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K OWENS MEN 2026 FW 컬렉션
지난 1월 22일, 파리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에서 열린 릭 오웬스 26 FW 컬렉션의 테마는 ‘타워(TOWER)’였다. 종말론적 분위기를 즐겨 다뤄온 디자이너답게 이번 시즌 역시 어두운 분위기가 짙게 깔렸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디스토피아적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 결과물이었다. 릭 오웬스가 앞서 진행한 전시회 ‘사랑의 성전(Temple of Love)’와 연결되는 개념으로, 세계적으로 극단적인 정치가 부상하는 혼란 속에서 미래를 향한 희망과 권력 구조에 대한 풍자를 동시에 담은 것.
릭 오웬스의 오랜 뮤즈이자 분신과도 같은 타이론 딜란(Tyrone Dylan)이 블랙 레더 베스트와 팬츠를 입고 오프닝을 열었다. 그의 실루엣이 안개로 가득 찬 공간을 가르며 등장하는 순간, 또 하나의 역사적인 릭 오웬스 시즌이 시작됐다. 인체는 극단적으로 과장됐다. 롱앤린 실루엣 위에 플랫폼 부츠를 결합해 인체를 비현실적인 비율로 재구성했다. 탈색 가발과 얼굴을 뒤덮는 헤드기어, 과장된 아이 메이크업은 컬렉션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확장시켰다. 안전벨트 같은 스트랩과 버클 디테일을 넣은 옷은 ‘보호(Protection)’의 욕구를 드러냈는데, 실제로 일부 아우터에는 강철보다 무려 5배의 강도를 지녀 방탄복이나 우주복에 주로 사용하는 케블라(Kevlar) 소재가 적용됐다. 릭 오웬스는 케블라 소재를 하이엔드 패션에 걸맞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실크 생산지로 유명한 이탈리아 코모(Como)의 텍스타일 공장에 직조를 의뢰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화려한 실크를 짜던 코모의 숙련된 장인들이 총알을 막아내는 방탄 소재를 직조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대비를 이룬다. 코트 위에 레이어링한 조형적인 패딩 볼레로 역시 파괴적인 세상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취약성과 방어 심리를 아름답게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밀리터리 재킷 위에 반바지와 운동화를 매치하거나, 플라이트 재킷과 매치한 양털 스커트, 소매 볼륨을 과장되게 강조한 니트웨어 등 불균형한 스타일링은 ‘강해 보이고 싶지만 근본적으로 연약한 존재’라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암시했다.
케블라 이외에도 릭 오웬스가 집요하게 다뤄온 소재 실험도 의미 있는 뼈대를 이뤘다. 이탈리아산 유광 황소 가죽, 일본 비슈(Bishu) 지역의 16온스 블랙 데님과 헤비 캔버스가 구조적 실루엣을 지탱했다. 인도 라자스탄(Rajasthan)의 작은 아뜰리에에서 제작된 8mm 두께의 펠트 울은 염색하지 않고 천연 양모 색감을 그대로 살려 천연 마블링 같은 신비로운 표면을 완성했다. 이밖에도 히말라야산 양모, 토스카나 지역의 RWS(Responsible Wool Standard) 인증 보일드 울은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한 릭 오웬스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릭 오웬스는 이번 시즌에도 그가 ‘패밀리’라 부르는 신예 디자이너들과 협업을 통해 신선한 ‘날것’의 이미지를 이어갔다. 얼굴을 가린 마크라메 마스크는 런던 기반 디자이너 루카스 모레티(Lucas Moretti)가 제작했다. 3,000미터 이상의 왁스 코드를 사용해 마스크 하나를 수공예로 완성하는 데 30시간 이상이 소요됐다는 후문이다. 디자이너 스트레이투케이(Straytukay)는 신비로운 은빛 고트 헤어로 제작한 세키아 봄버(Sechia Bomber)를 제작했고, 만화에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높이와 볼륨의 부츠는 빅토르 클라벨리(Victor Clavelly)가 구현했다. 한편, 지난 10년간 릭 오웬스 컬렉션의 피팅 모델로 함께해온 사루타냐(Sarutanya)는 핸드메이드 시스루 스웨터를 제작했다. 틈틈이 쉬는 시간에 뜨개질을 하던 사루타냐를 본 릭 오웬스가 직접 협업을 제안했다는 일화도 흥미롭다. 이밖에도 헤어와 메이크업은 베를린 기반 디지털 크리에이터 피가 링크(Figa Link), 사운드트랙은 전자음악가 료지 이케다(Ryoji Ikeda)가 맡아 컬렉션의 밀도를 극대화했다.
26 FW 릭 오웬스 남성복 컬렉션은 불안한 시대에 희망을 담아 쌓아 올린 ‘사랑의 성전’이었다. 극단적 실루엣과 거친 군복 디테일, 산업 소재와 수공예, 패러디와 풍자가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며 릭 오웬스가 여전히 패션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세계관 설계자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보여준 시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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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사진
- Courtesy of Rick Owe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