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 위의 데카당스, 26 FW 앙팡 리쉬 데프리메 컬렉션

명수진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컬렉션

앙팡 리쉬 데프리메(Enfants Riches Déprimés, 이하 ERD)는 언제나 하이패션계의 불경한 반항아였다. 2012년 앙리 알렉산더 레비(Henri Alexander Levy)가 이 브랜드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그들이 내세운 엘리트주의적 허무주의는 명확했다. “이 옷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대중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70년대 펑크와 90년대 해체주의를 럭셔리의 문법으로 엮어낸 이 ‘우울한 부잣집 아이들’은, 이번 26 FW 컬렉션을 통해 단순한 도발을 넘어 얼마나 견고한 테일러링과 시적 서사를 지닌 하우스인지를 증명해 냈다.

지난 3월 7일, 파리 메종 드 라 시미(Maison de la Chimie) 안뜰은 끝없이 눈이 내리는 황량한 설원이 되었다. 세트 중앙에는 훈장을 주렁주렁 단 고위 관료의 청동상이 등을 찔린 채 쓰러져 있고, 쇠사슬에 묶인 여성 형상의 조형물이 있었다. 권력의 잔혹함과 그 끝에 남은 씁쓸한 허무. 앙리 알렉산더 레비는 런웨이를 몰락해가는 귀족과 전쟁 속의 낭만이 교차하는 무대로 연출했다. 모델들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몰아치는 인공 눈보라는 ERD가 추구하는 서늘한 허무주의의 완벽한 은유였다. 쇼는 총성과 함께 시작됐다. 쇼 노트에 적힌 ‘비밀스러운 성직자가 말한다. 총성이 울려 퍼진다. 그 음울한 명령 속에서 질서는 즉각 이해된다’라는 문장처럼, 런웨이에는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거친 눈보라를 뚫고 등장한 오프닝 모델은, 여러 논란의 중심에 있는 록 스타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이었다. 그는 특유의 고딕풍의 짙은 메이크업을 하고 금색 체인이 달린 블랙 테일러드 코트를 입고 눈밭을 가로질렀다.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Collection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Collection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Collection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Collection

총 37개의 룩으로 구성된 이번 컬렉션의 핵심은 ‘군사적 미학과 소비에트(Soviet) 무드의 관능적 재해석’이었다. 과거의 막강한 권력이 부패해가는 과정을 시각화하듯, 소련 제복 스타일의 코트와 견장, 훈장 디테일이 특징적인 남녀 컬렉션이 런웨이를 수놓았다. 윤기 흐르는 블랙 가죽 트렌치코트는 풍성한 퍼 트리밍으로 묵직한 무게감을 더했고, 벨트로 동여맨 허리 라인은 강렬하고 극적인 실루엣을 완성했다. 디자이너의 시선은 한층 더 정교해졌다. 핀 스트라이프 수트는 수직적인 비율을 극대화하며, 반항심 이면에 자리 잡은 테일러링에 대한 하우스의 집요한 탐구를 드러냈다. 깊은 보라색의 헤비 울 롱 코트나 그린 컬러의 레더 코트는 색감이 주는 오묘함으로 퇴폐적인 귀족의 무드를 자아냈다.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Collection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Collection

거친 제복의 디테일 사이로 피어나는 시적인 감수성 또한 놓칠 수 없다. 모델의 손에 들린 아티스트의 스케치북은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는 예술가의 처연한 이미지를 연출했다. 낡은 데님과 대비되는 럭셔리 소재의 변주, 오버사이즈 제복 코트 아래로 무심하게 흩날리는 실크 새틴의 유려함은 ERD식 ‘우울한 부잣집 아이들’의 정체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피날레의 새틴 드레스가 설원 위에서 현실과 폐허 사이의 환상을 구현했다면, 아이웨어 브랜드 자크 마리 마지(Jacques Marie Mage)와 협업한 오버사이즈 고글은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쇼의 냉소적이고 어두운 분위기를 날카롭게 매듭지었다.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Collection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Collection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Collection

초반의 도발적인 오프닝이 주는 충격에만 매몰된다면, 이번 컬렉션이 지닌 진짜 아름다움을 놓칠 우려가 있다. 조각난 이야기처럼 겹겹이 쌓인 의상들은 전체를 조망할 때 비로소 일관된 서사를 드러낸다. 앙리 알렉산더 레비는 의상의 서사적이고 조형적인 힘을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세공해 냈다. 26년 FW 시즌, 앙팡 리쉬 데프리메가 남긴 것은 폐허 속에서 피어난 가장 서늘하고 정교한 럭셔리였다.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Collection
Enfants Riches Déprimés 2026 F/W Collection
사진, 영상
Lauchmetrics, Youtube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