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인 쿠튀르와 강렬한 색채, 엄격한 구조 사이를 오가는 이탈리아의 휴머니스트.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에르파올로 피치올리(Pierpaolo Piccioli)가 자신의 첫 컬렉션을 선보이기 직전 파리에서 <더블유>와 포트레이트 촬영으로 만났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로마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는 그와 화상 인터뷰로 다시 마주했다. 이 자리는 그가 이번 컬렉션에서 특별히 고른 아홉 가지 룩을 중심으로, 더 깊은 이야기를 듣고자 마련한 시간이었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남긴 유산과 오늘의 감각, 그리고 인간을 중심에 두는 피치올리의 철학이 어떻게 한 컬렉션 안에서 새롭게 해석되었는지에 대한 탐색. 과거와 현재의 긴장을 미래의 가능성으로 확장하는 과정이 이번 대화에 담겨 있다. 피치올리가 설계하는 ‘새로운 발렌시아가’는 바로 그 경계에서 시작된다.

<W Korea> 지난 10월 패션위크에서 만났으니 두 달 만이다. 그간 잘 지냈나?
일했다. 계속 일하며 지냈다(웃음). 발렌시아가에 도착한 이후 매일매일이 정말 치열했다. 하루도 못 쉬었으니까. 발렌시아가의 새로운 어휘를 구축한다는 건 매우 기쁘지만, 남성/여성 컬렉션, 미학, 그리고 하우스를 위해 잡고 싶은 새로운 방향성을 쌓아가는 데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가족이 있는 로마에 와 있다. 오늘이 이탈리아의 휴일이기도 해서 하루는 가족과 쉬면서 보내고 있다.
조금 전까지 당신이 직접 선택한 룩을 촬영하고 왔다. 이번 컬렉션에서 고른 9가지 룩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나?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줄 만한 룩을 골랐다. 내가 처음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은 “오늘날 혁신성과 분열성은 무엇인가?”였고, 그 답은 AI 시대에 ‘인간’을 다시 중심에 두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체를 작업의 중심에 두는 접근이 가장 의미 있었다. 이는 신체를 중시한 크리스토발의 정신과도 맞닿아있다. 나는 과거에 머무르기보다 우리 시대를 증언하기를 원한다. 과거를 반복하진 않지만, 크리스토발의 아이디어를 인지하며 새롭게 확장하는 것이다. 내가 고른 룩들은 그 연장선에 있다. 예컨대 검은 케이프 룩은 크리스토발이 말한 ‘신체를 중심에 두면서도 신체로부터 멀어지는 실루엣’에서 출발한다. 다만 그 방식은 오늘에 가깝다.
각 룩에 담긴 의도와 디테일도 하나씩 설명해줄 수 있나?
오프닝 룩은 ‘색 드레스(Sack Dress)’다. 나의 첫 발렌시아가 쇼를 크리스토발의 근본적인 제스처로 열고 싶었기 때문이다. 색 드레스는 무겁고 구조적인 실루엣이 지배하던 시대에 등장한, 단 1파운드에 불과한 혁신적인 드레스였다. 당시 여성의 몸에서 ‘무게를 덜어낸’ 이 드레스는 단순한 디자인을 넘어 자유의 선언이었다. 게타리아(Getaria)의 크리스토발 박물관에서 본 50년대 영상 속 여성은, 신체에 걸리지 않는 이 기묘한 실루엣 덕분에 거리 위에서 전혀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색 드레스가 왜 시대를 바꿨는지, 그리고 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했다. 그래서 나는 첫 번째 룩으로 ‘지금’뿐 아니라 10년, 20년 뒤에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옷을 택했다.

앞서 말한 검은 케이프 룩이 Look 4인 것 같다.
크리스토발이 탐구한 실루엣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이브닝웨어 대신 가죽을 택했고, 짧고 날렵한 팬츠를 매치해 볼륨과 컷 라인의 대비를 강조했다. 단순히 큰 실루엣이 아니라, 신체 주변에서 조각하듯 디자인된 볼륨에 관한 이야기다. Look 6는 크리스토발이 1967년에 선보인 웨딩드레스에서 출발한 티셔츠 드레스다. 내가 좋아하는 드레스 중 하나이기도 한데, 그 실루엣을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고 싶었다. 티셔츠라는 일상적인 아이템 안에 쿠튀르적 구조를 담아, 크리스토발·니콜라·뎀나를 잇는 발렌시아가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룩이다. 스트리트웨어와 쿠튀르가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지금 시대의 발렌시아가가 추구하는 균형이 담긴 피스다.
당신이 스트리트웨어를 하우스 코드에 접목하는 방식인가?
그렇다. 뎀나가 구축한 스트리트 감성과 크리스토발의 유산을 자연스럽게 잇되, 동시에 새로운 미래를 여는 사고방식이다. 익숙한 아이템이라도 실루엣과 구조를 다시 짜 전혀 다른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Look 8의 화이트 셔츠 역시 코튼
가자르(Cotton Gazar)로 실루엣을 재해석해 완전히 새로운 감각을 부여했다.
가자르 원단의 특징은 무엇인가?
가자르(Gazar)는 크리스토발이 개발한 이중 실 구조의 원단이다. 두 가닥의 실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가벼움과 구조감 덕분에 쿠튀르적 디자인을 유지하면서도 화이트 셔츠를 구현할 수 있다. 나에게 이 원단은 발렌시아가의 스트리트웨어와 쿠튀르, 크리스토발과 뎀나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매개이자, 브랜드가 나아갈 새로운 방향성을 상징하는 소재다. 다음으로 Look 26의 노란 실루엣은 하나의 제스처에서 출발한 룩이다. 단일 색으로 형태와 볼륨을 구축한 케이프로, 하나의 직사각형 패턴만으로 완성된 구조다. 쇼의 실루엣을 이루는 크롭트 티셔츠와 만나면서 독특한 컷이 강조된다. 깃털처럼 보이지만 원단을 조각해 만든 스커트 역시 가벼운 움직임을 더한다.

Look 27 드레스는 어떤 특징이 있나?
보라색 룩은 몸에서 멀어지며 공간을 그리는 듯한 기하학적 실루엣이다. 삼각형이나 스카프 형태를 연상시키며, 러플의 다른 무게감이 드레스의 구조를 받쳐 하나의 새로운 볼륨을 만들어낸다.
Look 31에도 케이프 구조의 가죽 재킷이 등장한다.
맞다. Look 31은 블루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케이프 구조로 만든 가죽 재킷이다. 쿠튀르와 스트리트웨어를 섞는 발렌시아가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바지는 크리스토발의 아이코닉한 튤립 드레스를 응용한 버뮤다 팬츠다. 나는 이 실루엣을 일상적으로 입을 수 있는, 보다 현대적이고 덜 쿠튀르적인 형태로 새롭게 해석하고 싶었다.
Look 46번의 노란색 아플리케 드레스는 입체적인 실루엣과 무게감이 놀라웠다.
노란 드레스는 크리스토발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실험이었다. 그는 꽃과 로맨티시즘을 활용했지만, 그것을 단순한 예쁜 이미지로 다루지 않았다. 나 역시 그 감성을 프린트가 아닌 건축적 실루엣과 3차원적 구조로 풀어내고 싶었다. 크리스토발이 말한 ‘디자이너는 건축가이자 철학자이자 화가여야 한다’는 생각은 내 작업의 기준점이다. 이 드레스에는 구조적 형태, 꽃의 음영이 만드는 회화적 표면, 그리고 연약함을 힘으로 전환하는 철학적 접근이 함께 담겨 있다. 내가 말하는 발렌시아가 여성은 치열하고 용감하며, 열린 방식으로 로맨틱함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시퀸을 꽃잎처럼 다시 절단해 새로운 질감과 표면을 만들었다. 이 기술은 이름조차 붙일 수 없을 만큼 새로웠고, 그 점이 오히려 이번 룩의 의미를 강화했다고 느낀다.
마지막 룩 Look 50은 한 가지 색상으로 완성된 풀 스커트를 골랐다.
내가 말하는 ‘제스처’는 바로 이런 색상, 음영, 볼륨의 조합에서 나온다. 색이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볼륨을 만들고, 짧게 자른 가죽 티셔츠가 실루엣을 정의하며 쿠튀르적 형태에 예상치 못한 재미를 더한다.
풀 스커트나 드레스에 플립플롭을 매치한 것이 흥미로운데, 어떤 의도인가?
플랫폼 플립플롭은 실루엣을 단순히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드레스나 풀 스커트와 대비되며 전체 룩에 유머와 반전을 더한다. 발렌시아가의 가장 상징적인 시티 백은 사실 런웨이에 등장한 적이 거의 없다. 이번에는 그 상징성을 실루엣 안으로 끌어와 하나의 형태처럼 응용했다. 또한 로고 B를 구조적으로 변형해 만든 새로운 볼레로 형태의 백도 있는데, 이는 단순한 액세서리를 넘어 옷의 일부로 기능하며 새로운 형태감을 제안한다.

당신의 룩에서 마스크는 어떤 역할을 하나?
마스크는 뎀나의 미학에서 차용한 요소다. 이번 컬렉션에서 과거를 지우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유지하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데 집중했다. 내게 마스크는 신비로움을 상징하지만, 새로운 캐릭터와 맥락에 놓이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같은 기술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 의미와 미학을 새롭게 해석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나는 사물의 본질이 형태 그 자체보다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관점과 미학을 부여하느냐에 있다고 믿는다.
오늘 화보를 촬영한 모델 다나 스미스는 당신의 런웨이에도 섰다. 어떤 점이 당신의 룩과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다나는 내가 생각하는 ‘새로운 발렌시아가 여성’을 상징한다. 그녀는 다문화적 배경에 열린 마음을 가진, 자유로운 인물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인도에서 자랐다’는 의미의 타투처럼, 그녀의 개인적 서사는 내가 사랑하는 문화적 혼종성과 인간적인 깊이를 담고 있다. 발렌시아가가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옷만이 아니라,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이다. 다나는 그런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여러 문화와 시민권, 가치, 그리고 개인적이면서도 글로벌한 정체성을 자신의 방식으로 체현하는 인물이다. 이는 외모보다 삶의 태도에 가까운 본질이다.
이번 컬렉션을 준비하며 스스로에게 던진 가장 큰 질문은 무엇이었나?
과거와 나 자신에게 관대해지지 않고 매우 직설적인 것이 중요했다. 누구의 만족도 원하지 않았고, 나만의 비전을 담고 싶었다. 마스크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치자. 마스크가 뎀나의 것인가 피치올리의 것인가 상관없이 그건 발렌시아가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발렌시아가의 방향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큰 질문은 ‘내가 좋아하는 것인가?’다. 그것이 어디서 왔든 발렌시아가에 대한 나 자신의 비전과 일관성이 있어야만 했다.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거나, 이전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지우려는 태도를 보면 오히려 불안함이 든다. 나는 그런 방식에는 공감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모든 것을 새로 포장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의 맥락을 인식한 상태에서 나온 진정성 있고 개인적인 비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낭만성과 하우스의 구조적 엄격함이 충돌할 때, 이를 어떻게 창작 에너지로 전환하나?
나는 그게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로맨틱함과 구조적 엄격함이 맞부딪칠 때 생기는 긴장감은 다른 하우스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컷과 볼륨, 로맨티시즘과 규율, 스트리트와 쿠튀르, 남성과 여성의 코드가 서로 미묘하게 당기고 밀어내는 순간, 비로소 ‘발렌시아가다’라고 느껴지는 언어가 만들어진다. 라벨이나 로고 이전에 먼저 인지되는 실루엣, 감정, 태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장소나 문화가 달라도 같은 기운을 느끼게 하는 것. 그런 긴장과 조화를 통해 전 세계의 사람들이 같은 코드를 공유하도록 하는 것. 그게 내가 이 하우스에서 계속 추구하는 창작의 에너지다.

“언어(Language)는 유지하되 태도(Attitude)는 바꾼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 발렌시아가에서는 어떻게 적용되나?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발렌시아가의 젊음, 쿨함, 에너지를 유지하면서 쿠튀르적 측면으로 새로운 분위기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쿠튀르는 이브닝드레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스트리트웨어일지라도 모든 단일 피스에 불어넣을 수 있는 문화이자 정신이니까. 아까 우리가 1967년 웨딩드레스 실루엣을 품은 검은 티셔츠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게 클래식한 저지 티셔츠로 알던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예시라고 생각한다. 그건 쿠튀르와 스트리트 사이의 긴장감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이지만 매우 특별하고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며 사람들의 욕망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다이애나 브릴랜드의 올드 스쿨 방식에 더 가깝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말고, 당신이 주는 것을 그들이 원하게 하라.”
파리에 오기 전 나미비아에 출장을 다녀왔다. 당신과의 인터뷰를 기억하던 한 에디터는 당신을 사려 깊고 진솔하며 인간적인 사람으로 묘사했다. 종종 차갑고 예민한 패션계에서, 스스로는 어떤 방식으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나?
때때로 사람들이 역할을 연기한다고 느낀다. 내 일을 하다 보면 아주 쉽게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이 될 수 있지만 나는 온전히 나 자신이 되고 싶다. 그래서 항상 나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로마 근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거리가 먼 패션계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내게 패션은 나 자신과 가치, 아이디어와 미학을 표현할 기회였다. 솔직히 말해, 패션계에서 35년 넘게 일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둔, 그 순수하고 황홀한 시선이야말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패션계에서 일하며 얻은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인가?
자신이 되는 것, 그리고 매우 개인적인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 안으로, 자신의 감정 속으로 깊이 뛰어들고,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을 투여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당신의 쿠튀르 작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7월 첫 쿠튀르 쇼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나는 쿠튀르가 누군가에게만 허락된 ‘보는 특권’이나 ‘사는 특권’을 넘어, 만드는 사람에게도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아틀리에와 함께 몇 달 동안 완전히 다른 세계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작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볼륨과 원단, 색을 끝없이 실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영광에 가깝다. 지금 이미 드로잉하고, 구상하고, 테스트하고, 팀과 함께 형태를 세워가는 중이다. 첫 번째 7월 쿠튀르 쇼는 그런 과정들이 모인 결과가 될 것이다.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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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그래퍼
- 강혜원
- 장소
- LAENNEC, THE KERING HEADQUARTER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