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튀르의 세계를 기둥처럼 받들던 터줏대감, 크리스찬 라크로와가 빠졌어도 어김없이 쇼는 계속되었다. 승마 모티프에 빠진 디올의 갈리아노는 우렁찬 기수가 되어 런웨이를 달렸고,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는 그의 새로운 뮤즈, 나탈리아 보디아노바를 앞세워 자신의 파리지엔 시크를 천명했다. 수천 개의 다이아몬드로 수를 놓은 비단 드레스, 건축물을 방불케 하는 조형적인 페티코트, 깃털과 섬세한 레이스로 쌓아 올린 헤드피스. 공들여 성장한 숙녀들이 사는 세상, 패션이 꾸는 꿈. 2010년 봄 오트 쿠튀르의 세계로.

CHANEL

쿠튀르와 레디투웨어를 포함하여 총 53번의 컬렉션을 샤넬에서 치르고 난 칼라거펠트의 54번째 ‘비장의 수’는 무엇일까? 그 답은 바로‘은색’이었다.“ 단 한 개의 금색 단추도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쇼 시작 전, 라거펠트는 흰 장갑을 낀 손가락을 들어올려 강조하듯 말했다.샤넬의 상징인 검정과 흰색? 역시 없었다. 라거펠트는 로맨틱한 파스텔 컬러와 은색 위주의 메탈릭한 빛을 이용하여 패션계의 위대한 유산인 샤넬 수트에 에너지와 현대적인 느낌을 불어넣었다. 그가 밝힌 이번 쿠튀르의 콘셉트는‘네온 바로크’. 셔벗을 연상시키는 파스텔 톤의 데이 웨어에는 지그재그 스티치, 메탈릭한 꼬임 장식이 더해지면서 미래적인 매력을 더했다. 쇼 후반부로 갈수록 샤넬 공방의 솜씨는 더욱 놀랍게 드러났는데, 예를 들면 200m의 튤 소재를 사용한 케이프, 솔기가보이지 않도록 손바느질에만 35시간이 걸려 완성한 드레스, 은색 페인트를 사용하여 수은으로 덮인 듯한 효과를 내는 염색 등이다. 한편, 점점 어려지고 있는 쿠튀르 고객들을 의식한 듯, 샤넬의 시그너처를 좀 더 젊은 방식으로 재해석한 피스도 선보였다. 리틀 블랙 드레스에는 작별을 고하고 헐렁한 민트 그린 시프트 드레스가 나왔으며, 진주는 목걸이나 벨트로 사용하는 대신 로코코 스타일의 플랫폼 슈즈, 혹은 앵클부츠에 장식했다. 전 세계적인 경제불황에도 불구하고 샤넬은 작년에 쿠튀르 판매 실적이 꽤 좋았다. 가벼운 레이스, 하늘하늘한 톱, 두꺼운 실크와 새틴 장식으로 이루어진 칵테일 드레스들은 샤넬의 쿠튀르 컬렉션 판매에 큰 힘을 보탤 것으로 보인다.

DIOR

몽테뉴 애비뉴에 위치한 디올의 회색빛 본사 살롱에 울려 퍼진 말발굽 소리는 디올의봄 쿠튀르 컬렉션이 승마 모티프로 점철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모델들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디올의 헤리티지를 향한 존 갈리아노의 탐험 열정은 여전했다. 바닥을 끄는 드레스 자락, 숨쉴틈 없이 꽉 조인 허리, 비대칭적인 스커트, 그리고 유쾌하면서도 클래식한 색상 조합. 뉴룩을 창조한 무슈 디올의 초기 영감을 되돌아본 이번 컬렉션에서도 갈리아노의 3대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자신의 로맨틱한 감성, 바 재킷을 비롯한 디올의 핵심 아카이브를 현대에 되살리는 상상력, 그리고 탄탄한 재단 실력이 그것이다.갈리아노는 쇼 초반부터 승마 재킷과 스커트로 시선을 제압했다.재킷은 에드워드 시대의 주름 장식으로 마무리를 하고, 스커트는 골반 높이에 플리츠 주름과 꽃 장식을 더해 한쪽으로만 볼륨을 실어주는 디자인이었다. 이번 컬렉션에서 주요하게 언급되어야 할인물은 무슈 디올이 뉴 룩을 창조하는 데 영향을 준 19세기 디자이너 찰스 제임스이다. 그는 신문이나 테이프 등 드레스 모양을 원하는 대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재료라면 무엇이든 드레스 속에 채워 넣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갈리아노가 이를 참고해 응용한 방법은 견고하고 호사스러운 실크를 여러 겹 겹쳐서 볼록하고 돌출된 실루엣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 기법을 사용한 드레스들은 마치 세실 비통의 포트레이트에서 튀어나온 듯, 두 색상을 파격적으로 조합했다. 갈리아노는 이번 컬렉션을 위한 자료 조사를 뉴욕에서 진행했는데, 특히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아메리칸 뷰티>전이 큰 도움이 되었고, 그 덕에 디올의 이번 쿠튀르 컬렉션은 유럽과 미 대륙의 상류사회 여성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것으로 보인다.

ARMANI PRIVE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눈에는 할리우드의 여신 같은 스타들이 ‘태양’이 아니라‘달’로 비친 모양이다.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디자이너중 한 명인 아르마니는 여러 굵직한 시상식이 몰려 있는 시즌을 맞이하여 정확히 레드카펫을 겨냥한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주된 테마로‘달’을 선택하고 무대 전면에 커다란 초승달을 장식하는 것은 물론, 드레스 곳곳에도 달 모티프를 사용했다. 그것도 달의 은은함을 표현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무대 배경을 비롯하여 단추, 브로치, 목걸이, 그리고이브닝 백에까지 달 모티프는 끊임없이 등장했다. 소재는 영롱한 오팔 빛, 부드러운 광택, 혹은 보석 장식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것만 골라 사용했고, 색상은 창백한 아이보리에서 잿빛 핑크, 혹은밤을 상징하는 어두운 검정 일색이었다.하지만 아르마니가 의도한 테마를 가장 잘 표현해준 것은 달 모양의 장식이 아니라, 이지러진 달의 곡선을 닮은 실루엣이었다. 그는 예전보다도 훨씬 가늘고 간결한 실루엣을 선보였는데, 예를 들어 아치 형태를 이용한 튤립 스커트를 날카롭게 재단된 작은 사이즈의 재킷과 매치한 식이다. 재킷의 목선은 섬세한 주름으로 장식을 했고, 허리는 최대한 꼭 조이도록 재단하여 실루엣의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물론 아르마니는 가끔 피에르 가르뎅이나 앙드레 쿠레주가 60년대에 정립한‘퓨처리즘’을 탐미하곤 했지만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달에 집착한 컬렉션은 다소 의외였다. 하이힐을 덮는 간결한 팬츠나 커다란 후프(훌라후프처럼 보이기도 하는)를 밑단에 배치한 드레스 같은 피스들은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아르마니의 평소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지난해 오스카시상식에서 아르마니를 입은 앤 해서웨이가 프런트로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으니 그녀의 선택은 확실해 보이지만, 다른 여배우들의 선택은 어떨까? 그 결과가 자못 궁금해진다.

GIVENCHY

런웨이 쇼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디자이너와 쇼 디렉터들이 극대화된 장치를 선보이곤 하지만, 패션 런웨이는 어디까지나‘옷’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런웨이 쇼가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는 이번 시즌 지방시에게는 상당히 민감한 질문이 될 듯하다.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의 독특한 감성을 바탕으로 부활한 지방시는 60년대의 지방시와는 이미 현저하게 다른 길을 걷고있기에 현재 하이패션계에서 일종의 틈새시장을 노리는 브랜드라 할 수 있다. 파리 베이스의 클래식한 쿠튀르 브랜드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티시의 재능에 기대어 트렌디함을 강조한 브랜드로 갈 것인가. 지방시의 이번 쿠튀르는 그런 의문을 품게 만든 쇼였다.웨스틴 호텔의 임페리얼 살롱에서 티시가 선보인 22가지의 룩은 일정한 테마가 없어 보였다. 나탈리아 보디아노바가 입은 러플 드레스처럼 우아한 것도 있었고, 초록과 파랑의 메탈릭한 드레스처럼 서커스를 연상키는 화려한것도 있었다. 쇼 시작 부분에 등장한 턱시도와 실크 연미복은 티시의 재단 실력을 확실히 보여주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쇼 자체에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번 컬렉션을 위해 티시가 영감을 받은 것은 이탈리아 가수레나토 제로의 룩이었다. 데이비드 보위의 사촌인 레나토는 중성적이고 기이한 무대의상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기하학적인 패턴의 시퀸 점프수트는‘재해석’없이 등장해 아쉬움을 낳았다. 크리스털 보디스와 커다랗게 부풀린 헴라인이 특징인 보라색 드레스도 평소의 티시에 비해 너무 화려했다. 만약‘런웨이쇼’라는 방식 때문에티시가 지나치게 과장된 디자인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라면, 쿠튀르를 선보이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JEAN PAUL GAULTIER

장 폴 고티에는 그의 시그너처 디자인을 기반으로 다양하고 기발한 콘셉트를 녹여내는 솜씨로 유명하다. 그것이 40년 넘게‘앙팡테리블’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게 만든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멕시코였다. 어쩌면 사교계 여성보다는 쇼걸을 위한 컬렉션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화끈했다. 컬렉션 영감을 얻기 위해 고티에가 멕시코에 다녀왔느냐고? 미안하지만, 고티에는20년 넘게 남미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이 남자의 상상력이 더욱 놀라울 수밖에.과장된 화려함 속에서도 고티에의 시그너처는 곳곳에 배치되었다. 남성-여성 룩의 조합은 뷔스티에와 볼레로가 합쳐진 재킷과 금 단추를 장식한 해군스타일의 팬츠 수트에서, 코르셋 장식은 연미복을 포함한 다양한 파워 숄더재킷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노출이 심한 섹시한 이브닝드레스는 가죽, 저지, 실크 소재로 만들어 고급스러움을 배가했다. 멕시코의 실내 장식에서 쉽게찾아볼 수 있는 강렬한 무늬의 벨벳 카펫을 재현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색상의 실크 소재를 바탕으로 장시간의 수공예 작업을 했음은 물론이다. 이번 컬렉션은 또한 고티에 특유의‘쇼쇼쇼!’를 관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고티에는 이번 쇼를 위해 멕시코 태생의 배우 겸 가수, 아리엘 덤배슬을 초대하여 무대에서 멕시코 전통 가요를 부르게 했으니! 아카풀코 해변 스타일을 좋아하는 상류사회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매력적인 판타지 드레스로 가득한 컬렉션이었다.

VALENTINO

오트 쿠튀르에 젊은 세대나 쓰는‘쿨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릴까? 발렌티노의 디자이너 마리아 그라지아와 파울로 피치올리는그렇게 되길 원하는 것 같다. 발렌티노의 쿠튀르 쇼 얼마 전에 열린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쿨함’의 대명사인 여배우 클로에 세비니가 발렌티노의 러플오간자 드레스를 입었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욱 흥분시킨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이번 컬렉션은 젊고 쿨한 여성들이 원하는 분위기에 초점을 맞춘 듯 보였다.그들이 의도한 이번 쿠튀르 컬렉션의 주제는‘시각화된 에덴’이었다고 한다.이를 극명하게 보이기 위해 듀오 디자이너는 쇼 무대에 미국의 설치예술가제니퍼 스타인캠프의 <회전하는 나무들>의 영상을 올렸고 모델들의 팔과 다리, 눈 주변에는 영화 <아바타>를 상기시키는 푸른 메이크업을 뒤덮었다. 펄럭이는 나비떼를 프린트한 드레스, 깃털이 장식된 튜닉, 그리고 숲 속 요정을 떠올리게 하는 창백하고 투명한 드레스를 보면 그들이 원하는 느낌을 창조하는 데에는 꽤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발렌티노가 아닌 다른 브랜드에서 빌려온 ‘에지’있는 요소들도 꽤 눈에 띄었다. 네온 색상, 소재의 공격적인 혼합, 혹은 다리를 옥죄는 레깅스를 이용해 만든 극도로 가느다란 실루엣 등등. 물론 보기에도 아름답고 입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이 환상의 세계에 과연 발렌티노의 요소는 어디에 있는지 의문이 든 것도 사실이다. 층층의 러플과 드레이핑 장식, 빨간색과 같은 브랜드 고유의 요소는 자취를 감췄다. 요즘 대부분의 패션하우스는 그들의 전통을 다시 들춰내어 강조하는 추세이고 그것이경제불황에 겁먹은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보다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오래된 로마 하우스를 이어받은 이 신세대 듀오 디자이너는 과연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