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CCI 2026 FW 컬렉션
2월 27일 밀라노 패션위크의 시선은 구찌에 쏠렸다. 지난해 9월 단편 영화와 레드카펫 이벤트로 첫 인사를 건넨 이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의 첫 공식 런웨이였기 때문이다. 쇼가 열리기 전날 밤 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개한 편지에서 ‘구찌는 럭셔리의 의미와 럭셔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새롭게 정의해온 브랜드’라며, 지난 일 년은 ‘구찌다움(Gucci-ness)’을 찾는 여정이었다고 고백했다.
지난해 뎀나는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구찌의 플로라 모티프의 영감이 된 산드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티첼리의 또 다른 명작 〈비너스의 탄생〉도 새롭게 발견했다. 르네상스 회화 속 이상화된 신체는 그가 구찌의 미학을 재정의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FW 시즌임에도 ‘봄’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프리마베라(Primavera)’를 키워드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뎀나는 신체 곡선을 따라 흐르는 드레이핑과 밀착된 실루엣을 통해 동시대적인 구찌를 다시 정의하고 브랜드의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뎀나의 첫 구찌 런웨이는 한층 가벼워질 구찌를 예고했다. 오프닝을 연 화이트 스킨타이트 미니드레스를 필두로 90년대 톰 포드 시절을 연상케 하는 슬릭한 디자인의 슈트가 등장했다. 레깅스처럼 보일 정도로 타이트한 세컨드 스킨 팬츠는 울 저지와 스판덱스부터 레더와 레이스까지 다양한 소재로 변주되었고, 골반 양옆에 깊은 컷아웃을 넣은 디자인으로 관능성을 한층 확장했다. 이밖에도 로우라이즈 스키니 팬츠와 크롭 지퍼 재킷 등 90년대 구찌 코드가 동시대적 감각으로 재해석되었다. 원피스 시리즈는 봉제선이 없는 심리스 공법을 통해 미세한 근육과 뼈의 위치까지 드러나 보일 정도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남성 역시 타이트한 라텍스 티셔츠와 폴로 셔츠, 얇은 광택 수지 코팅을 입힌 타이트 핏 데님 팬츠 등으로 보디라인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컬렉션 중반부터는 뎀나가 평소 즐겨 다루는 서브컬처와 구찌의 럭셔리 아카이브가 결합된 스케이터 룩이 등장했다. 단, 그가 예전에 선보였던 오버사이즈보다 훨씬 날렵한 실루엣이다. 스네이크 텍스처 탑과 팬츠, 구찌 로고를 새긴 범 백(Bum Bag) 스타일링은 래퍼 넷스펜드(Nettspend)가 입고 등장해 반항적인 에너지를 발산했다.

영국의 래퍼 페이크밍크(Fakemink)도 런웨이에 섰는데,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구찌 로고가 새겨진 범 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잠시 화면을 살펴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뎀나는 이들에게 각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되, 개성을 숨기지 말고 과감히 표현하라고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스키니 팬츠와 트랙 팬츠와 함께 구찌의 프린스타운 블로퍼가 다시 런웨이에 등장했고, GG 로고와 레드-그린 웹 스트라이프 등 구찌의 아카이브는 힙색과 스타킹, 심지어 모히칸 헤어까지, 예상치 못한 위치에 위트 있게 놓였다.


구찌 컬렉션의 압도적인 스케일은 모델 캐스팅에서도 느껴졌다. 2024년 스키아파렐리 컬렉션 이후 쇼에 서지 않았던 칼리 클로스(Karlie Kloss)가 오랜만에 복귀해 오버사이즈 스웨터와 GG 모노그램 펜슬 스커트를 멋지게 소화했고, 엘사 호스크(Elsa Hosk)는 트렌치코트와 트랙 팬츠의 스포티한 룩을 카리스마 있게 선보였다. 뎀나의 뮤즈 알렉스 콘사니(Alex Consani)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이는 금빛 터틀넥 드레스를,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Emily Ratajkowski)는 나이트클럽 미러볼처럼 은색 스터드를 촘촘히 박은 바디콘 미니드레스를 입고 등장했다. 일론 머스크의 딸로 유명한 모델 비비안 윌슨(Vivian Wilson) 또한 오랜만에 런웨이에 복귀해 한쪽 소매만 있는 비대칭 화이트 터틀넥 드레스를 선보였다. 대미를 장식한 것은 90년대 톰 포드 시절의 뮤즈였던 케이트 모스(Kate Moss)였다. 케이트 모스는 뒷면이 완전히 컷아웃된 백리스 블랙 드레스를 입었는데, 노출된 등 아래로 10캐럿 다이아몬드를 세팅한 G-스트링이 엿보였다. 구찌의 가장 도발적이었던 1997년 톰 포드 시절을 완벽하게 오마주한 순간이었다.


구찌의 상징적인 뱀부 1947 백은 유연한 가죽으로 만든 새로운 뱀부 핸들로 업데이트되었고, 하우스의 스테디셀러인 재키 백은 이번 시즌 더 슬림해진 구조와 광택 있는 카프스킨, 유연한 GG 캔버스 소재로 제작되어 컬렉터들의 주목을 받았다. 신발 라인업은 90년대 톰 포드 시절을 연상시키는 섹시한 하이힐 펌프스와 뎀나 특유의 실험적인 스니커즈가 공존했다. 가장 주목받은 것은 농구화 실루엣에 모카신의 편안함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디자인 ‘맨해튼(Manhattan)’ 스니커즈였다. 이밖에도 슬림한 실루엣에 구찌의 시그니처 웹 스트라이프가 아웃솔을 가로지르는 로퍼 등 다채로운 액세서리가 등장해 구찌의 르네상스를 예고했다.
구찌 26 FW 컬렉션의 베뉴
이번 쇼는 밀라노의 역사적인 건축물 팔라초 델레 신틸레(Palazzo delle Scintille)에서 열렸다. 1923년 건축가 파올로 비에티-비올리(Paolo Vietti-Violi)가 스포츠 행사를 위해 설계한 이 홀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라 스칼라 극장이 피해를 입었을 때 공연장으로 사용된 바 있다.


뎀나는 이곳에 가상의 박물관 콘셉트의 런웨이를 조성했다. 내부 바닥과 벽면은 이탈리아 대리석의 질감을 살린 트래버틴(Travertine) 소재로 마감했고,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과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아프로디테와 아르테미스 등 로마·헬레니즘 시대 고전 조각을 3D 스캔해 재현한 석고상을 배치했다. 관객은 마치 고전 조각관에 들어선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뎀나는 쇼 노트를 통해 “대리석 조각상들로 둘러싸인 기념비적이고 뮤지엄 같은 공간에서 이번 컬렉션을 선보이는 것은 제가 이 특별한 하우스를 바라보는 방식을 보여줍니다.”라고 말했다. 뮤지션 로키(loki)가 큐레이션한 다섯 개 장르의 사운드가 공간에 교차하며 고전과 현대, 영원성과 동시대성이 겹쳐지는 감각을 강화했다.
- 사진
- Courtesy of Gucc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