고 봐도 될까?
별일을 다 겪긴 했다. 그런데 내가 이 정도까지 괴로웠던 적은 드물다. 강도가 꽤 높았다.

<레베카> 때는 가사 까먹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러니까 말이다. 사실 연기에 몰입하다가 잊는 거다. 가사만 줄곧 머릿속으로 되뇌면 그럴 일이 없다. 막 감정을 쏟아내다가 ‘…가만,그런데 가사가 뭐지?’ 이렇게 된다. 나중에 나이 들어서 영 힘들면 프롬프터라도 하나 달아달라고 할까 보다.

무대에서 보낸 시간이 길다. 그에 얽힌 기억들만 해도 책 몇 권 분량은 나올 것 같다.
1997년에 <그리스>로 뮤지컬 데뷔를 했고 첫 연극은 1995년이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공연이었으니 20대 중반의 신인에게는 엄청난 무대였다. 내가 그 위에서 뭘 어쩌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훌쩍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뮤지컬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노래와 춤 선생님을 따로 섭외하기도 했다. 같이 연기를 전공한 친구들과 레슨을 받기 위해서.

그러면 영화나 TV보다 뮤지컬에 출연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였나?
맞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치면서 노래를 불렀고 밴드도 했다. 음악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나 뮤지컬 영화에서 자극을 받았다.

직접 곡도 쓴다고 들었다.
아, 지금도 들려드릴 수 있다.

녹음을 해서 가지고 다니는 건가?
편곡 팀이 붙었다. 내가 혼자 기타 치고 피아노 연주하면서 만든 걸 들어보면 ‘이게 뭐지?’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편곡을 마친 버전은 꽤 그럴듯하다. 앨범으로 만들려고 준비 중이다. 사실 구체적인 준비는 다른 사람들이 다 하고 있고, 난 그냥 음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이러는 상태다. 곡은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썼는데 벌써 40곡 이상이 쌓였다. 가사 내용이나 장르도 다 다양하다. 이것 저것 해보는 게 재미있더라고. 나 혼자만 듣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들어 발표할 결심을 했다. 안 좋다고 하면 관두려고 했는데 음악 하는 친구들이 괜찮다고 해서(웃음).

심심할 틈이 거의 없을 것 같은데 그 약간의 틈 안에서 굉장히 많은 일을 한다.
내가 좀 그렇다. 이미 가사까지 다 완성했다. 그런데 그걸 적어둔 일기장을 잃어버려서 요즘 ‘멘붕’이다. 다시 써보려고 해도 기억이 잘 안 난다.

기타 치면서 노래 만드는 유준상을 상상하다 보니 <다른 나라에서>의 안전요원이 떠오른다. 이자벨 위페르를 텐트에 앉혀놓고 직접 쓴 ‘안느 송’을 불러줬다.
그 노래도 이번에 편곡을 했다. 앨범에 넣으려고.

한국 영화에 출연해 깡소주를 마시는 이자벨 위페르를 구경하는 건 관객에게도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다. 함께 연기한 배우의 느낌은 더 특별하지 않았을까 싶다.
행복했다. 내가 또 ‘위 선생님’이 출연한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너무 잘 봤던 터라 더 그랬다. 한 스크린 안에서 작업할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다.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걸 얻었고 또 배웠다.

함께 대사를 주고받는 걸로는 모자라 그 앞에서 노래까지 했다. 이 특별한 관객의 반응은 영화에 담긴 그대로였나?
원래 시나리오는 이랬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위페르 선생님이 ‘이 텐트 좋네요, 랜턴은 어디서 구했어요?’ 이렇게 딴전을 부려야 했다.그런데 집중해서 들으시더니 너무 좋아하면서 ‘뷰리풀, 그레잇!’ 이러신 거다. 그렇게 내용이 바뀌어버렸는데 감독님께서 그 테이크를 오케이하셨다.

오늘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도 줄곧 <레베카>의 넘버들을 흥얼거렸다. 다른 촬영장, 예를 들면 영화 현장에서도 자주 노래를 하나?
그러면 강우석 감독님은 “…준상아, 이제 그만해라!” 이러신다. 으하하하! 그러니까 거기선 노래 못한다. 목만 풀어도 막 뭐라고 하신다.

가장 많이 듣는 건 역시 가족들이겠다.
사실 너무 힘들어한다 (웃음). 어쩌다가 한두 번도 아니고 맨날 불러대니까. 뮤지컬 연습만으로 모자라 노래까지 직접 만들었다면서 들어보라고 하니까 요즘은 슬슬 짜증을 낸다.

칭찬은 잘 안 해주나?
그런 것 없다. 냉정하다. 그냥 별로라고 하던데, 하하.

2012년 공개된 출연작 수가 엄청나다. 일단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을 마쳤고, 영화로는 <알투비 : 리턴 투 베이스>, <다른 나라에서>, <터치>가 있었으며, 뮤지컬 <잭 더 리퍼> 무대에 오른 뒤에 <레베카> 연습에 돌입했다. 엄청나게 달린 한 해인 셈이다. 스스로도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했을까 싶을 것 같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러면서 일본 공연까지 다녀왔으니까. 나도 내가 어떻게 이걸 다 했는지 모르겠다. 장하다고 했다, 스스로도.

그중 특히 아픈 손가락이 있다면?
어느 하나 마음 쓰이지 않는 게 없지만 아무래도 <터치>가 아쉽다. 욕심과 달리 간판을 너무 일찍 내리게 됐으니까. 그리고 곧 개봉할 <전설의 주먹>의 경우, 촬영 중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십자인대가 끊어져서 한참 고생했다. 과연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무리를 지어서 다행이다 싶다. 감독님께서 영화가 굉장히 잘 나왔다고 해주셔서 한시름 놓았다.

부상 치료 기간이 본의 아니게 휴가가 됐겠다.
그때 <아트 아시아 2012> 전시 준비를 한 거지. ‘그래, 이왕 이렇게 됐으니까…’ 하면서 채색 작업을 많이 진행했다.

강우석 감독의 <전설의 주먹>은 고교 시절 주먹으로 이름을 날린 세 명의 남자가 40대가 된 후 격투기 TV 쇼에서 만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강도 높은 액션 연기는 그간의 필모그래피에서 드물지 않았나?
간간이 하긴 했는데 이젠 나이 때문에…(웃음). 몸을 만들어서 찍느라 힘들었다. 게다가 부상 때문에 쉬었더니 한참 만들어둔 몸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더라. 정말 힘들게 운동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