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S/S 오트 쿠튀르에서 만난 결정적 장면들

김민지

2026 S/S 오트 쿠튀르의 다음 장

AI쇼가 던진 질문

이번 시즌 파리 오트 쿠튀르에서 가장 급진적인 장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없던 순간이었다. 알렉시 마비유 쇼는 모델도, 실물 드레스도 등장시키지 않았다. 런웨이는 스크린으로 대체되었고, AI가 생성한 이미지가 쇼를 구성했다. 만질 수 없는 옷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질감. 오트 쿠튀르는 본디 지극히 물질적인 장르이다. 바늘과 실, 손의 감각, 수백 시간의 자수, 피팅과 수정의 반복으로 완성되는 쿠튀르는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의 축적물이다. 화면 속의 쇼잉이 끝나고, “이게 정말 끝인가?”라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왔다. AI 홍수 속 가장 논쟁적인 쇼. 그것이 쿠튀르인가에 대한 답은 아직 유보되어 있다.

재고를 작품으로

제르마니에의 오트 쿠튀르 ‘레 샤르도네(Les Chardonneuses)’는 팔리지 않은 하이엔드 재고를 가장 화려한 쿠튀르로 재탄생시켰다. 2018년 LVMH 프라이즈 세미파이널리스트로 이름을 올린 그는 LVMH 그룹 산하 루이비통, 디올, 펜디, 겐조 등의 데드스톡과 벨루티의 유니폼까지 해체하고, 비즈와 네온 컬러를 활용, 조형적 실루엣으로 재구성했다. 팔리지 않은 옷들이 화려한 쿠튀르 무대에서 재탄생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며, 패션의 지속 가능성을 가장 눈부신 방식으로 증명해냈다.

몸 위의 건축

쿠튀르에서 조형 예술을 빼놓을 수 있을까. 과장된 숄더와 돔처럼 부풀어 오른 스커트, 중력을 거스르는 트레인처럼 비현실적인 실루엣은 옷을 하나의 구조물로 만든다. 내부의 코르셋과 와이어, 겹겹이 쌓인 소재들은 형태를 지탱하는 건축적 장치다. 여기에 자수와 비즈, 레이스가 더해지면 표면 또한 입체적인 조각품처럼 완성된다. 결국 쿠튀르의 조형성은 몸을 캔버스로 삼아 새로운 비례와 실루엣을 창조하는 데 있으며, ‘입는 것’을 넘어 ‘형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확장한다.

데뷔 쇼 & 데뷔 쇼

지난 2026 S/S 시즌,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나란히 데뷔한 마티유 블라지와 조나단 앤더슨. 두 사람은 2026 S/S 오트 쿠튀르 컬렉션으로 쿠튀르 첫 무대를 치렀다. 먼저 샤넬의 수장을 맡은 블라지는 “시그너처를 지우면 샤넬에는 무엇이 남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트위드와 카멜리아 같은 대표 심벌 대신 구조와 태도, 그리고 하우스의 본질에 집중한 것. 동시대적 감각을 덧입힌 그의 샤넬은 절제된 미학 속에서 공방의 수작업과 아틀리에의 정교한 테일러링을 더욱 선명히 드러냈다. 그렇게 그는 샤넬만의 사부아페르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한편 디올의 앤더슨은 무슈 디올 이 사랑한 ‘꽃’에 대한 오마주로 오트 쿠튀르를 풀어냈다. 그는 제작 일정을 재조정해 장인들이 디테일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일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전해진다. 디올 쿠튀르의 핵심 아틀리에인 플루(Flou)와 타이외르(Tailleur) 팀이 수개월에 걸쳐 완성한 실크 시클라멘 꽃잎 드레스는 그 집약체다. 수천 장의 꽃잎을 손으로 염색하고 자수로 얹어 실제 꽃이 피어난 듯한 착시를 연출했다. 같은 무대에서 첫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인 두 디렉터는 세간의 관심 속에서 이 관문 또한 무사히 통과한 듯 보인다. 그들의 이름 사이에 놓인 것은 ‘VS.’가 아닌 ‘&’. 앞으로도 파리 컬렉션의 화제성을 함께 견인해가길 기대해본다.

찰랑찰랑

샤를리 르 맹뒤 쇼는 직물 대신 인모를 사용해 드레스와 코트를 제작한 급진적인 무대였다. 모델들은 옷을 입는다기보다 거대한 헤어 조형물을 착용한 채 등장했고, 머리카락은 흐르는 패브릭이자 조각적 구조로 변모했다.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표면은 전통적인 텍스타일이 줄 수 없는 긴장감을 연출했다. 이는 상업적 패션이라기보다 퍼포먼스 아트에 가까운 실험이었다. 머리카락이라는 가장 개인적인 소재를 통해 그는 신체와 정체성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패션이 여전히 극단적 상상력을 품을 수 있는 장르임을 증명하려는 듯. 

동양에서 온 두 서사

이번 시즌 주목할 또 하나의 흐름은 ‘동양에서 온 시선’이었다. 한국의 미스 소희와 베트남의 판 후이. 미스 소희의 극적으로 조인 허리, 과장된 힙 라인, 돔처럼 부풀어 오른 실루엣은 팝스타 스타일을 연상시키지만, 그 조형의 바탕에는 한국적 미감이 자리한다. 한복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적 실루엣, 치마의 우아한 볼륨을 연상시키는 구조, 절제된 색감과 여백의 감각이 그렇다. 판 후이는 베트남의 역사와 장인 정신을 전면에 내세운다. 전통 자수, 수공예 디테일, 지역적 모티프를 기반으로 한 디자인은 하나의 ‘문화적 서사’처럼 전개된다. 동양의 디자이너들은 더 이상 쿠튀르 무대에서 이국적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중심을 향하고 있다.

베스트 베뉴

이번 시즌, 베뉴는 단순한 무대미술이 아니었다. 각 하우스가 패션을 바라보는 태도를 공간으로 번역한 하나의 선언에 가까웠다.

CHANEL

샤넬
마법의 숲

그랑팔레는 이번 시즌 동화 속 한 장면처럼 변모했다. 연분홍으로 채색된 바닥 위에 붉은색, 분홍색, 노란색의 대형 버섯과 늘어진 버드나무가 설치되며 공간은 하나의 ‘마법의 숲’이 되었다. 런웨이는 숲속 호젓한 오솔길처럼 나선형으로 배치되어, 모델들은 관객을 감싸듯 거닐었다. 버섯은 죽은 것을 분해해 새로운 생명을 길러내는 존재다. 마티유 블라지는 이 상징을 통해 전통을 해체하고 다시 세우는 자신의 창조적 태도를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하우스의 시그너처를 반복하기보다 구조를 재조립하는 방식. 그가 구축한 숲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샤넬이라는 유산을 유기적으로 순환시키는 생태계에 가까웠다. 과잉 장식 대신 구조와 장인의 손길을 부각한 의상들은, 버섯 숲이라는 상징적 배경 안에서 ‘재생’이라는 메시지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냈다.

DIOR

디올
미래 고고학 

출발점은 존 갈리아노가 그에게 선물한 시클라멘 부케. 게스트들에게도 상자에 담긴 시클라멘 꽃다발이 인비테이션으로 전달되며 컬렉션을 예고했다. 앤더슨은 ‘Future Archaeology’라는 테마 아래 오트 쿠튀르를 과거의 유물이 아닌, 끊임 없이 변형하며 진화하는 생태계로 재정의했다. 파리 로댕 미술관은 디올의 오트 쿠튀르 쇼를 위해 온실과 유적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천장에는 수천 송이의 시클라멘과 이끼가 거꾸로 매달려, 마치 공중에 떠 있는 숲 아래를 걷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관객은 땅 위에 서 있지만, 시선은 위로 향한다. 중력이 전복된 풍경 속에서 쿠튀르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출현한다. “자연은 완성된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직 변화와 적응, 지속만을 보여줄 뿐이다.” 디올의 꽃은 장식이 아니라 진화의 메타포였다.

VALENTINO

발렌티노
시선의 구조 

발렌티노의 ‘스페큘러 문디(Specular Mundi)‘ 컬렉션은 19세기 시각 장치 ‘카이저 파노라마’를 참조해 원형 구조 안에서 각자의 위치로 나뉜 관람 방식을 제안했다. 시선의 구조 자체를 설계한 공간. 관객은 함께 있지만, 동시에 고립되어 있다. 집단적 경험이면서도 철저히 개인적인 관람인 셈이다. 이는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오트 쿠튀르가 제안하는 또 다른 시간성, 즉 ‘느림, 집중, 제한’을 상징한다. 이 장치는 가시성을 확대하기보다 오히려 제한한다. 의상은 스펙터클의 대상이 아니라 의례의 존재처럼 현현한다. 테크노 리듬이 종소리를 대신하며 장면의 전환을 알리고, 모델은 마치 제단 위에서 드러나는 신화적 존재처럼 출현한다. 발렌티노는 ‘보는 방식’ 그 자체를 질문했다.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지각의 구조를 통해 패션을 다시 사유하게 만든 것이다. 

애도의 방식

창립자의 타계 이후 처음으로 선보인 두 무대. 조르지오 아르마니 서거 이후 공개된 조르지오 아르마니 프리베, 그리고 2025년 11월 세상을 떠난 발렌티노 가라바니에게 서신을 보내며 완성된 발렌티노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프리베는 그의 조카 실바나 아르마니(Silvana Armani)가 선보인 첫 번째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40년 넘게 삼촌 곁에서 브랜드의 핵심 작업을 함께 수행해온 그는 데뷔 컬렉션을 통해 하우스의 유산을 계승하는 동시에 자신만의 시각을 분명히 드러냈다. 절제된 컬러 팔레트 속에서 리퀴드 실루엣과 섬세한 비즈 자수가 조용한 호화로움을 완성했다. 피날레의 화이트 웨딩드레스는 생전의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직접 완성한 작품으로, 과시하지 않는 화려함에 대한 마지막 헌사처럼 무대를 마무리했다. 반면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발렌티노 가라바니의 유산을 맥시멀한 서사로 확장했다. 아카이브 실루엣 위에 르네상스·빅토리언 요소와 맥시멀 장식을 더해 상상 속 귀족을 창조한 것. 두 쇼 모두 유산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꿈의 서사’를 확장하며 성공적인 선언을 마쳤다.

우리는 분노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스키아파렐리의 2026 S/S 오트 쿠튀르는 분노라는 감정을 전갈의 꼬리, 솟구친 뿔, 날 선 가시와 스파이크, 갈고리처럼 휘 어진 구조로 형상화했다. 대니얼 로즈베리는 3D로 구현한 전갈 꼬리와 금속 프레임 위에 얹은 레이스, 뾰족하게 돌출된 숄 더와 하이 네크라인을 통해 공격적 실루엣을 극대화했다. 복어의 가시를 닮은 튤 장식, 조류의 부리와 발톱을 연상시키는 디테일은 몸을 보호하는 갑옷이자 위협의 제스처로 작동했다. 꼬리·뿔·가시는 단순 장식이 아니라, 고통을 힘으로 전환하는 조형적 선언처럼 보였다.

일기예보

로버트 운의 이번 쇼는 옷만이 아니라 기후와 감정의 변화를 함께 연출한 무대였다. 배경 전광판은 맑은 하늘에서 노을, 폭풍, 먹구름으로 끊임없이 전환했고, 모델은 그 변화 속을 통과하듯 걸었다. 특유의 조형적 실루엣과 드라마틱한 색채는 변화하는 하늘과 맞물리며 거의 영화적 장면이 연출되었다. 날씨라는 보편적 장치를 통해 패션을 감정의 서사로 확장한 아름다운 무대였다. 

결과보다 과정

이번 시즌 빅터앤롤프는 완성된 쿠튀르를 자랑하는 대신,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를 무대 위에 올렸다. 런웨이에서 드레스는 구조가 조립되고, 장식이 추가되고, 실루엣이 수정된다. 듀오 디자이너가 직접 무대에 오른 이 연출은 쿠튀르의 본질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완벽함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차례의 수정과 선택, 덧붙임 끝에 도달한다는 것, 그리고 쿠튀르는 완성된 이미지가 아니라, 무수한 시간이 축적된 행위 예술이라는 것. 화려함 대신 과정을, 환상 대신 구조를 선택한 쇼.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