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기본을 생각한다. 새해, 변하는 세상 속에 움직이지 않는 삶의 가치를 되짚어보는 세 개의 대화를 준비했다. 철학, 심리학, 법학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질문해보는 더블유의 인문학 강의.

“정의란 무엇인가”

금태섭 변호사
법무법인 지평지성 파트너 변호사,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 검사와 변호사로서 직접 겪은 경험들을 중심으로 <디케의 눈>, <확신의 함정> 등의 저서를 펴내며, 대중이 법과 보다 가까워지고 균형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사법적 정의(正義)란 무엇인가

법이 실현하고자 하는 정의를 하나로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정의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해도, 부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누구나 이것이 부당함을 안다. 그렇다면 2012년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이 가장 부당하다고 여길까. 지난 수십 년 간 성장에만 매달려온 우리 사회는 이제 노력한 만큼 성장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그만큼의 보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 부당하다고 분노한다. 여기 등록금 때문에 아르바이트에 허덕이고 휴학을 일삼느라 정상적인 학업을 지속할 수 없는 대학생이 있다고 하자. 그가 스펙 쌓기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취업 시장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취업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지속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재벌의 자녀들이 특별한 노력 없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돈을 벌고, 그로 인해 사회적으로 칭송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이 상황이 부당하고 불공정하다고 느낄 것이다. 결국 ‘분배’의 문제다. 한정된 자원을 경쟁을 통해 능력에 따라 나누는 것이 공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많다. 하지만 노력이 곧 대가로 돌아오지 않는 사회 구조에서는 누구나 기본적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장치가 필요하고, 그것이 현재 법이 실현해야 할 정의다.

불신 권하는 법(法)

법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법을 가리켜 지배자의 도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한 면만 보았을 때 얘기다. 법은 양날의 검이다. 따라서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법을 만들었다면, 자신 역시 그 도구에 당해야 한다. 그렇게 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국가의 국민들은 법이란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여긴다.그에 비해 우리의 법은 일반인에게 오히려 엄격하게 적용될 때가 많다. 최근 네티즌들이 댓글로 싸우는 과정에서 상대를 ‘대머리’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1,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다. 물론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내리기는 했으나, 엄청난 금액을 횡령하고 배임한 혐의가 있는 재벌, 돈을 받았으나 의례적인 것이었다고 변명하는 고위 공직자들이 구속되지 않고 설사 구속되더라도 사면받는 현실과 대조된다. 정치와 자본 권력을 향한 법의 칼날이 무뎌졌다는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법치주의가 완벽하게 확립되지는 않았다 해도, 더딘 가운데 많은 발전을 이룬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건 법률가 덕분이 아니다. 일반 시민들이 법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하고, 잘못된 판결과 집행에 저항한 결과다. 만약 법이 진정한 양날의 검이 되기를 원한다면 더욱 용기 있게 나서야 한다.

어떻게 하면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까?

우리나라 법원은 개인의 사생활 보호라는 명목으로 판결문을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온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판결문인데도 변호사조차 구하기 어렵다. 법정에선 오직 판사, 검사, 변호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오갈 뿐이다. ‘내가 알아서 잘해줄 테니 너희들은 따르라’라는 태도다. 하지만 국민이 법을 감시하기 위해서는 법이 쉽고 투명해져야 한다. 법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법적인 이슈를 일반에게 공개하고 법을 쉽게 만들라는 압력을 행사하는 데서 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다만 그런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해진 개인 또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전문가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법률가도 틀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 다른 편에 서 있다고 해도,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너도, 나도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해야만 토론이 가능해지고, 그런 자세를 가질 때에만 사안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다.

폭력의 대안

얼마 전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교도소에 수감되는 정치인을 향해 시민들이 환호를 보낸 적이 있다. 법이 위험하다는 신호다. 원래 교도소에 수감된다는 건 사회적으로 가장 강력한 제재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히려 그를 칭찬한다면 법이 사회적으로 제대로 작용하지 않고 있으며, 그 법 체계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부당한 경험이 여러 번 쌓여, 법을 불신하게 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때 사람들은 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에게 화살을 쏘았다는 이른바 ‘석궁 사건’이 그 예다. 물론 한국의 현실에서 석궁을 들고 간 사람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폭력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사법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좌절되었다고 느꼈을 때, 폭력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타인에 대한 관심과 시민간의 단결이다. 단순히 도덕적이고 당위적인 논의가 아니다. 예를 들어 한진중공업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그 이전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같은 업무를 하면서 회사 내에서 샤워도 못하고, 출근 버스도 못타고, 월급도 정규직 노동자의 반밖에 받지 못했다. 만약 평소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조의 권리를 인정하고 돕지 않았다면, 해고된 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비정규직 노동자가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누군가가 불쌍하기 때문에 돕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제라도 나의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마치 ‘희망 버스’처럼 모든 사람들이 어려울 때 서로에게 호소할 수 있는 통로를 뚫어놓았다면, 법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법이 스스로 변화하며 사회를 나가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사회에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하고, 압력을 넣으면 조금씩이나마 움직이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 필요한 이유

법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이 선출에 의해 임명되는 것과 달리, 법률가를 시험을 통해 임명하거나 신분이 보장되도록 종신직을 마련하는 것도 사회적인 통념에 따르기보다 약자를 보호하라는 뜻이다. 다만 법은 사회 변화를 선도할 수는 없다. 대신 사회 변화가 먼저 이루어지고 그 변화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참정권이 가장 뒤늦게 인정된 것도, 우리 사회에서 통념상 쉽게 받아 들여지고 있지 않은 성적 소수자 문제를 법이 앞장서서 이끌어가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 성적 소수자, 심지어 학생 체벌에 이르기까지 인권에 관한 모든 토론이 이루어지는 곳, 그리고 그 문제들을 안정적이고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 그것은 결국 법의 영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