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천 한 장에 깃든 고요한 힘. 바야흐로 스카프의 시대가 왔다.



법칙은 없지만 트렌드에도 나름의 ‘필승 전략’이 있다. 등장과 동시에 트렌드가 된 미우미우의 앞치마 패션이나 무대를 압도한 샤넬의 풍성한 프린지 스커트,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구찌의 전위적인 와이어 드레스는 모두 파격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파격 아닌 보편, 비일상 대신 일상에 가까운 아이템도 트렌드가 될 수 있을까?
밀라노 패션위크 첫날, 구찌는 30분 분량의 단편영화 <더 타이거(The Tiger)>를 공개했다. 역사적인 건물인 팔라초 메차노테(Palazzo Mezzanotte)는 영화 시사회를 위한 공간이 됐고, 영화에 출연한 게스트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화난 여자(L’Incazzata), 나르시시스트(Narcisista), 속물(La snob), 마성의 남자(Rubacuori), 드라마 퀸(La Drama Queen), 폭탄(La Bomba), 인플루언서(L’influencer) 등은 스포트라이트가 반짝일 때마다 각자 부여받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패션쇼 대신 한편의 영화로 하우스의 새로운 시대를 알린 뎀나는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증명하듯 작은 디테일로 다채로운 페르소나를 창조했다. ‘속물’에게는 하이넥 칼라의 와이어 드레스를, ‘드라마 퀸’에게는 깃털 장식 로브를, ‘화난 여자’에게는 꽃무늬 헤드 스카프를 두르는 방식으로 ‘라 파밀리아(La Famiglia)’ 컬렉션의 세계관을 확장한 것. 그는 구찌 패밀리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역할에 몰입할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마련했는데, 뜻밖에도 평범한 스카프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빨강 울 코트를 입고 머리에 꽃무늬 스카프를 두른 ‘화난 여자’의 모습은 인물이 가진 시대 배경과 사회적 위치, 욕망과 결핍, 더 나아가 성미까지 드러내는 시각적 단서로 작용했다. 네모난 천 조각 하나가 캐릭터의 존재감을 선명하게 드러낸 대목이었다.



의복의 기능과 장식적 성격을 구분해보자면, 역사적으로 스카프는 기능적 측면에 가까운 아이템이었다. 패션보다는 방한, 방서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 기원 역시 고대 이집트 남성들이 태양과 모래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목에 두르던 것에서 비롯했다. 그렇다면 스카프는 어떻게 그간의 이미지를 지우고 트렌드라는 새로운 위상을 얻게 되었을까? 그 답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스카프의 탁월한 효율성에 있다. 셀린느의 마이클 라이더는 이번 시즌 스카프를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닌 컬렉션의 핵심 언어로 끌어올렸다. 특히 스카프로 제작한 쇼 인비테이션은 그가 이번 시즌에 스카프를 얼마나 중요한 상징으로 삼았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이 같은 제스처는 컬렉션 전반에서 이어졌다. 룩 곳곳에 스카프를 적극 배치해 때로는 숄로, 때로는 실루엣의 흐름을 바꾸는 요소로 활용했으며, 클래식한 테일러링 위에 더한 스카프는 룩에 여유와 감각적인 리듬을 부여했다. 페라가모는 스카프를 골반에 둘러 와이드 벨트처럼 연출해 우아하면서 고딕적인 분위기를 연출했고, 끌로에와 루이 비통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가죽 소재 스카프를 선택해 존재감을 극대화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스카프 레이어드 스타일도 두드러졌다. 마르지엘라는 스카프를 하의 안으로 밀어 넣어 자연스럽게 걸쳐 입는 방식을 제안했고, 드리스 반 노튼은 팬츠 위에 랩 스타일로 한쪽 끝을 묶어 스커트처럼 연출했다. 브라톱이나 레더 하네스 사이에 스카프를 끼워 넣은 에르메스의 스타일링 역시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현상은 스카프가 하나의 의상처럼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크레이그 그린은 옷과 연결된 스카프를 모델의 입에 물리며 그 존재를 과장된 제스처로 드러냈고, 디올은 스카프가 달린 일체형 카디건을 통해 이를 구조적인 요소로 끌어올렸다. 목에 두르는 장식에서 출발한 스카프가 어느새 실루엣을 완성하는 중심 장치로 자리 잡은 셈이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된 스카프는 룩의 분위기와 태도를 결정짓는 핵심 코드로 작동했다. 작은 천 한 장이 만들어낸 변화의 힘을, 디자이너들은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실감한 것이다.
결국 이번 시즌의 스카프 트렌드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누구나 옷장에 하나쯤 갖고 있는 일상적인 아이템인 스카프가 디자이너들의 손길을 거치며 전혀 다른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목에 두른다는 익숙한 공식을 깨고 다양한 얼굴을 갖게 된 스카프는 단순한 액세서리를 넘어 스타일의 일부로 기능하는 오브제로 자리 잡았다.
- 포토그래퍼
- 오성재
- 모델
- 주원
- 헤어
- 윤광효
- 메이크업
- 조혜미
- 어시스턴트
- 나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