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뮤지션에 지나지 않았다.

예능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뮤지션에 지나지 않았다. 실력 있는, 그러나 대중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뮤지션 말이다. 클래식을 전공했고, 혼성 트리오 베이시스에서 히트곡을 여럿 냈지만 그건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다. 파리로 유학을 다녀온 다음 정재형은 피아노 솔로 음반을 내놓거나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주로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고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우아한 파리지앵 음악인다웠지만, 대중이 친근하게 불러줄 만한 이름표는 달지 못한 맨 가슴이었다. 그의 진가가 발견되기 시작한 건 주변의 음악 동료들을 통해서였다. <놀러와>에 함께 출연한 이적은 ‘이기주의가 사람으로 태어나면 정재형일 것’이라며 이봉원 닮은 이 남자가 실은 잘 삐치고 제멋대로인 사람임을 밝혔으며, 이효리는 “밥을 시키거나 운전기사로 부려먹는다”고 폭로했다. 그리고 아이유의 ‘좋은날’ 뮤직비디오에서 정재형은 첼로며 트럼펫을 연주하는 음악 요정으로 등장했다. <라디오 천국>‘라비엥로즈’ 코너에 매주 고정 게스트로 그를 초대한 DJ 유희열은 ‘박정현, 김연아와 더불어 대한민국 3대 요정인 음악 요정’ 이라 칭하며 이 캐릭터를 굳혀주었다. 이 코너에서 정재형은 불어를 사용하며 잘난 척할 기회를 얻었지만, 매번 말을 더듬고 버벅대며 놀림거리로 전락해서 오히려 측은함을 느끼게 한다. 역시 유희열이 진행하는 <스케치북>연말특집에서는 아예 천사 날개를 달고 나와 장윤주와 이마를 맞대는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렇게 대중음악을 하면서도 대중으로부터 한 발 떨어져 있던 정재형의 고상한 이미지는 희화화되면서 그의 캐릭터를 형성하고, 대중과의 거리감을 좁혔다.

정형돈을 만나 ‘파리돼지앵’을 결성한 <무한도전>이 바야흐로 정재형 커리어의 정점을 이룬다. 어설프고 주책없는, 그러면서도 싫은 게 분명한 정재형의 행동은 제멋대로인 예술가이되 밉지 않게 비추어졌다.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던 그 애매모호한 웃음소리는 김태호 피디의 자막을 입으면서 우리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아호호아호호홍’ 하는 글씨와 곁들여진 분홍 꽃그림으로. 그러나 <무한도전>에서 ‘유희열 나부랭이’ ‘김동률 조무래기’라고 일컬으며 동료 음악인을 디스하는 그의 장난이, 안테나뮤직이라는 기획사의 테두리 안에서 벌이는 개그의 퍼포먼스가 웃기되 우스워지지 않는 건 역시 음악에 대한 진지함 덕분이다. ‘순정마초’에 정통 탱고의 영혼을 불어넣고 26인조 오케스트라 연주를 고집할 때,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를 삼바로 편곡해 직접 스텝을 밟으며 관객들에게 리듬을 가르쳐줄 때 우리는 정재형이 언제라도 음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신감이 있기에 맘껏 망가질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안테나뮤직 워리어스 공연을 마친 뒤 유희열이 롤링페이퍼에 적은 한 마디는 정재형에게 느끼는 양가감정을 응축한다. “난 형이 창피해, 그래서 좋아해.” 물론 구멍 뚫린 발맹 티셔츠와 보테가 베네타 쇼퍼백, 그리고 브랜드를 뛰어넘은 그의 스타일은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만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정재형이 입었던 옷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건, 노랑 바탕에 클로버가 그려진 ‘걸스카우트’ 티셔츠였다. 초등학생 같은 실루엣의 몸에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