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 로게가 쓰는 마르니의 뉴 챕터

신지연

마르니의 흔적을 품은 채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 메릴 로게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를 나와 마크 제이콥스 디자인 팀, 드리스 반 노튼의 여성복 총괄을 거쳐,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론칭하기까지, 메릴 로게(Meryll Rogge)는 오랜 시간 패션계에서 단단한 커리어를 쌓아온 디자이너다. 지난해 프랑스 국립 패션예술진흥협회(ANDAM) 어워드 그랑프리를 거머쥔 그녀는 지난 7월 마르니의 새로운 디렉터로 임명되며 또 한 번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어쩌면 아직 낯설었을 이름에 패션계의 시선은 빠르게 쏠렸고, 그녀의 첫 마르니 컬렉션이 2026 F/W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베일을 벗었다. 디자인 스튜디오 포르마 판타스마(Forma Fantasma)가 구상한 쇼장. 그 곳에서 하우스의 아카이브에 메릴 로게만의 미학이 더해진 아름다운 작품들이 등장했고, 이는 단순한 반복이 아닌 회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마르니의 흔적을 품은 채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간 그녀와 쇼 직후 만난 더블유. 그 이야기를 지금 공개한다.

메릴 로게

<W Korea> 어제 마르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첫 쇼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축하한다.
메릴 로게
정말 행복하다. 작년 7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이후 내가 그리는 마르니의 비전을 보여줄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상상 속에만 있던 모든 그림이 하나로 맞춰진 기분이다.

이번 컬렉션은 마르니의 과거와 미래, 회상과 기대가 공존하는 쇼였다. 첫 컬렉션을 준비하며 어떤 기조로 접근했나?
마르니의 본질에 집중했다. 마르니의 설립자인 콘수엘로 카스틸리오니, 그리고 프란체스코 리소를 이은 세 번째 장에서 그들이 정립한 하우스의 정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싶었다. 물론 과거에 갇히거나 향수에 젖기보다, 오늘날에 유효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끊임없이 탐구했다.

럭셔리 브랜드의 수장이 바뀌는 것은 큰 변화다.
맞다. 10대 시절 패션에 처음으로 눈떴을 때 마르니라는 브랜드를 알게 됐다. 20대 때는 어시스턴트로 받은 첫 월급으로 마르니 샌들을 샀다(웃음). 청소년기부터 20대, 30대까지 함께해온 마르니는 나의 패션 비전에 근간이 된 브랜드다. 이번 컬렉션을 준비하며 나처럼 기존의 마르니를 사랑해온 사람들에게도 브랜드의 아이덴티티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카이브 요소와 나의 감정을 융합하되, 지나치게 직설적이 않게 풀어내고 싶었다.

포르마 판타스마가 구상한 쇼 공간.

컬렉션을 준비하면서 가장 염두에 둔 질문은 무엇이었나?
‘마르니를 입는 사람의 느낌은 무엇인가?”였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마르니를 입은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독립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강인한 인물이다. 바쁜 일상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직장이나 행사 혹은 간단한 미팅 자리에서도 자기만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옷을 디자인할 때 실용성을 중요시 여긴다고 들었다.
옷은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요소다. 특별한 자리뿐 아니라 평범한 순간에도 어울리는 옷을 만들고 싶다. 언제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옷을 디자인하려면 예술성뿐 아니라 실용성까지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컬렉션을 디자인적으로 어떻게 풀어냈는지 궁금하다.
룩 곳곳에 브랜드의 과거를 암시하는 코드를 배치했다. 카스틸리오니 시절의 마르니를 상기시키는 무릎길이 퍼 코트를 쇼 오프닝 룩으로 등장시켰고, 티셔츠와 가죽 스커트, 벨트에는 아이코닉한 스티치 장식을 과감하게 사용했다. 여담이지만 그 퍼 코트는 정말 가볍다. 나중에 꼭 한 번 입어보기를 바란다.

소재에 대한 깊은 연구가 느껴졌다. 자개 디테일이나 종이를 활용한 소재도 인상적이었다.
소재를 선택할 때 공예적인 접근을 중시한다. 자개 파예트(Paillette) 디테일과 오버사이즈 시퀸 자수를 활용해 폴카도트 패턴을 재해석했고, 오간자 소재 위에 종이를 활용해 플로럴 프린팅을 만들기도 했다. 소재뿐 아니라 패턴에도 과거의 마르니가 떠오를 요소를 담았다. 그러데이션 줄무늬, 바이어스 체크, 패치워크 기법 등을 절묘하게 녹여내기 위해 노력했다.

다양한 소재와 패턴이 모여 마르니의 특유의 레이어드 룩을 완성한 듯하다.
패턴과 소재 연구를 통해 완성한 각각의 피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해 하나의 인상적인 룩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착장으로 봤을 때는 강렬한 에너지를, 개별 아이템으로는 룩에 포인트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패션 액세서리도 눈에 띄었다. 이번 컬렉션에서 액세서리는 어떤 역할을 했나?
단 하나의 아이템으로도 강렬한 표현력을 지니길 바랐다. 키튼힐의 앞코에는 슈레이스를 활용한 레이스업 디테일을 더해 포인트를 주었고, 마르니의 아이코닉한 푸스벳(Fussbett) 샌들은 송치 가죽을 사용해 존재감을 강조했다. 마르니의 정신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디자인을 제안하고 싶었다.

2012년 H&M과의 협업 네크리스가 이번 시즌 재탄생했다.
2012년 H&M과의 협업 네크리스가 이번 시즌 재탄생했다.
클래식한 테일러링에 스포티한 퍼 트리밍 파카를 함께 스타일링했다.
백스테이지 현장.

2012년 H&M과의 협업으로 선보인 네크리스가 다시 등장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맞다. 당시 큰 사랑을 받은 H&M 협업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때는 플라스틱 소재에 많은 잎이 달린 초커였다면, 이번에는 금속 소재에 페인트를 칠해 롱 네크리스 형태로 재해석했다.

중간에 유틸리티 스타일의 룩도 등장했다.
쇼를 준비하며 밀라노의 환경과 프리알프스 산맥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하프 니트 집업과 무게감 있는 가죽을 매치하고, 롱 셔츠와 윈드 재킷을 함께 스타일링하는 등 스포티즘과 테일러드 룩을 절묘하게 섞는 방식을 택했다.

컬렉션 피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템이 있다면?
어려운 질문이다. 개인 소장용으로 단 한 가지만 골라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컬렉션이 매장에 출시되면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직접 느낄 수 있을 것이다(웃음).

첫 쇼를 마친 지금, 어떤 계획이 있을까?
오늘 프레젠테이션을 끝내고 가족과 함께 짧은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일하는 시간 외에 평소 무엇을 하며 지내나?
취미가 곧 직업이 되면서 취미 활동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취미가 직업이 된 것은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한 가지를 꼽자면 차 생활을 즐긴다. 주말에 나만의 찻집을 찾는 일이 작은 행복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마르니, 메릴 로게, B.B 월리스까지 총 세 브랜드를 이끌고 있다. 각 브랜드를 어떻게 꾸려나갈지 궁금하다.
마르니는 말 그대로 마르니다운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한다. 메릴 로게는 올해 6월 첫 공식 사이트를 오픈하며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예정이다. 그리고 B.B.월리스는 천연 소재를 바탕으로 타임리스한 니트웨어를 만드는 브랜드다. 앞으로도 꾸준히 소재 연구에 힘써 최상급 니트를 소개할 것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패션 시장에서 디자이너로서 반드시 지키는 신념이 있다면?
창의성. 하지만 ‘옷은 사람이 입는 것’이라는 패션의 근간을 잊지 않는 창의성이다.

사진
MAR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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