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적 낭만의 계보를 잇다, 26 FW 에르뎀 컬렉션

명수진

ERDEM 2026 FW 컬렉션

에르뎀은 런던에서 보기 드문 독립 럭셔리 브랜드다. 20년 동안 대형 자본에 편입되지 않은 채 생존하며 상업성과 예술성을 함께 성취한 ‘조용한 강자’다. 창립자이자 오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에르뎀 모랄리오글루는 오랜 기간 쇼를 열어온 영국 박물관을 떠나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듀빈 갤러리(Duveen Galleries)에서 브랜드 20주년을 기념하는 무대를 선보였다. 헬렌 미렌(Helen Mirren), 키이라 나이틀리(Keira Knightley), 글렌 클로즈(Glenn Close) 등 배우들이 참석해 20주년의 무게감을 더했다.

에르뎀 모랄리오글루는 시대를 초월해 주목받은 여성들, 특히 당대에는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지만 혁신적이었던 인물들의 삶과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어왔다. 26 FW 시즌에는 지난 20년을 돌아보듯, 자신에게 영감을 준 여러 뮤즈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했다. ‘불가능한 대화(Impossible Conversations)’를 주제로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20년대 레즈비언 문학의 선구자 래드클리프 홀(Radclyffe Hall), 데본셔 공작부인 데보라 미트포드(Deborah Mitford), 영국의 선구적인 여성 사진작가 마담 예본드(Madame Yevonde) 등의 이미지가 교차했다.

컬렉션은 흑백 영화처럼 모노톤으로 시작해 파스텔 블루와 딥 그린, 바이올렛, 핑크, 레드로 서서히 채도를 높여갔다. 실크와 레더, 퀼트, 트위드, 벨벳, 시퀸, 레이스, 크리스털이 겹겹이 빛을 반사하고, 타조 깃털과 시폰 조각이 흔들리며 풍성한 양감을 더했다. 마리아 칼라스가 무대에서 입었을 법한 드라마틱한 오페라 코트 실루엣과 영국 상류층의 상징이었던 데본셔 공작부인 드레스의 플로럴과 레이스 장식이 겹쳐졌다. 카나리아 옐로 컬러의 비즈 드레스, 깃털 코트, 빅토리아풍 레이스 드레스는 영국식 예식과 장인정신의 전통을 환기하는 동시에 마치 의복으로 그린 회화처럼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그러나 에르뎀은 늘 그렇듯 우아함 속에 균열을 남겼다. 섬세한 드레스 사이로 등장한 박시한 블레이저와 루스한 코트는 남성복을 즐겼던 래드클리프 홀의 매니시한 테일러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특히 파니에(Pannier) 스커트에 18세기 실크 다마스크 브라톱, 보이시한 데님을 믹스 매치한 룩이 눈에 띄었다. 이는 디자이너 자신의 왕립예술대학(Royal College of Art) 졸업작품을 오마주한 것으로, 과거를 현재의 언어로 번역하는 이번 시즌의 기조를 완벽하게 드러냈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은 바버(Barbour)와의 협업이었다. 실크 다마스크 안감과 볼륨 있는 소매, 플로럴 패치워크를 더해 에르뎀의 문법으로 재해석한 영국 필드 재킷은 확실히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부 룩에는 겉면에 대형 라벨이 부착되었는데, 이는 바버 협업을 드러내는 표식이자 브랜드 20주년을 기념하는 ‘화이트 라벨’, 그리고 마담 예본드에 대한 헌정을 암시했다. 일반적으로는 옷 안쪽에 숨기는 라벨을 외부로 드러냄으로써 에르뎀이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유산이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피날레에는 펑크 밴드 시욱시 앤 더 반시즈(Siouxsie and the Banshees)의 ‘해피 하우스(Happy House)’가 흘러나왔고, 모랄리오글루 에르뎀은 쇼 노트의 한 문장으로 지난 20년의 시간을 따뜻하게 마무리했다. “내 손을 잡아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영상
Courtesy of ERDEM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