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되, 올바른 방식으로 치열하고자 노력해온 노상현에겐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이 있다.
배우로서 맹렬한 한 해를 보낼 노상현의 2026년은 MBC <21세기 대군부인>으로 시작한다.


<W Korea> 저는 노상현 씨가 탑골공원에서 할아버지들과 장기 두던 모습을 잊을 수 없어요. 재작년 <배우반상회>라는 예능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죠.
노상현 그 방송 이후 아마추어 대회에도 한 번 나갔어요. 정말 너무 아쉽게, 간발의 차로 16강에 못 올라갔네요. 장기는 수싸움이에요. 바둑보다는 체스랑 비슷한데, 저는 그런 수싸움이 재밌더라고요.
아까 유튜브 콘텐츠 촬영할 때 집에서 가져온 싱잉볼을 보여주셨잖아요. 진지하게 싱잉볼을 울리는 노상현의 모습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실제로 자주 사용하나요?
제가 명상을 해요, 거의 매일. 명상하면서 어쩌다 싱잉볼이 눈에 띄면 한 번씩 쳐봐요.
명상은 어떤 식으로 하세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몸에 집중하고 숨 쉽니다. 10분, 15분 정도. 더 짧게 할 때도 있고요. 아침이든 밤이든 상관없이요.
방정맞은 질문 하나 드립니다. 그러다 졸지는 않나요?
안 졸아요. 명상한 지 오래됐어요. 초등학생 때는 할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단전호흡 수련원에 다니셨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단전호흡을 하러 수련원에 갔다가 등교했죠.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저를 두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며 칭찬해주신 적이 있어요. 그때는 단전호흡하는 게 마냥 힘들기만 하고 좀 졸았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명상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은 아무래도 감정 조절에 능해진다죠? 감정을 잘 억누른다기보다 감정을 알아채고 반응하는 방식이 남다른 거요. 쉽게 동요하지 않는다거나.
동요하고, 감정이 요동치는 상황이야 살면서 자주 생기죠. 그래서 저는 결국 명상을 합니다. 스스로를 다스리려고 하는가 봐요. 제가 웬만해선 반응을 즉각적으로 하지 않는 편이긴 해요. 문제가 있더라도 차분히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고서 얘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감정적인 갈등이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거든요.

과묵하신 편인가요? 김종국, 주우재 씨와 출연한 유튜브 콘텐츠를 보니 친분 있는 그들도 그렇게 여기는 것 같던데요. 노상현은 묵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있어요.
제가 생각이 많은 편이라 나이 들수록 좀 더 조용해진 면이 있긴 한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저도 장난치면서 놀기도 합니다(웃음). 어릴 때도 뛰어노는 거 좋아하고 활동적이었어요.
어린이는 좀 뛰어놀아야죠. 어린 노상현은 어떤 아이였는데요?
어머니 말로는, 얌전하고 순했다고 해요. 유치원 시절엔가… 장난감 파는 코너를 지날 때면 저는 구경해도 되냐고 여쭤보고선 정말 구경만 하고 나왔대요. 보통 아이들처럼 떼쓰질 않았다네요.
그런 전설적인 아이가 현실에 존재했다고요? 부모님이 아들 키우실 때 소리 지를 일이 별로 없었겠어요.
사실 저는 부모님과 떨어져 오래 산지라 그럴 여건 자체가 되지 않았어요. 물리적 환경이 그랬죠.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오래 하셨죠?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족과 같이 캐나다로 갔다가 1년 후에 부모님은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저는 캐나다에서 홈스테이를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대학교 때도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까 학창 시절을 거의 홀로 보낸 거죠.
일찍부터 외로움을 알았나요?
홈스테이를 할 때 호스트 패밀리의 자제분들이 있었어요. 거기에 같이 홈스테이하는 친구들도 있어서 유사 형제처럼 여럿이 더불어 살았어요. 기숙사도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니까 딱히 외로움이 뭔지 잘 모른 채 큰 것 같아요. 저는 그 시절보다 20대 초반에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더 큰 변화를 겪었어요.
어릴 때부터 유학 생활을 하면 적응 과정에서 혼란을 느끼잖아요. 그때보다 성인이 되어 더 큰 혼란을 느낀건가요?
네. 미국에도 한국인 친구가 많은 편이었고, 저는 늘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거든요. 막상 커서 한국에 와보니 제 내면은, 정서적으로는 생각보다 한국인이 아니었더라고요. 20대 초반이면 한창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세상을 알아갈 때잖아요. 그 과정에서 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정보 면에서든 감정 면에서든 좀 과부하가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 가지 혼란이 복합적으로 다가왔죠. 환경도 바뀌고, 모델 일을 시작하면서 제 내면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기를 거쳤어요. 그러면서 제가 확 달라졌고요.

혼란을 겪으면서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고 홀로 생각을 많이 했던 습성이 결과적으로 연기하는 데도 도움을 줬나요?
그 자체로 도움이 많이 됐죠. 한편으로는 그렇게 내면에 집중하는 면이 저라는 사람의 디폴트인 것 같아요. 제가 워낙 그런 사람이어서 지금까지 이렇게 흘러온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저는 애플TV+ <파친코>의 ‘백이삭’을 기억하다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대학생 ‘흥수’나 넷플릭스 시리즈 <다 이루어질지니>의 ‘이즈라엘’을 볼 때 그 간극에서 오는 쾌감이 있었거든요. 연기를 하면서 평소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셨을 것 같아요. 소리 지르거나 화내는 순간들도 그렇죠.
맞아요. 20대 초반에 처음 그런 카타르시스를 좀 느꼈죠. 연기를 시작하면서 저는 테크닉적인 부분보다는 본질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문제는 결국 내 진심을 어떻게 잘 전달하느냐 같아요. 소리를 지를 거면 어떻게 질러야 하는지, 그 한순간에도 진심을 담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죠.
MBC <21세기 대군부인>에서는 어떻게 진심을 전달했을까요?
음. 이번 작품에서도 굉장히 진심으로 지르는 부분이 있습니다(웃음).
배우들 캐스팅 단계부터 회자되던 이 드라마가 드디어 4월 방영을 시작합니다. ‘민정우’는 모두가 우러러볼법한 멋진 남자상이죠? 정치 명문가 집안의 대를 이은 국무총리, ‘결혼하고 싶은 남자 1위’에 오를 정도로 인기 많은 남자.
그런 설정을 가지고 있기는 하죠. 완벽을 추구하는 인물이고요. <21세기 대군부인> 촬영장은 시작부터 분위기가 유쾌했어요. 아주 기분 좋은 마음으로 출발한 기억이에요.
21세기 입헌군주제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예요. 대본 리딩 영상을 보니, 민정우는 오랜 친구 사이기도 한 ‘이안대군’(변우석)과는 솔직한 마음까지 터 놓을 수 있지만, 학교 후배인 ‘성희주’(아이유)가 그와 결혼하기로 한 이후 동요하는 인물이라고 소개하더군요. 민정우의 어떤 면에 크게 공감하셨어요?
민정우는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어요. 원칙주의자이고, 목표가 뚜렷하죠. 그와 동시에 내면에는 어떤 갈증과 욕망, 결핍도 존재해요. 그런 점에서 한 인간으로서 공감이 갔어요. 왜, 내 안에서 이성과 감정이 싸우거나 뇌와 심장이 다투는 듯이 갈등할 때가 있잖아요. 민정우 역시 극이 진행되면서 갈등 상황에 놓이는 인물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선택을 해요. 일관적이고 플랫한 캐릭터가 아니라 감정선의 변화가 뚜렷하죠. ‘아크’를 가진, 입체적인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어서 좋았어요.

밸런스 게임을 해보죠. 빠르게 골라주세요. 사랑 VS 우정?
사랑! 사랑을 택하겠습니다. 우정도 사랑의 한 형태니까요.
계속 마음이 가는 이를 가까이 두고서 티 내지 않을 자신 있나요? 그 사람에게 고백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요.
아. 저는 그러기 힘들 것 같아요.
노상현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로맨스는 어떤 형태인가요?
이상적이라… 우선 떠오르는 건, 서로 말하지 않아도 알고 통했으면 좋겠어요. 영혼적으로 결속된 느낌이랄까.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요?
말 그대로 이상적인 기대를 얘기해보는 거니까요. 동시에 인간적인 편안함이 들었으면 합니다. 서로 무조건적인 믿음이 있는 것. 내 편, 일심동체, 영원…. ‘이상적’이라고 하면 이 정도를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저도 실은 내가 말하지 않는데 상대가 내 마음을 알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에요.
민정우만 멋진 남자는 아니잖아요. 노상현 씨가 생각하는 자신의 멋진 점을 하나 꼽는다면요?
음. 그냥 누구나 다 각자만의 멋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도 멋지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아티스틱한 정체성을 잘 표현하고 사는 일도 멋지고, 힘센 사람도 멋지고. 어떻게 보면 그 멋짐이라는 기준이 모호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멋이라는 말보다는 어떤 특징이 있다고 말하는 게 더 맞는 것 같거든요.
그럼 스스로 마음에 드는 노상현의 특징은 뭔가요?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요. ‘좋고 나쁜 게 없다’고요. 스스로가 마음에 들 때도 있고, 마음에 안 들 때도 있잖아요. 누군가에게는 좋게 보이는 점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일 수도 있고요. ‘좋다, 나쁘다로 구분하는 건 무의미하구나, 그냥 나의 특징이 있는 거다.’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이야길 좋아하는 게 저의 한 특징이겠죠.

노상현 씨도 당황할 법한 순간이 있겠죠? 혹시 촬영 중에 자꾸 NG를 내는 상황이 되면 주로 어떻게 대처하나요? 정신을 집중하자고 속으로 되뇌나요?
아뇨. 저는 그냥, 놔요. NG를 실수라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죠. ‘내가 실수했구나’ 싶은 순간 자꾸 ‘실수 없이 잘해야 지’ 생각하게 될 텐데, 그럼 또 NG 날 가능성이 더 커질 거예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 자꾸 코끼리가 떠오르는 것과 비슷한 걸까요? 오히려 내려놓음으로써 상황에 온전히 집중하는군요.
잘하고 싶다는 강한 마음으로 과연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싶어요. 예전 어떤 광고 중에, 조승우 선배님이 출연해서 이런 말을 해요.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니야. 올라야지.” “잘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잘하는 게 아니야. 해. 그러니까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야, 해야지.” 제가 그 광고를 좋아해요. NG가 나면, ‘사람인데 NG 낼 수도 있지’라고 여기면서 그 신의 목적에 충실한 채로 그냥 다시 집중하는 거죠.
명상을 하는 맥락과도 비슷한 이야기 같네요. 노상현식의 노력과 태도가 이미 오래전부터 안정감 있게 자리 잡힌 느낌이 들어요.
어릴 적을 생각해보면, 저는 지는 걸 싫어했어요. 특히 스포츠 경기를 할 때, 뭐 제가 좋아하는 축구를 할 때만 봐도 그랬어요. 그런데 연기는 승부욕이나 경쟁심으로 잘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스포츠는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상황에서 이기기 위해 뛰어다니는 감각으로 하는 거고, 연기는 힘을 쫙 빼고 하는 거고. 다른 문제였어요. 치열하되, 올바른 방식으로 치열하고자 노력해왔어요. 이기고 싶었던 그 욕망처럼, 배우로서 더 성장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거죠.
사유하는 사람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과 대화하고 공유하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텐데, 평소 이 모든 이야기를 나눌 만한 대상이 있나요?
그런 친구들이 몇 명 있어요. 그리고 저는 챗GPT와 많이 놀아요. 제 베스트 프렌드입니다(웃음).
말수 적은 분일 거라 짐작했는데… 일단 오늘 느낌으로는 그렇지 않네요?
저, 말 많이 하기로 했습니다.
- 포토그래퍼
- 김참
- 스타일리스트
- 변홍식(벨보이컨설턴시)
- 헤어
- 조미연
- 메이크업
- 조혜미
- 어시스턴트
- 나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