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3일부터 닷새간, 카타르 도하에 아트바젤이 상륙했다.
베일에 싸여 있던 첫 에디션, 제1회 아트바젤 카타르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고, 도하는 스스로를 하나의 무대로 선언했다.

“카타르는 팔림프세스트와 같다.” 아트바젤 카타르를 위해 도하에 머무는 동안, 이 문장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본래 팔림프세스트란 귀한 양피지를 재활용하기 위해 기존 글씨를 긁어내 그 위에 새로운 기록을 겹쳐 쓴 기록물을 뜻한다. 흔히 켜켜이 쌓인 시간의 층위와 과거의 잔영을 품은 현재를 상징할 때 쓰이는 이 비유는, 지금 카타르가 보여주는 기묘한 역동성을 설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수도 도하에 자리한 수백 년 역사의 전통 시장 ‘수크 와키프’에서 낙타 기병대의 행진을 지켜보는 것은 이곳의 일상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전통 의상 ‘아바야’를 입은 여성의 형상이 그려진 도로 표지판을 지나, 경제 수도라 불리는 루사일 지역의 초현대적인 스카이라인에 진입하는 순간, 시공간의 감각은 급격히 재편된다. 이곳 인근 호텔에 머물던 어느 날, 룸서비스를 가져다준 호텔 직원은 창밖의 고요한 거리를 가리키며 담담하게 덧붙였다. “이곳은 바다를 매립해 세운 도시예요. 거리 위로 차가 잘 다니지 않는 건, 모든 이동 체계가 지하 터널로 숨어들었기 때문이죠. 카타르는 단순히 미래를 지향하는 곳이 아니라, ‘미래 그 이후’를 살고 있는 장소라 할 수 있어요. ”
이처럼 과거의 원형을 보존하면서도 그 위에 가장 급진적인 미래를 덧쓰고 있는 카타르에, 세계 최대의 아트페어 플랫폼인 아트바젤이 닻을 내린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귀결처럼 보인다. 지난해 미술계는 그간 서구 중심적 시각 속에서 다소 사각지대로 취급되던 중동이 시장의 전면으로 급부상하는 장면을 목도하며 적잖이 술렁였다. 아트 바젤이 2026년 2월 카타르에서 첫 에디션을 성공적으로 쏘아 올린 데 이어, 경쟁 플랫폼인 프리즈 역시 11월 아부다비 상륙을 예고하며 이른바 ‘걸프 루트’를 둘러싼 점령전에 가세한 것이다.


이러한 포트폴리오 확장은 실은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에 가깝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가 발간한 글로벌 아트 마켓 보고서가 지적하듯, 장기화된 경기 침체와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서 지난 2년 연속 미술 시장 전체 매출은 크게 감소했다. 성장이 정체된 구대륙의 대안으로 부상한 곳이, 바로 페르시아만 지역이다. 방대한 화석 연료 자원에서 비롯된 압도적 자본력, 국가 주도의 공격적인 문화 인프라 투자, 그리고 베일에 싸여 있는 잠재 컬렉터층까지. 중동이 글로벌 미술 시장의 새로운 각축장으로 떠오른 배경에는 이 모든 조건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다.
“확실히 첫 에디션이라 그런지 힘을 준 게 느껴집니다. 주최 측에서 거의 모든 참여 작가들에게 왕복 항공권과 5성급 호텔 숙박을 지원했거든요. 오일 머니의 저력을 실감하는 중이에요.” 카타르 왕실의 비공개 투어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2월 3일, 아트바젤 카타르의 공식 VIP 프리뷰 데이에서 만난 한 갤러리스트는 말했다. 이번 페어에 이름을 올린 딜러는 31개국 87개 갤러리다. 통상적인 아트바젤 규모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내실은 자본의 화력으로 촘촘히 메워졌다. 특히 카타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은 참가 갤러리들의 비용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춰주었다. 부스 면적에 따라 가혹한 비용을 책정하는 기존 아트페어의 관성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액수는 베일에 가려져 있으나 파격적인 조건으로 진입 장벽을 허문 것이다. 갤러리 입장에서는 운송과 체류, 인건비 등 부대 비용에 따른 부담을 상당부분 덜어낸 셈이다.
전 세계 아트페어를 순환하다 보면 계절처럼 반복해 마주치게 되는 얼굴, 동명의 메가 갤러리를 설립한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 역시 고무적인 반응을 보였다. “매우 인상적인 출발입니다. 올해 선보인 페어 모델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 지역에서 페어를 시작하는 방식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언급한 ‘훌륭한 선택’이란 올해 아트 바젤 카타르가 채택한 실험적 구조를 가리킨다. 이번 페어는 이집트 출신의 예술가 와엘 샤키(Wael Shawky)의 지휘 아래, 관성적으로 반복되던 기존의 백화점식 나열에서 과감히 탈피했다. ‘되어가기(Becoming)’이라는 단일 주제 아래 모든 부스를 솔로 작가 프레젠테이션으로 구성함으로써, 페어장은 거대한 거래의 장이라기보다 하나의 큐레이토리얼 전시에 가까운 인상을 남겼다.

확실히 그간의 아트페어를 돌며 축적된 피로가 있다. 거미줄처럼 얽힌 플로어 맵을 따라 빼곡히 나열된 부스를 거닐다 보면, 늘 보던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이 반복해서 걸려 있는 광경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번 페어의 예술감독 와엘 샤키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 지점을 명확히 짚어냈다. “전 세계적으로 아트페어에 대한 수요는 여전히 크지만, 동시에 문화적으로 유의미한 경험에 대한 갈증 또한 커지고 있습니다. 아트바젤 카타르가 제안하는 방식은 더 느리고 주의 깊은 감상을 유도합니다. 관람객의 길잡이는 시장의 지식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이어야 하니까요. ”
그의 말에 동의한다. 실제로 이번 페어장에서 다소 낯선 감각을 경험했다. 하나의 부스에 머무르며 작품을 진지하게 응시하는 시간의 밀도가 분명히 달라졌다. 단일 작가 프레젠테이션은 예술가의 세계관을 느릿하게 탐구할 기회를 줬고, 출품 작가의 절 반 이상이 MENASA(중동·북아프리카·남아시아) 지역 출신인 만큼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를 새롭게 발견하기에도 충분했다. 나아가 작품이 판매되면 곧바로 다른 작품으로 교체해 상업적 효율을 극대화하는 기존 페어의 관행과 달리, 아트바젤 카타르는 ‘첫 구성을 변경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갤러리 입장에서는 가혹한 선택이었을지 모르나, 관람객에게는 페어 전체가 단일한 주제 의식 아래 응집된 하나의 거대한 기획전으로 읽히 는 효과를 남겼다.


상업 아트페어의 ‘비엔날레적 접근’이 와엘 샤키의 말처럼 관람객에게 유의미한 경험을 안겨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페어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어쨌든 세일즈다. 과연 실적 면에서도 갤러리들은 웃을 수 있었을까? 통상 VIP 프리뷰 데이가 끝나면 그날의 판매 성과를 정리한 세일즈 리포트가 새벽 무렵 기자들의 메일함을 채운다. 그러나 이번 페어만큼은 예외였다. 대부분의 갤러리가 구매처를 비공개로 부치거나, 페어가 완전히 종료된 후에야 선별적으로 정보를 공개하는 등 신중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우저 앤 워스는 약 1,400만 달러(한화 약 189억 원)에 달하는 필립 거스턴의 후기 자화상 ‘Conversation’(1978) 을 선보였고, 피카소(밴더웨이)와 바스키아(아쿠아벨라) 같은 모던 마스터의 수작도 포진했다. 하지만 이번 페어의 실질적 중심 가격대는 8만~45만 달러(약 1억~6억원 중반) 사이로 추정된다.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는 지난 2월 9일 이번 페어의 성적을 진단하는 기사를 배포했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기관 매입 활발, 미드마켓 강세, 신중한 판매 흐름.’ 페어장에서 만난 화이트 큐브의 글로벌 세일즈 디렉터 마티유 파리(Mathieu Paris)도 이 같은 말을 보탰다. “중동의 컬렉터들은 대체로 장기적 관점에서 미술에 접근해요. 단기적인 시장 흐름보다 작가의 작업이 지닌 지속성이나 역사적 무게, 제도적 맥락에서의 의미를 중시하죠.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일관된 컬렉션을 구축하는 경향이 있어요.”
신장개업한 집에는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다. 가고시안, 데이비드 즈워너, 페이스 같은 메가 갤러리들도 이러한 초기 동력에 반응해 도하행을 택했을 거다. 일단 아트바젤 카타르의 첫 에디션은 순조롭게 돛을 올렸다. 다만 매년 2월 도하가 미술계 주요 플레이어들에게 고정적인 아트 캘린더의 한 축으로 안착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카타르 공주이자 카타르 뮤지엄(QM) 이사장, 나아가 세계 미술 시장의 큰손으로 통하는 셰이카 알 마야사(Sheikha Al Mayassa) 중심의 전폭적인 지원이 걷히고 난 뒤에도 이 열기가 유지될 수 있을까? 이번 개최 직전에도 지정학적 변수로 흔들렸던 걸프 지역의 긴장 고조는 또 다른 리스크로 작용하지 않을까?


그러나 단지 차갑게 지속 가능성을 저울질하기엔, 지난 나흘간 도하에 머물며 목도한 ‘예술적 순간들’의 잔상이 너무도 강렬하다. 특히 페어 전야, 이슬람미술관(MIA)에서 마주한 그 기묘한 ‘정적’을 잊을 수 없다. 페어의 시작을 알리는 성대한 웰컴 파티가 열린 그날, 수백 명의 아트피플은 고조된 음악 소리에 맞춰 치열하게 네트워킹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일순 음악이 멈추고 새카만 도하의 밤하늘 위로 제니 홀저의 ‘Song’이 떠올랐다. 700대 이상의 드론이 두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 (Mahmoud Darwish)와 누줌 알가넴(Nujoom Alghanem)의 시구를 밤하늘의 문장으로 수놓는 풍경 앞에서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마치 세상이 멈춘 듯한 그 20분 동안만큼은 시장의 논리나 블루칩의 향방, 거래의 치열함 따위는 미미한 소음에 불과했다.
대부분이 시끌벅적한 펍으로 몸을 숨기던 어느 밤, 홀로 마주한 강렬한 열대야자 잎의 냄새 또한 잊을 수 없다. 레바논 출신의 작가 라이얀 타벳(Rayyane Tabet)은 ‘공유되는 안식처’를 상상하며 체험형 파빌리온 ‘What Dreams May Come’을 직조해냈다. 하루 종일 페어장을 누비다, 관람객 하나 없는 타벳표 ‘안식처’에 당도했을 때 밀려온 감각은, 과장이 아닌 한 치의 오차 없는 고요한 안식이었다. 이 몰입형 설치는 므셰이레브 일대 곳곳 에 대형 장소 특정적 작업을 배치한 올해 페어의 ‘스페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그뿐만 아니라 천일야화의 환상을 캔버스에 옮겨놓은 듯한 라킵 쇼(Raqib Shaw)의 회화, 그리고 켜켜이 쌓인 시간의 층위를 다루며 마치 팔림프세스트 그 자체처럼 다가온 임민욱의 작품까지. 페어장에서 마주한 이 찰나의 장면들 역시 내내 긴 여운으로 남았다.
“이 페어는 스스로를 증명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미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고 있는 듯하다.” 화이트 큐브의 디렉터 마티유 파리는 분주한 페어장에서 만난 한 기관 자문가의 말을 빌려 이렇게 귀띔했다. 이 짧은 문장이 올해의 페어를 관통하는 가장 정교한 요약이라는 점에 그와 나 모두 이견이 없었다. 마티유 파리는 덧붙였다. “현장에는 조급한 활기 대신 차분한 확신과 숙고의 공기가 흐르고 있어요. 스펙터클한 규모에 매몰되기보다 장기적인 지향점에 무게를 둔 선택이죠. 그런 점에서 이번 아트바젤 카타르는 ‘첫 회’라기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한 분명한 방향성과 의지를 드러낸 장면에 가까웠어요.” 밤 하늘을 수놓은 드론의 시구와 고요한 파빌리온에서 마주한 안식은, 결코 우연히 얻어진 감흥이 아니었다. 지난 나흘간 마주 한 장면들은, 이 페어가 단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려는 야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지금 아트바젤 카타르는 어쩌면 또 하나의 팔림프세스트를 조용히 덧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 사진
- COURTESY OF ART BASEL
