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의 눈이 모이고 입을 열게 한 것들을 돌아봤다. 여전히 뜨겁거나, 이미 지나갔지만 되짚어봐야 할 조각들을 모으자 2025년이 선명해진다.
◆ 무엇이 K뮤지컬 붐을 만들었나
‘토니상’에는 분명 좋은 작품들이 언급되고 수상하지만, 대체로 그들만의 리그로 느껴질 때가 있다. 브로드웨이의 작품이 한국 관객을 만나기까지는 평균 4년이 필요하고, 빠르게 개막해도 스몰 라이선스(오리지널 대본과 음악을 현지 스태프가 새롭게 만드는 방식)인 경우가 있어 ‘온전한’ 브로드웨이 작품이라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간극은 2009년 무렵부터 좁혀졌다. 당시 한국 뮤지컬 시장에는 무수한 해외 작품이 쏟아졌다. CJ ENM은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한 2013년 토니상 수상작 <킹키부츠>를 18개월 만에 레플리카(현지 언어와 배우 캐스팅을 제외한 모든 것을 오리지널과 동일하게 진행하는 방식)로 국내에 소개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시차는 오디컴퍼니 신춘수 대표가 프로듀싱한 <위대한 개츠비>의 의상상(2024), 박천휴-윌 애런슨 콤비의 <어쩌면 해피엔딩>의 6개 부문 수상(2025)으로 이어졌다. 두 사례에 ‘K뮤지컬의 쾌거’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전에도 <명성황후>와 <영웅>이 1997년과 2011년에 뉴욕 링컨센터에서 공연됐다. 2주간의 이벤트성 기획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무엇보다 해외로 내보낼 창작 뮤지컬의 부족이 더 문제였다. 창작 뮤지컬 제작 요구가 짙어지며, 다양한 민관 주도의 인큐베이팅 사업이 시작됐다. 한예종 음악극창작협동과정 신설로 창작 기반이 확대됐고, 양적 성장을 바탕으로 2011년부터 <팬레터>, <어쩌면 해피엔딩>,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등이 아시아 시장에 진출했다.
<위대한 개츠비>는 한국 프로듀서가 해외 관객을 타깃으로 브로드웨이 현지에서 창작진을 꾸린 케이스다. 가장 미국적인 원작은 인물 중심의 서사와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넘버로 한국의 스타일을 입었다. 반면 <어쩌면 해피엔딩>은 2014년 우란문화재단 개발 단계에서부터 한영 투 트랙으로 진행된 작품이다. 두 국가를 오가며 생활한 창작진의 특수성이 닮은 듯 다른 두 버전의 작품으로 완성된 셈이다.
해외 진출의 성공은 창작진의 역량, 프로듀서의 기획력, 지원 제도 및 투자 등이 더해진 결과다. 그런데 성공 요인에 ‘관객’이 제외된 것이 아쉽다. ‘라이브성’이 강한 매체의 특성상 관객 없이는 공연이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산업적으로 중요하지만,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작품의 방향을 재정립한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마리 퀴리의 생을 주목한 <마리 퀴리>는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에서 처음 소개됐지만, 작품 속에서 그는 모호하게 존재했다. 미투 운동으로 공연계에서도 높은 젠더 감수성이 요구되던 시절, 창작진은 서사를 보완해 2년 뒤 공연을 올렸다. 관객의 지지 속에서 <마리 퀴리>는 대표적인 여성 서사 뮤지컬로 자리 잡았고, 지난해 웨스트엔드에서 영국 관객을 만났다.
춘수 대표가 신작 <위대한 개츠비>를 현지 프로듀싱한 것도 <지킬앤하이드>와 <맨 오브 라만차> 등 스몰 라이선스 제작 경험이 누적된 결과다. 빠른 전개와 인물의 깊은 감정선은 한국 프로덕션의 특징으로, 그 결과 <지킬앤하이드> 한국 프로덕션의 라이선스가 일본에 수출됐다. 20년간 관객의 꾸준한 사랑이 없었다면, <위대한 개츠비>의 한국식 프로덕션에 확신이 있었을까. <어쩌면 해피엔딩> 역시 2016년 초연 이후 거의 매년 재공연되었고, 박천휴 작가는 한국 관객으로부터 공감받은 경험이 <어쩌면 해피엔딩>의 믿음과 확신이었음을 이야기한다.
요즘 뮤지컬 포스터에는 10, 20, 25 같은 숫자가 자주 보인다. 모두 N년째 이어지는 공연을 기념하는 숫자다. 관객의 부름이 없었다면, 이런 식의 기념 공연이 가능했을까. 한국 뮤지컬 시장의 원년으로 평가되는 2001년으로부터 24년이 지났다. 그때부터 뮤지컬을 본 관객의 내공도 24년째라는 말이다. 변화한 시대와 함께 새로운 관객도 끊임없이 유입된다. 특히 다양한 콘텐츠를 복합적으로 소비하는 관객을 시장의 일방적인 그릇에 담을 수 있을까. 관객의 선택이 언제나 옳진 않지만, 낯설더라도 좋은 작품은 관객이 먼저 알아본다. 무엇이 K뮤지컬 붐을 만들었나? 그 답은 어쩌면 관객에서 찾을 수 있다.
– 장경진(공연 칼럼니스트)
PHOTOS | NHN LINK, OD COMPANY
◆ 국립중앙박물관, 무료는 공짜가 아니다

올해 문화예술계는 숫자가 돋보인다. ‘500만’도 그중 하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80년 역사에서 처음 돌파한 연간 관람객 수다. 올해 10월 22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장. 국립중앙박물관 유료화 필요성에 대해 유홍준 관장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여러 가지로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고성도, 반대하는 고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국정감사 시즌에 보기 드문 여야 합의였다.
2008년부터 17년간 완전 무료였던 상설전의 유료화가 검토된다. 내년 상반기엔 예약제부터 도입한다는 소식이다. 연령별, 국적별 통계를 수집하기 위해서란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1년에 500만 명이 와도 누가 다녀갔는지 몰랐다는 얘기다. 데이터 없이 성공을 자축했고, 데이터 없이 유료화를 망설이고 있다. 그 사이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들이 있다. 소장품 44만 점 중 8만여 점이 보존 처리를 기다리지만, 인력은 17명뿐이다. 당장 고치면 전시 가능한 유물은 1만 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입장 무료는 공짜가 아니었다. 지금껏 유물들이 그 비용을 지불한 셈이다.
입장료는 처음부터 있었어야 했다. 그것도 낮은 입장료가 아니어야 했다. 예컨대 루브르는 일반 입장권을 22유로로 책정해놨다. 하지만 사실상 공짜로 입장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유럽경제지역 거주자 중 만 26세 미만, 국적 불문 만 18세 미만, 특정 직업군의 방문객은 입장료를 지불할 필요가 없다. 특정일의 특정 시간대에는 모든 방문객이 무료로 입장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해진 입장료는 ‘있다’. 이런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꾼다. 입장료의 존재는 시그널이다. ‘0원’과 ‘1000원’은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보낸다. 전자가 가리키는 문화와 예술의 가치는 ‘킬링 타임’이고, 후자는 ‘가치에 대한 대가’를 가리킨다. 17년간의 무료 입장이 만든 것은 500만 명의 관람객이 아니라 ‘박물관은 공짜로 시간 때우는 곳’이라는 인식일지도 모른다. K팝이 세계를 휩쓰는 동안, 외국인들은 이렇게 물었다. ‘이 문화는 어디서 왔나요?’ 서울에 온 그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고, 통계도 남기지 않은 채 무료로 들어갔다. 우리는 우리 문화의 뿌리에 값을 매기지 않았다.
이제 기회가 왔다. 하지만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야 한다. 예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기 위해서라고. 오래전에 했어야 할 말을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 무료는 공짜가 아니니까. 유물이 대신 치른 비용을 이제 사람이 갚을 때가 왔다.
– 박재용(프리랜스 큐레이터 및 통번역가)
PHOTOS | 국립중앙박물관
◆ 라부부는 사실…

헬로키티와 소니엔젤로 이어지던 아시아 컬렉터블 토이의 계보에, 올해 한 요정이 새 이름을 올렸다. 복슬복슬한 털에 송곳니를 드러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는 존재, 바로 ‘라부부’다. 홍콩 출신 아티스트 카싱 룽(Kasing Lung)이 2015년 북유럽 신화에서 영감을 얻어 ‘더 몬스터즈’ 시리즈를 시작했을 때, 그중 하나였던 라부부는 단지 그의 캔버스 속 인물이었다. 하지만 2019년 중국의 완구 기업 ‘팝마트’가 이 캐릭터를 수집형 장난감으로 제작하면서 라부부는 그림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후 라부부는 빠르게 거래되고, 투자되고, 상징되었다. 지난 6월 베이징의 한 경매에서 131cm 크기의 거대 라부부가 약 2억원에 낙찰된 사건은 그 상징적 정점이다.
더 이상 ‘키링 인형’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초현실적 차원으로 건너간 듯 보이는 라부부 열풍의 계기는 의외로 단순하다. 블랙핑크 리사, 리한나, 두아 리파 같은 팝스타들이 자신의 SNS에 라부부 인증샷을 올리며, 작은 괴물을 글로벌 신화로 바꿔놓은 것이다. 물론 재구매를 부르는 블라인드 박스의 긴장감, 의도적으로 못생긴 ‘안티 큐트’ 미학에 열광하는 세대의 취향, 전 세계인이 하나쯤은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극하는 수집 본능도 제대로 한몫 보탰다. 이렇듯 라부부는 요즘 같은 ‘도파민 경제’ 시대에 너무 잘 길들여진, 어쩐지 필연적 존재처럼 보이지만, 단순한 소비의 언어로 읽히는 지금의 현상 뒤엔 작가의 자의식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의 열풍이 세상을 뒤덮기 전, 작년 3월 홍콩 아트위크에서 우연히 만난 카싱 룽은 자신의 작품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전 세계를 돌며 체감한 다양한 주제를 작업에 녹이고자 했어요. 캐릭터에선 일견 기쁨과 사랑, 평화 등이 느껴지지만, 그 이면엔 우리가 사는 현실을 둘러싼 담론이 있죠.” 그의 캔버스 한가운데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라부부가 있었지만, 주변을 둘러싼 건 고층 빌딩, 비행기, 해골 같은 불온한 도상들이었다. 참고로 그를 만난 건 홍콩에서 7년 만에 개최하는 대형 회고전 현장이었고, 전시명은 우울한 냉소와 반복의 후렴으로 세계의 균열을 드러낸 레너드 코헨의 노래 ‘Everybody Knows’에서 따왔다. 기쁨과 불안, 순수와 피로가 공존하는 세계가 어쩌면 카싱 룽이 말하는 ‘더 몬스터즈’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른다. 정작 그 그림자의 존재에 관심 가진 이는 거의 없지만. 단지 여전히 라부부는 ‘머스트 해브’ 딱지를 달고, 귀엽게 포장된 혼돈 속에서 팔려 나간다.
– 전여울(<더블유> 피처 에디터)
◆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대한 세 가지 시선


ㆍ다시 K팝을 사랑할 이유
‘케이팝’만 있어도 불안한데 ‘데몬’에 ‘헌터스’라고? 처음 공개된 제목을 보고 불길함을 느낀 게 비단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K팝을 오래 친애해온 이들은 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가 알량한 영향력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K팝이 얼마나 오랫동안 곡해받았는지.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실눈을 뜨고 바라본 작품은, K팝 팬들의 마음속 견고하게 쌓인 세상을 향한 불신을 모두 씻고도 남았을 터다. <케데헌>은 완성된 요리 위에 K팝을 눈요기로 얹는 흔한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K팝, 더 나아가 K팝을 가능케 한 한국을 향한 무한한 애정과 존중을 비옥한 토양으로 삼았다.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 특유의 속도감과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나에 대한 믿음으로 끝내 악을 물리친다는 친숙한 스토리가 아직 K팝과 한국이 낯선 이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작품 곳곳에 비친 한국에는 K팝 신에서 다채롭게 활약해온 다수의 창작자에서 수저 아래 까는 냅킨까지 녹아 있었다. 아무리 K팝이 소재여도 근본적으로는 미국 작품이라는 사실 때문에 벌어질 법도 한 ‘진짜 K’에 대한 불필요한 소모전이 적었던 건, 이렇듯 한국에 대한 촘촘한 존중이 작품 전체에 어려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말하지 않아도 안다’며 입 모아 노래하던 바로 그 감정의 전이였다. 그래서일까. <케데헌>은 우리가 앞만 보고 가느라 쉽게 잊어버렸던 K팝과 한국의 진짜 매력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신기를 발휘한다. 마치 타인의 시선으로 숨겨진 나를 발견할 때 느낄 법한 조금 머쓱한 기분이다. ‘Soda Pop’처럼 티 없이 맑은 보이 팝만이 전할 수 있는 청량함, 전력으로 좋아하는 가수를 응원하는 팬들의 사랑스러움, 지친 친구에게 정으로 떠먹이는 뜨끈한 국밥 한 숟갈, 노래 한 곡이 구한 너와 나의 우주. 익숙함에 속아 잊은 것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 꼭꼭 숨었던 암호를 푸는 힌트가 <케데헌>일거라고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다.
–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ㆍ영향력은 어떻게 증폭됐는가
올해 7월 넷플릭스 2분기 실적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공동 CEO 테드 서랜도스는 <케데헌> 열풍에 대해 ‘경이로운 성공’이라 언급했다. 사실 넷플릭스는 <케데헌>에 큰 기대가 없었다. 여타 기대작에 비해 작품 공개 전 특별한 마케팅을 벌이지도 않았고, ‘굿즈 팔이’에도 관심이 없었다. <케데헌>이 공개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미국 특허상표청에 관련 상표권을 단독 출원했다는 사실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그러니까 예상치 못한 대박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거둔 행운은 아니다. 글로벌 스트리밍 서비스 브랜드로서 독보적인 성공을 거둔 넷플릭스는 늘 콘텐츠 확보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로컬의 개성이 되레 글로벌 시장에서 보편적 성공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한 만큼 막강한 자본력으로 다방면의 콘텐츠를 플랫폼에 수혈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터질 작품은 터진다. 그러므로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꾸준히 작품을 채워야 한다. <케데헌>은 넷플릭스의 그러한 믿음을 강화하는 ‘경이로운 성공’이었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조건은 작품의 화제성을 가속화한다. 화제가 된다는 소식을 접한 이들은 앉아 있는 자리에서 감상한 뒤 곧바로 자신의 감상을 SNS에 남기거나 유튜브에 리액션 영상을 올리며 또 한 번 화제성을 확산시킨다. 뉴미디어 시대의 영향력이란 ‘발 없는 밈’을 타고 초고속으로 확산된다. 작품에 대한 감상을 품는 수준을 넘어 일상적으로 그 영향력을 체험하는 증강 현실 같은 시대라고 할까. 용이한 접근성과 함께 발휘되는 영향력이 파괴적인 독점력을 낳고 다양한 현상으로 이어진다. 열광의 온도가 높아질수록 열기의 상승세는 거듭 ‘Up Up Up’을 외치듯 가속되며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케데헌> 열풍은 이러한 시대성을 또렷하게 양각한 현재진행형의 사건이었다.
– 민용준 (영화 평론가)

ㆍ종주국의 딜레마에서 고민할 때
어떤 스포츠 종목에선 ‘종주국’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해당 스포츠가 시작된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다른 나라들도 함께 즐기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몽골의 전통 스포츠인 ‘부흐’를 두고 종주국이라는 말은 필요 없지 않은가. <케데헌>의 흥행을 두고 ‘실제로는 외국 기업의 주머니만 불렸다’고 말한다면 이는 중요한 것을 놓치는 시선이다. 이 작품의 성공은 K팝이 세계 문화 속에 자리 잡은 보편적 언어가 되었음을 증명했다. 21세기 들어와 K팝은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강화된 스토리텔링을 통해 팬들이 빠져들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는 성장기 청소년을 위한 유사 철학 체계로 확장되었고, 고독과 불안을 극복하는 메시지를 통해 언어 장벽을 넘어 폭넓은 공감을 끌어내는 기반이 되었다. 많은 서구 팬들이 K팝의 매력 중 하나로 ‘자기애’나 ‘다름의 인정’ 같은 주제의식을 꼽는 이유다. <케데헌>의 기본 줄거리는 디즈니의 초히트작 <겨울왕국>과 닮았다. 아웃사이더가 결함으로 여겨지는 자신의 특성을 받아들이고 남들의 인정을 쟁취한다는 흐름. 그 이야기를 위한 표현 양식으로 K팝을 선택한 건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그 시너지는 지금의 성과로 증명되었다. <케데헌>의 성공은 K팝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준다. 태권도가 그저 한국인만을 위한 자기실현의 도구가 된다면 스포츠로서의 가치가 있을까? 즉, 태권도가 한국을 위한 올림픽 효자 종목에만 머무른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올림픽 종목으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K팝 역시 단순히 ‘한국 아티스트의 외화벌이’라는 프레임을 넘어서야 한다.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그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유용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케데헌>은 이를 이미 성취한 사례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인류 문화 지형에 무형의 가치를 더하는 유산으로서 K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 정성욱 (칼럼니스트)
◆ 흥행 타석에 선 프로야구

프로야구계 ‘1000만 관중’의 빗장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기어코 터졌다. 그것도 시원하게. 2025년 정규 시즌에 무려 1,231만2,519명이 야구장을 찾았고, 좌석 점유율은 82.9%를 찍었다.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단일 시즌 최다 관중 신기록이다. 언더독으로 통하던 한화가 준우승이라는 업셋 드라마를 쓴 것이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도 맞지만, 불길의 방향을 바꾼 건 따로 있었다.
2022년 607만, 2023년 810만에서 멈춰 있던 그래프가 작년을 기점으로 수직 상승했다. 티빙이 KBO리그 뉴미디어 중계권을 가져간 바로 그해부터다. OTT는 이미 일상의 플랫폼이었고, 야구는 자연스레 그 친숙한 화면 속으로 스며들었다. 문턱이 낮아지자 라이트팬 유입이 봇물 터지듯 일어났다. 여기에 트래픽 분산 등을 이유로 묶여 있던 경기 영상의 2차 가공 제한을 티빙은 정반대로 풀었다. 비상업적 용도라면 40초 이내의 경기 영상을 누구나 자유롭게 재가공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규제의 빗장이 풀리자 가장 신이 난 건 팬들이었다. 밈은 쏟아졌고, 조회수는 알고리즘을 불렀다. 생중계를 보지 않아도, 짧은 숏폼 클립 하나면 ‘입덕’이 가능해졌다. “향후 OTT의 가장 큰 무기이자 가장 효율적인 콘텐츠는 스포츠와 숏폼이다.” 올 초 티빙 CCO 민선홍은 <더블유>에 이렇게 전했는데, 그 적시타는 제대로 통한 셈이다.
변화는 관중 구성에도 선명히 찍혔다. KBO 집계에 따르면 올해 3월부터 8월까지 티켓링크 예매의 성별 비율은 여성이 57.5%에 달했다. 특히 2030 여성 팬들이 흐름의 중심을 잡으며 새로운 팬덤 문화가 꽃을 피웠다. 아이돌판의 문법이 자연스레 야구장으로 옮겨온 듯 보이지만, 맥락은 조금 다르다. 이미 포화 상태인 ‘돌판’ 대신 ‘야구판’은 새로운 덕질의 피난처가 됐다. 경쟁, 서사, 캐릭터가 완벽히 갖춰진 리그 구조는 팬덤의 이상적인 놀이터였고, 무엇보다 덕질할 만한 ‘아이돌’도 많았다. 지난해 화려한 성적으로 리그의 뉴 아이콘으로 떠오른 KIA 타이거즈 김도영은 유니폼 매출만 100억원을 넘겼고, 롯데 자이언츠의 한태양은 수려한 외모 덕에 ‘사직 박보검’이라 불린다. 가성비도 탁월하다. 응원봉 대신 치킨이 있고, 퇴근 후 곧장 덕질이 가능한 거리까지 완벽하다. 덕분일까? 굿즈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올해 5월 세븐일레븐은 아이돌 포토카드를 연상시키는 ‘2025 KBO 오피셜 컬렉션 카드’를 출시해 3개월 만에 400만 개 완판을 기록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듯 구단들 역시 유니폼을 일상복처럼 입을 수 있게 디자인하며 마케팅 전략을 새로 짰다.
‘KBO 르네상스’라는 말이 돌 만큼, 야구는 지금 가장 뜨거운 시간 한가운데에 있다. 내년 티빙의 3년 중계권 계약 종료를 앞두고, 그다음 타석에 누가 설지를 두고 벌써부터 여러 말이 오간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미 공은 충분히 높이 떴다. 한 ‘시즌’의 흥행을 넘어, 이제 야구는 분명 하나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으니까.
– 전여울(<더블유> 피처 에디터)
◆ 인공지능 말, 말, 말
올해 “지브리풍으로 만들어줘”라는 짧고도 강력한 프롬프트 하나가 트리거가 됐고, 이후 인공지능의 질주는 거침없었다. 대중과의 거리도 좁혀졌으니, 그만큼 인공지능은 우리 시야 밖에서도 더 깊게 가속의 페달을 밟았다. 올해 오픈AI의 CEO 샘 올트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지적 작업을 ‘스스로’ 배우고 수행할 수 있는 인공지능, 즉 범용인공지능(AGI) 시대가 머지않았다는 언급을 여러 차례 했다. 이는 곧 유토피아가 도래한다는 말처럼 들리면서도, ‘인공지능이 대체할 직업’을 생각하는 것조차 마치 사치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흥미로운 건, 이 정반대의 이야기도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화 <빅쇼트>의 모델인 투자가 마이클 버리는 올 초부터 “인공지능 투자 열풍은 1990년대 말 닷컴 버블을 연상시킨다”며 AI 거품론을 끈질기게 경고해왔고, 그의 말처럼 증시는 한때 과열된 열풍에 휘청이기도 했다. 인공지능은 어느새 뉴노멀이 되었지만, 그 속도가 빨라질수록 어쩐지 미래는 더 짙게 흔들리는 듯하다. 올해, 분야를 가로질러 인공지능을 둘러싸고 말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았다. – 전여울(<더블유> 피처 에디터)
“저는 지금 AI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아요. 다만 선택지를 만들어주는 용도로는 씁니다. 이를테면 ‘이 테이블을 나무로 바꾸면?’ 혹은 ‘이 형태를 대리석으로 구현하면?’ 같은 식으로요. 저는 AI를 ‘도구’로만 써왔지 ‘행위자’로 쓴 적은 없어요. 적어도 제 작업의 핵심에 있어서는 AI에게 제 작품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기지 않을 겁니다.”
– 제프 쿤스(예술가)
1월 <가디언> 인터뷰에서
“AI를 사용하는 사람이 AI를 쓰지 않는 사람을 대체하게 될 겁니다. 자동화나 컴퓨터가 처음 등장했을 때도 같은 일이 있었죠. 이번에는 변화의 속도와 접근성이 워낙 빠르기 때문에 더 파괴적이라고 느껴지겠지만, 이를 ‘기회’로 보고 활용해야지 싸워서는 안 됩니다.”
– 샨타누 나라옌(어도비 CEO)
5월 <이코노믹 타임스> 인터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모델은 ‘덜 지능적인 존재가 더 지능적인 존재를 통제하는 경우’예요. 바로 아기가 어머니를 통제하는 관계죠. 초지능적이고 다정한 AI 어머니들 대부분은 모성 본능을 버리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우리가 죽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요.”
– 제프리 힌턴(컴퓨터과학자,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8월 AI 콘퍼런스 ‘Ai4 2025’에서 AI 모델에 모성 본능을 심어야 한다고 발언하며
“저는 올해로 61세지만 죽을 때까지 AI를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얼마 전 누군가가 ‘AI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는데, 제 대답은 아주 짧았죠. ‘차라리 죽겠다.’ 이번 신작 <프랑켄슈타인>에서 주인공 ‘빅터’의 오만함을 어느 정도 테크 브로들과 비슷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는 결과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일종의 ‘장님’ 같은 존재예요.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잠시 멈추고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 기예르모 델 토로(영화감독)
11월 팟캐스트 <프레시 에어>에서
“권력이 사람에서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결정권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전쟁에서는 AI가 무엇을 폭격할지 결정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 유발 하라리(역사학자)
4월 tvN <살롱 드 유발 하라리>에서
“라스 폰 트리에와 작업했을 때가 떠오르네요. 그는 항상 ‘우연’을 찾았어요. 계획할 수 없는 작은 순간들, 예상치 못한 일들, 결점들 말이에요. 연기를 ‘진짜’로 만드는 건 그런 것들이죠. 그걸 AI나 무언가로 어떻게 대체할 수 있을지 정말 모르겠어요.”
– 샤를로트 갱스부르(배우)
7월 <더블유 코리아> 인터뷰에서
“몇몇 직업군은 완전히, 정말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봅니다.”
– 샘 올트먼(오픈AI CEO)
7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회의에서
“AI 피아노 로봇을 만들 수는 있겠죠. 인간처럼 놀라울 정도로 연주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동시에 사람들이 그걸 똑같이 감동하며 받아들일까요? 버튼 하나 누르고 5초면 예술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예술을 만드는 과정이 그 결과물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요시키(뮤지션)
9월 <플런트> 인터뷰에서
◆ 우리는 천천히 늙기로 했다

1~2년 전까지만 해도 거리를 휩쓸던 마라탕과 탕후루. 맵고 단 ‘길티 플레저’의 시대가 분명한 전환점을 맞은 한 해였다. 2025년 한국 식품 시장을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를 꼽는다면 단연 ‘저속노화’다. 이는 단순한 식재료나 조리법이 유행을 넘어, 먹는 행위를 통해 삶의 질을 관리하려는 능동적인 생활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과거 인류가 불로장생이라는 터무니없는 꿈을 꿨고, 이후에는 노화의 흔적을 지우는 안티에이징에 몰두했다면, 저속노화는 늙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속도를 늦추고 건강 수명을 최대한 연장하겠다는 현실적이고 지적인 접근이다.

이러한 흐름은 서울아산병원 정희원 교수가 SNS를 통해 공유한 혈당 스파이크를 줄이는 식단과 생활 철학이, 특히 2030세대의 만성질환에 대한 경각심과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늙고 싶다’는 근원적 욕구와 맞물리며 폭발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결과다. 그리고 이는 곧 우리 식생활 전반을 재편했다. 알룰로스, 에리스리톨 같은 대체 감미료를 집 안 필수 제품으로 만들었고, ‘저당’과 ‘고단백’은 식품업계 생존 공식이 됐다. 주목할 점은, 건강기능식품은 물론이고 그동안 건강과 가장 거리가 멀었던 카테고리들조차 변모했다는 것이다. 과자, 빵, 아이스크림, 탄산음료 등 대표적으로 몸에 불량하다고 여겨진 것들조차 ‘한 끗의 건강함’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을 가장 단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곳이 편의점이다. 말 그대로 편의를 추구하던 공간은 이제 건강과 편의성,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웰니스 전초기지로 진화했다. 진열대는 닭가슴살, 렌틸콩밥 등으로 구성된 ‘저속노화 도시락’, 단백질 함량을 극대화한 ‘프로틴 스낵’, 소포장 신선식품과 샐러드로 빠르게 재편됐다. 물론 트렌드는 뜨고 지고, 돌고 돈다. 마라탕, 탕후루의 자리를 이을 또 다른 고자극 음식이 언제든 유행처럼 번질 수 있다. 하지만 그 파도 속에서도 ‘저속노화’는 일시적 유행을 넘어 견고한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을 것이라 본다. 단순한 맛의 추구가 아닌, 삶의 질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2025년을 보내며 잊지 말아야 할 이 트렌드의 본질은, ‘무엇을 더 먹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덜 먹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대체 당이니까 괜찮아’, ‘제로 슈거니까 안심’이라는 생각으로 가공식품을 섭취하는 것은 저속노화의 핵심을 비껴가는 일이다. 일상에서 당을 포함해 내 몸의 염증 반응과 노화를 일으키는 요소들을 의식적으로 ‘덜어내는’ 노력이야말로, 저속노화 트렌드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화두다.
– 장새별(F&B콘텐츠 공방 ‘스타앤비트’ 대표)
◆ 여성 ‘관계성’ 서사의 약진

여성들의 이야기가 비교적 풍요로운 한 해였다.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 <애마>, 영화 <세계의 주인>, <양양>, <파과>, <검은 수녀들>, 지니TV 오리지널 <착한 여자 부세미> 등 매체를 넘나들며 시청자 및 관객을 사로잡았다. 눈여겨볼 점은 이야기 속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주연으로 나서는 여성의 연령대가 넓어졌다는 것, 그리고 여성 간의 관계가 두드러지는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중 <은중과 상연>을 단연 가장 앞자리에 호명하고 싶다. 이 작품은 10대부터 40대까지 여성들의 우정, 동경, 애증, 질투 등등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깊게 나눌 수 있는 심연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인다. 이 입체적인 여성 서사는 여성들의 개인적 경험을 환기하며 공명했다. <애마> 또한 강력하다. 에로 영화가 급물살을 탔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시리즈는 여배우는 벗어야만 뜨던 시대, 기성 톱스타 희란(이하늬)과 신인 배우 주애(방효린)의 경쟁과 쌍방 구원의 서사를 통쾌하게 펼친다. 여성 선후배의 이야기란 모름지기 막혀 있는 가슴을 이토록 치는 것. 최선의 여자(전여빈)와 최악의 여자(장윤주)가 팽팽히 맞붙은 <착한 여자 부세미>, 엄마, 비슷한 경험을 한 언니들, 동성 친구들 간의 관계망이 촘촘하게 펼쳐지는 작은 우주 <세계의 주인>, 주인공이 가족사에서 잊힌 존재인 고모의 흔적을 찾는 과정에서 시차를 둔 관계를 보여주는 <양양> 또한 여성 간의 관계성을 들여다보는 맛이 쏠쏠하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다양한 여성 서사를 펼치려다 스텝이 뒤엉켜버린 작품도 등장했다는 것인데, JTBC <백번의 추억> 이야기다. 김다미와 신예은이 투톱으로 나서 열연을 펼쳤지만, 여성들을 선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욕망과 연적 연기가 무해하게만 펼쳐질 수 있는가 하는 양립 불가한 명제 사이에서 갈지 자를 그리다 비판에 직면했다. 더 다양한 여성 간의 관계를 상상할 여지는 없을까? 과거의 훌륭한 통속 드라마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태양의 여자>(2008)의 도영과 사월, <신데렐라 언니>(2010)의 은조와 효선을 환기하면, 여자들은 무해하지 않다. 서로를 돕지만도 않는다. 남자든 목표든 동일한 타깃을 두고 싸울 수도 있고, 계급 간 피 터지는 경쟁을 벌일 수도 있으며, 그들 간에 사랑과 증오가 양립할 수도 있다. 여자의 편이 여자라면, 여자의 적도 여자이고, 친구거나 연인이라면, 적이거나 라이벌이기도 한, 그 모든 복합적인 여자들의 이야기를 신년에도 보고 싶다.
– 이예지(프리랜스 에디터)
- 포토그래퍼
- 이창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