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다리, 도쿄의 밤에 펼쳐진 에르메스 디렉터 베로니크 니샤니앙의 마지막 무대

이예진

에르메스 맨즈 유니버스 아티스틱 디렉터 베로니크 니샤니앙(Véronique Nichanian)의 마지막 무대, ‘Bridge of Light’가 도쿄에서 펼쳐졌다.

긴자 한복판의 고가도로를 런웨이로 삼아 지난 1월 파리에서 공개된 2026 F/W 컬렉션을 다시 선보인 자리였다. 37년간 이어온 쇼들의 피날레 장면을 담은 스크린 연출과 쏟아진 기립박수는, 부드러운 변화로 에르메스 남성복의 세계관을 확장해온 그녀에게 보내는 헌사였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남성의 옷장 이야기, 계절과 시간을 넘어 이어져온 에르메스 남성복과 베로니크의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베로니크 니샤니앙이 선보인 지난 쇼들의 피날레 장면을 담은 스크린.
에르메스 맨즈 유니버스 아티스틱 디렉터로 마지막 컬렉션을 선보인 베로니크 니샤니앙.
긴자 메종 에르메스가 내려다보이는 고가도로 위를 런웨이로 삼았다.

<W Korea> 에르메스 맨즈 컬렉션의 마지막 무대였던 만큼, 이번 도쿄 쇼의 피날레는 더욱 깊은 여운을 남겼다. 쇼를 마친 직후의 기분은 어땠나?
베로니크 니샤니앙
많은 분들이 보내준 특별한 헌사 덕분에 벅찬 감동을 느꼈다. 이어진 기립박수는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예전 쇼들의 피날레 장면을 담은 스크린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도쿄 쇼의 연출 역시 감동적이었고, 울컥하는 순간도 있었지만 매우 즐겁고 행복했다.

2026 F/W 컬렉션의 이야기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이번 시즌을 위해 특별히 염두에 둔 지점이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회고전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직전의 여름 컬렉션 흐름을 자연스럽게 잇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다만 이번 컬렉션에는 지난 37년 동안 선보인 디자인 중 일부를 포함시켰다. 에르메스의 옷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고, 얼마나 유행을 타지 않는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과거 디자인과 이번 컬렉션을 쉽게 구분하지 못하기도 했다.

파리 쇼와 도쿄 쇼의 시노그래피 모두 인상적이었다. 이번 도쿄에서 진행한 쇼 공간을 구상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는 무엇이었나?
긴자 한복판의 고가도로를 런웨이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험이었다. 쇼가 열린 장소에서는 긴자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그 풍경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파리 쇼에서 선보인 대형 스크린과 시노그래피를 그대로 옮겨오되, 런웨이 정면에는 긴자의 풍경이 펼쳐지도록 연출했다. 덕분에 이번 쇼를 통해 밤낮없이 움직이는 이 도시의 에너지 속에 자연스럽게 참여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파리 쇼가 끝난 지 얼마 안되서 도쿄에서 다시 컬렉션을 선보였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지난해 서울 한강변 보드워크에서 선보인 2025 S/S 컬렉션에 이어서 이번 쇼에도 배우, 무용수, 셰프 등 패션 모델이 아닌 다양한 인물이 런웨이에 올랐다. 이러한 캐스팅을 이어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서울, 도쿄, 뉴욕 등에서 컬렉션을 다시 선보일 때는 전문 모델이 아닌 인물을 섭외한다. 에르메스는 특정 유형의 남성상이 아니라 체형과 국적, 나이와 취향이 다 다른 다양한 남성상을 포용하기 때문이다. 모델이 아닌 사람들이 마치 일상에서 걷듯 자연스럽게 런웨이를 누비는 모습은 보다 현실적이고 생생한 감각을 전한다. 이번 긴자 쇼에서는 일본의 유명인들과 에르메스 내부 인사들도 런웨이에 등장했다. 일본 배우 카사마츠 쇼와 사이토 타쿠미, 건축가 후지모토 소스케, 피아니스트 스미노 하야토, 셰프 코바야시 케이를 비롯해 에르메스 남성 실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토프 과노, 아틀리에 호라이즌의 악셀 드 보포르, 그리고 에르메스 재팬 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세이치 카메이 세이치 등이다.

이번 인터뷰는 패션계에서 아주 오랜 기간 한 브랜드의 남성복을 이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 한 사람으로서, 당신이 에르메스에서 보낸 시간을 듣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1988년, 에르메스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처음 하우스와 인연을 맺었다. 그 시절을 떠올려본다면 어떤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르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장-루이 뒤마 회장이 내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제안했던 순간이다. 에르메스 남성복을 맡아 하나의 작은 회사처럼 운영해보라는 그의 제안 덕분에 지난 37년 동안 에르메스 남성의 정체성과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었다. 장인 정신에 충실하면서도 동시대 남성의 삶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 말이다. 나에게 흥미로운 작업은 오늘을 위해 입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의미 있는 옷, 다시 말해 시대를 초월하는 옷을 정의하는 일이다. 그것은 탁월한 소재와 현대적이면서도 오래 지속될 라인을 통해 구현된다.

당시만 해도 여성 디자이너가 유서 깊은 럭셔리 브랜드의 남성복을 총괄한다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맞다. 젊은 여성인 제게 남성복을 맡겼다는 점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결정이었다. 짐이 가볍지는 않았지만 옷을 만드는 일 자체에 온전히 집중했다. 중요한 것은 컬렉션을 만들고 하나의 스타일을 표현하는 일이다. 창작에서 성별은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2008년에는 맨즈 유니버스 아티스틱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남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서 맨즈 유니버스 아티스틱 디렉터로 역할이 바뀌며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이었나?
피에르 알렉시 뒤마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와 함께 일하게 되면서 나의 역할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비슷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크리스토프 과노와 피에르 아르디를 비롯해 각 메티에의 책임자들, 가죽 제품과 액세서리를 담당하는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며 그들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때로는 더 유머러스하거나 새로운 시도를 해보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남성복 디렉터 시절이 비교적 소규모 팀 중심의 작업이었다면, 이후에는 여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과 함께 남성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일했다.

해를 거듭하며 첫 컬렉션을 선보였을 때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당신의 미학은 어떻게 변화했나?
내가 정의해온 ‘에르메스 남성’이라는 개념에 충실해왔다고 생각한다. 토털 룩을 제안하기보다는 하나의 오브제로 존재하는 옷을 만들고자 했고, 각각의 옷이 다양한 체형과 삶의 방식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전통이 깊은 하우스인 만큼 새로운 소재와 구조를 통해 혁신을 꾀하고자 애썼다. 그럼에도 나의 미적 감각, 그 방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파리 쇼에서 20년, 30년 전의 옷을 다시 선보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길을 꾸준히 걸어왔기 때문이다. 유행을 따르기보다 자신만의 방향을 지켜가는 것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에르메스 남성복에서 만들어낸 가장 의미 있는 변화가 있다면 무엇일까?
내가 추구해온 것은 ‘부드러운 혁명’이다. 급진적인 변화 대신 매 시즌 새로운 소재와 컬러를 조금씩 제안하며 남성 스타일 안에 자연스럽게, 지속적으로 변화를 도모했다. 이러한 방식은 젠더의 경계가 점점 유연해지는 오늘날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에르메스 남성복만의 특별함은 무엇인가?
정교한 재단과 섬세하고 유연한 라인, 그리고 탁월한 소재가 핵심이다. 소재는 작업의 출발점이며, 컬러와 형태, 가죽의 선택과 마감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테일이 중요하다. 나는 옷이 만들어지는 각 단계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왔고, 이러한 품질이 곧 에르메스 남성복의 정신을 정의한다고 생각한다.

당신도 자신이 디자인한 남성복을 즐겨 입는지 궁금하다. 자주 손이 가는 아이템이 있다면 무엇인가?
남성복 스웨터나 팬츠, 가죽 재킷 등을 작은 사이즈로 제작해 착용하는데, 가끔 나데주 바니 디렉터의 에르메스 여성복 컬렉션에서 선택해 입기도 한다.

여성에게 추천할 만한 에르메스 남성복이 있는지?
많이 있지만 각자의 개성이 중요하다. 여성이 남성복 컬렉션을 착용한 모습을 매우 좋아한다. 약간의 오버사이즈로 보이는 느낌이 매력적이면서도 시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쇼 노트에 적힌 “오늘을 위한 옷이자, 시간을 넘어 지속될 옷”이라는 문장처럼, 에르메스 남성복은 트렌드를 따르기보다는 오랜 시간 가치있는 옷을 제안해왔다. 이러한 태도는 컬렉션을 구상할 때 의식적으로 중심에 두는 가치인가?
유행을 따르기보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타일은 곧 개성이니까. 특히 가격대가 있는 옷일수록 오래 입을 수 있는 품질과 지속 가능성이 중요하다. 신중하게 소비하고 필요하다면 수선하며 오래 입는 것, 에르메스가 오래전부터 지켜온 가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각은 내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다.

당신을 두고 ‘에르메스를 변화시키기보다 진화시킨 디자이너’라고 평가한다.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 평가를 내가 직접 판단할 수는 없지만 에르메스에 하나의 관점과 경험, 그리고 비전을 제시해왔다고 생각한다. 에르메스는 매우 역동적인 하우스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질문을 던지는 곳이다. 나 역시 이러한 진화과정을 함께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에르메스에 대해 지닌 고정관념과 달리, 에르메스는 훨씬 힘차고 활발하게 움직이며 스스로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브랜드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부드러운 혁명’은 매우 중요하며, 이 과정에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 기쁘다.

앞으로의 계획은?
나는 에르메스를 떠나는 것이 아니다. 남성 유니버스의 아티스틱 디렉션에 계속 참여하며, 가죽 메티에와 남성 실크 메티에를 맡을 예정이다. 여행도 더 많이 하면서, 내가 가진 다른 열정들도 꾸준히 즐길 거다.

여행지는 어딘가?
나는 아시아를 매우 좋아하고 특히 일본을 좋아해 여행할 계획이다. 한국도 물론 방문하게 될 것 같다. 프랑스에서도 좋아하는 곳이 많아 곳곳을 여행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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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 TSUCHIYA ⒸKOJI SHIMAMURA ⒸKAITO CHIBA ⒸNACÁSA & PARTNERS ⒸYASUTOMO EBISU ⒸMICHAEL HAUPTMAN ⒸIBU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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