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과 SNS의 시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GPS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알리며, 주변에 있는 온라인 친구를 찾는다. 이런 지금 세월과 문화를 깨알같이 쌓아온 강북의 동네들에 주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당신이 어디서 노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는 것.

북촌 시간의 속도를 늦춰주는 동네

물론 ‘동네’란 사는 곳 근처를 뜻하는 심상한 단어다. 그런데 종종 이 말을 들을 때면 사전적 의미와 상관없이 가물가물한 풍경을 그리게 되곤 한다.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키 작은 주택들, 손바닥만 한 점방, 글자 받침이 하나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낡은 간판, 진공 상태처럼 고요한 오후의 골목 같은 것들. 그러니까 요즘 대부분의 서울 주택가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장면 말이다. 찻길 옆 고층 건물의 한 칸씩을 차지하고 사는 우리들의 주변은 대체로 바쁘고 소란하다. 당연히 동네지만, 어쩐지 동네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재동 초등학교에서 몇 걸음만 더 떼면 닿게 되는 계동은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도 동네라는 단어가 맞춘 듯 어울리는 곳이다. 단정한 한옥들, 그리고 꽤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을 것 같은 가게들이 자연스레 뒤섞여 있는 광경은 어딘가 정답게 느껴진다. 미용실, 목욕탕, 그리고 서점까지 죄다 20년 전의 사진에서 오려낸 것처럼 그리 세련되질 못한데 그 투박함이 되려 반갑다. 특히 길 허리쯤에서 열어둔 유리문 틈으로 기계 소리를 툴툴 흘리는 계동 방앗간은 여기가 서울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잠깐이나마 잊게 만든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난다는 게 정말인가 봐요. 가끔씩 그 주변에 떼로 모여들곤 하던데요?” 최근 계동길의 일원으로 합류한 회화 작가 심아빈은 이 거리의 구식 매력을 흡족하게 즐기고 있었다. 삼청동 언저리를 돌며 적당한 작업실 자리를 찾다가 그 호젓함이 마음에 들어 내려앉게 된 지역이다. 과연 계동주변은 경유지보다 목적지로 삼고 싶은 풍경이다. 계동, 그리고 이곳과 맞닿아 있는 가회동에선 몇 년 새 다른 지역으로부터 옮겨온 미술작가, 공예가, 가구 디자이너 등의 스튜디오나 숍, 갤러리 등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덕분에 그 지형도는 평화롭게 불균질한 인상을 띠기도 한다. 고요한 동네에서의 일상을 성실하게 채워가는 주민들과 그 남다른 공기에 이끌린 예술가들, DSLR을 멘 소수의 아마추어 사진가들, 그리고 <겨울연가>의 촬영지였던 중앙고등학교를 찾아온 일본인 관광객들이 아직까진 서로 괜찮아요,하는 태도로 뒤섞인다.

그런데 과연 이 언저리는 언제까지 지금의 여유로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북촌을 주목하는 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많아지는 눈치다. 아트토이 윕(Ouip)의 숍과 갤러리를 겸하고 있는 ‘델리토이즈’에 머무는 동안, 길 건너편에선 한 케이블 TV의 패션 정보 프로그램 촬영이 한창이었다. 가로수길이나 삼청동이 그랬듯 조만간 이 골목도 재미없게 세련된 카페와 식당들에 점령당하고 마는 걸까? “상업 공간이 늘고 있는 건 확실해요. 그래도 그렇게까지 급한 변화는 없지 않을까 예상하고, 또 기대합니다. 한옥보호지구라는 게 일종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상황이죠.” ‘델리토이즈’의 이재혁 디렉터가 덧붙이는 의견이다. 물론 느리든 빠르든, 그리고 거창하든 소박하든 모종의 변화는 찰박찰박 차오르는 빗물처럼 인근 한옥의 댓돌들을 적실 것이다. 최근에야 이 드문 풍경을 발견하고 마음을 주게 된 객의 입장에서는 모쪼록 그 변화가 신중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수년째 계동길의 사랑방 노릇을 해온 카페‘ 커피 한잔’이 9월 초에 사직동으로 이사했다는 건 꽤 서운한 소식이었다. 일부러 생채기를 낸 가짜 빈티지가 아닌, 진짜로 고물상이나 벼룩시장에서 막 주워온 듯한 물건들을 천연덕스럽게 쌓아둔 채 정신이 바짝 들 만큼 진한 더치 커피를 팔던 이 가게야말로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퍼즐 조각 같았으니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멀끔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이 대신 들어서기라도 한다면 아마 꽤 서글플 거다. 함께 나란히 선 파스타 식당인 ‘ 이태리 면사무소’의 것처럼, 그리 새침하지 않은 간판이 새로 붙길 기다리는 중이다.

한편 계동과 가회동에서 벗어나 정독도서관 앞까지 걸어온 뒤 조금만 더 헤매면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나뉜 사간동 골목과 만나게 된다. 불과 한두 블록 밖의 소란한 거리와는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는 듯 한갓지기만 한 길이다. 번지수를 고스란히 상호로 삼은 ‘사간동 9번지’는 일종의 한옥 숙박(혹은 체험) 시설이다. 이곳을 집이자 일터로 삼고 있는 나정원은 마당과 함께 지내는 일상에 혹해 해외로 떠나려던 계획도 보류하고 일단 자리를 폈다. 익숙하거나 새로운 사람들에게 몇 시간의 유쾌한 취기, 혹은 하룻밤의 색다른 숙면을 제공하는 지금의 생활이 그럭저럭 즐거운 듯 보였다. 너그러운 가격이나 서비스는 사업가의 수완보다 사람 좋아하는 오너의 인심으로 해석해야 할 거다.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사간동에선 숙박시설이든 문화시설이든 상업공간이든 다들 ‘집’과 닮아 있다. 갤러리 현대는 양옥집 하나를 프로젝트 전시 공간으로 꾸민 뒤 이름은 ‘16번지’라고 담백하게 붙였다. ‘사간동 9번지’와 마찬가지로 간판 대신 주소를 내건 점이 눈에 띈다. 개성이 뚜렷한 젊은 작가들이야말로 ‘16번지’가 특별하게 반기는 손님이다. 9번지나 16번지나 겉으로 보기엔 별스러울 것도 없이 아담한 한옥, 또는 양옥이지만 그 시침 뚝 뗀 대문 안쪽에선 즐거운 궁리가 일년 내내 이어진다. 사간동은 좀 이런 느낌이다. 아는 사이에만 유쾌한 꿍꿍이를 내어 보이는, 흥미진진하게 과묵한 친구.

계동, 가회동, 그리고 사간동 등으로 구비구비 이어지는 북촌의 가장 큰 매력은 우리가 막연하게 품고 있는 동네에 대한 동경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이 지역은 홍대 앞처럼 젊지도 않고, 이태원만큼 세련되지도 못하다. 그저 사람들이 1백여 미터 밖보다 조금은 느릿한 리듬으로 살아가고 가끔씩 재미있는 일들을 벌인다. 초속 1백 미터 정도로 달려가는 도시에도 이런 풍경은 필요하다. 밤이 늦도록 분주했다면 그만 한적하고 편안한 동네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싶어질 테니까.

1, 3, 5. 계동 주택가의 호젓한 골목들. 2, 9. 한옥체험공간인 사간동 9번지. 주소를 간판 대신 걸었다. 4. 분식점처럼 소박한 파스타 레스토랑 이태리 면사무소. 6, 14. 최근 사직동으로 자리를 옮긴 카페 커피한잔이 아직 계동에 머물 무렵. 7, 12. 플랫폼 토이 윕의 갤러리 겸 숍인 델리 토이즈. 8. 계동교회가 내려다보이는 풍경. 10. 계동길 입구의 고풍스러운 건물 최소아과의원. 11, 13. 가구 디자이너 한정현의 쇼룸 겸 갤러리 체어스 온 더 힐.

1, 3, 5. 계동 주택가의 호젓한 골목들. 2, 9. 한옥체험공간인 사간동 9번지. 주소를 간판 대신 걸었다. 4. 분식점처럼 소박한 파스타 레스토랑 이태리 면사무소. 6, 14. 최근 사직동으로 자리를 옮긴 카페 커피한잔이 아직 계동에 머물 무렵. 7, 12. 플랫폼 토이 윕의 갤러리 겸 숍인 델리 토이즈. 8. 계동교회가 내려다보이는 풍경. 10. 계동길 입구의 고풍스러운 건물 최소아과의원. 11, 13. 가구 디자이너 한정현의 쇼룸 겸 갤러리 체어스 온 더 힐.

살롱 드 플로르
계동 길 위에 자리한 작은 화원 겸 갤러리. 몇 사람만들어서도 그득해질 만큼 아담한 공간이지만 플로리스트 박사임은 한쪽 벽을 알뜰하게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미술작가와 플로리스트의 공동작업이 소담하게 자리한 광경은 방문객들에게 뜻밖의 즐거움을 주곤 한다. 꽃을 사려는 사람에게도, 굳이 살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도 모두 열려 있는 특별한 꽃집. 작가 심아빈이 참여한 <꽃다운 내 인생>에 이어 현재는 10월 16일까지 <우리 동네 꽃집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다. blog.naver.com/saimiok

이태리 면사무소
역시 계동길에서 만날 수 있는 재미있는 이름의 파스타 식당. 여고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어색해하지 않고 들를 수 있을 법한 분식집처럼 편안한 분위기가 이 동네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가장 비싼 메뉴라도 1만원을 넘지 않는 저렴한 가격이나 과하게 자극적이지 않은 집밥 같은 맛, 후식으로 내주는 수국냉차까지 소박한 서비스 덕분에 더 특별해 보이는 곳이다. 02-3676-0233

이도
도자기 숍과 갤러리, 아카데미가 한 건물 안에 모인 가회동의 복합 문화공간. 도예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여기서 경험할 수 있다. 특히 정기적으로 열리는 할인 행사인 만원 그릇전 기간에는 알뜰한 쇼핑객들 덕분에 거의 장터처럼 북적대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흔하게 사용하는 그릇이나 소품에도 예술이 깃들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장소다.www.yido.kr

델리토이즈
가회동 큰길가에 위치한 아트토이윕(Ouip)의 숍 겸 갤러리. 팔다리가 달린 전구처럼 보이는 윕은 말하자면 인형 형태의 캔버스다. 직접 그림을 그려 원하는 대로 꾸미는 용도인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다면 ‘델리토이즈’한 쪽에 전시된 젊은 아티스트들의 작업에서 힌트를 얻어도 좋다. www.delitoys.com

체어스 온 더 힐
가회동 골목 안쪽에 깊숙이 자리한, 가구 디자이너 한정현의 쇼룸 겸 갤러리. 짜인 틀 안에 사용자가 직접샴페인 코르크마개를 채워 넣어야 완성되는 의자 ‘Corkn Cork’, 몸통에 달린 여러 개의 팔을 접거나 펼쳐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는 옷걸이 ‘Swing & Hang’처럼 유머러스한 아이디어와 실용성이 모두 돋보이는 작품을 넉넉히 둘러볼 수 있다.www.chairsonthehill.com

사간동 9번지
주소가 곧 상호가 되어버린 한옥체험 공간. 작은 정원이 딸린 한옥에서 넉넉하게 먹고 마신 뒤 하룻밤의 휴식까지 청할 수 있다. 솔깃한 입소문 덕분에 이미 단골이 적잖이 생긴 터라 궁금하다면 일찌감치 예약을 넣어야 한다. 아예 집 전체를 빌려 오붓한 파티를 열고자 하는 문의도 많다는 귀띔.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는 건 없는 화개장터 풍 메뉴판에선 어떤 걸 골라도 다 맛있다. 02-735-40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